위기도 ‘초고속’으로 불렀다
  • 이 은 지 (lej81@sisapress.com)
  • 승인 2010.06.29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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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속인터넷 업체들, 과다한 마케팅 비용 들여 가입자 유치 경쟁 벌이다 구조조정 사태 등 직면

3년 전, LG파워콤의 초고속인터넷에 가입했던 윤 아무개씨(45·서울 송파구 가락동)는 최근 이사를 하면서 SK브로드밴드로 바꿨다. 초고속인터넷과 인터넷전화, 인터넷TV(IPTV)가 결합된 상품으로 바꾸면서 현금 36만원을 받았다. 6개월간 IPTV를 무료로 시청할 수 있는 혜택도 받았다. 윤씨가 통합 LG텔레콤에 해지 신청을 하자 LG텔레콤에서는 명의자를 아내로 바꿔 신규 등록을 하면 41만원을 줄 수 있다고 응수했다. 윤씨가 머뭇거리자 6개월간 IPTV 요금을 50% 할인해주겠다는 혜택이 따라왔다. 일종의 해지 방어 마케팅이다. 결국, 윤씨는 LG텔레콤 결합 상품을 선택했다.

 

▲ 초고속인터넷 업체들간의 과도한 마케팅 경쟁으로 한 업체가 구조조정에 나서는 등 사회적 문제가 야기되고 있는데도 업체들의 가입자 유치 경쟁은 그치지 않고 있다. ⓒ시사저널 윤성호

 

유·무선 통신 시장에서 가입자를 빼앗아 오려는 사업자와 지키려는 사업자 간 경쟁이 치열하다. 그러다 결국 사단이 났다. 과다한 마케팅 비용으로 늘어나는 적자를 견디지 못한 SK브로드밴드가 지난 6월18일 구조조정에 나서겠다고 발표했다. 직원 1천7백명 가운데 20%를 정리 해고하고, 인력 재배치를 통해 연간 1천억원이 넘는 적자 폭을 단계적으로 줄여나가겠다는 회생 방안을 담았다. SK브로드밴드 노조는 즉각 반발하며 지난 6월21일부터 무기한 철야 농성에 돌입했다.

통신업계에서는 예견된 일이 터졌다는 시각이 팽배하다. SK텔레콤은 2008년 SK브로드밴드를 인수하면서 유·무선 통신이 결합되는 트렌드에 맞춘 새로운 전략을 세우지 못했다. 마케팅 비용은 늘어났지만, 매출은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했다. SK브로드밴드는 2009년 마케팅 비용으로 6천억원을 썼다. 전년에 비해 31.7%가 증가한 금액이다. 그 결과 초고속인터넷 가입자가 30만명 늘어났지만, 2천억원의 적자를 보았다.

SK브로드밴드 노사 모두 시장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SK브로드밴드 관계자는 “올해부터 통신 시장이 유·무선 결합 상품 위주로 바뀌고 있다. SK텔레콤이 SK브로드밴드를 인수하면서 이런 트렌드에 맞춘 전략을 세우는 것이 타사에 비해 부족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적자 폭이 늘어난 만큼 몸집을 줄이고 사업 전략을 새롭게 세워야 할 때가 왔다”라고 인정했다. 노조 관계자 역시 “SK브로드밴드 경영진이 SK텔레콤에서 넘어온 전문 경영인이다 보니 유선 시장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독자적으로 사업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권한도 없었다. 무선으로 유선 시장을 대체하려는 전략으로 대응하다 보니 유·무선 통신 결합이라는 시장 변화를 따라가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SK텔레콤이 SK브로드밴드를 합병한 것이 아니라 인수하는 바람에 시너지 효과를 제대로 낼 수 없었다는 지적이다.

합병에 성공한 KT와 LG텔레콤 역시 과다한 마케팅 비용으로 출혈 경쟁을 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3위 업체인 LG텔레콤의 올해 1분기 마케팅 비용은 유·무선을 합쳐 4천억원에 이른다. 매출액 대비 30%에 육박한다. KT는 지난 6월24일, LG텔레콤이 과다한 현금 제공을 멈추지 않고 있다며 방송통신위원회에 LG텔레콤의 초고속인터넷 사업 취소나 영업 정지를 요구하고 나섰다.

