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우리는 미래를 쏘았다
  • 김회권 기자·서호정 기자(스포탈코리아) ()
  • 승인 2010.06.29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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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국가대표팀 만세!’이다. 비록 우루과이에 2-1로 져 8강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대표팀은 정말 잘 싸웠다. 한국 축구가 어디까지 진화했는지를 세계에 제대로 보여주었다. 이른바 ‘뻥 축구’는 사라지고 ‘한국형 압박 축구’