1위 업체인 KT는 KTF와 합병한 이후 지난해 하반기부터 마케팅 비용을 과도하게 늘렸다. 유·무선을 구분해 발표하지 않는 탓에 정확하게 추산하기는 어렵지만, KT 역시 매출액 대비 30% 가까운 비용을 현금이나 상품권을 지급하는 데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SK텔레콤이 방송통신위원회에 KT가 마케팅 비용을 과도하게 사용하고 있다고 시정 명령을 요구하기도 했다.

통신 3사가 모두 과도하게 마케팅 비용을 쏟아붓자 이를 악용하는 고객까지 생겨났다. 해약할 의사가 없음에도 해약한다고 말한 뒤 해약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현금을 받아가는 고객들이 있다. 이런 시나리오를 적어놓은 스크립트가 인터넷에 떠돌 정도이다. 초고속인터넷 가입자는 전체 시장의 90%, 무선통신은 가입자가 1백1%에 달할 정도로 이미 시장은 포화 상태에 달했다. 신규 고객 창출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서로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뺏고 빼앗기 경쟁을 거듭하면서 마케팅 비용에 거품이 끼는 악순환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향후 수익 사업인 무선인터넷 겨냥해 방통위의 ‘가이드라인’도 무시

이처럼 통신 3사가 초고속인터넷 가입자 유치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선인터넷 사용을 위한 접속 장치(AP)가 모두 유선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즉, 각 가정에 초고속인터넷을 많이 설치할수록 향후 수익 사업인 무선인터넷으로 사업을 확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구조이다.

통신 3사의 마케팅 전쟁은 죄수의 딜레마처럼 서로를 믿지 못해 그만둘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SK브로드밴드 노조는 방송통신위원회가 적극적으로 규제를 해 제동을 걸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방송통신위원회는 규제할 만한 법적 조항이 없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입장이다. 최영진 방송통신위원회 통신경쟁정책과장은 “규제할 수 있는 법적 조항이 없다. 휴대전화 단말기 보조금 지급을 규제하는 법이 과거에 있었지만, 이마저도 영업 활동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일몰되었다. 마케팅 비용을 규제한다는 것은 시장 논리에 맞지 않다”라고 답했다. 임시방편으로 방송통신위원회는 지난 5월, 마케팅 비용을 전체 매출의 22%를 넘기지 말자는 가이드라인을 발표했지만 강제성이 없어 실효성이 떨어진다. 통신 3사가 스스로 과도한 마케팅 비용을 줄이는 수밖에 없다. 

합병에 성공한 LG와 KT에서 이런 움직임이 조금씩 일어나고 있다. 상품별로 마케팅 비용을 지급하던 것을 통합 상품으로 묶어 마케팅 비용을 줄이는 대신 요금 할인 폭을 확대하고 있다.

올해 1월 합병한 LG텔레콤은 오는 7월 LGU+로 사명을 바꾸면서 ‘온 국민은 yo’ 요금제를 내놓았다. 이동전화와 초고속인터넷, 인터넷전화, IPTV 등 가구 내 모든 통신 요금을 묶은 가족통합 요금제로 요금 상한액보다 최대 두 배 가까이 통신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요금 상한액을 9만/12만/15만원으로 설정하면 16만/24만/30만원까지 이용할 수 있게 된다.

KT 역시 오는 7월부터 기본료 10만원으로 초고속인터넷과 유선전화, TV, 이동전화를 모두 이용할 수 있는 ‘쿡앤쇼 셋 퉁’ 결합 상품을 내놓을 예정이다. 최영진 방송통신위원회 통신경쟁정책과장은 “통신 3사는 획기적으로 요금 할인이 이루어지는 기술 또는 상품을 개발해 유·무선 통신 결합 시대에 대응해나가야 할 때이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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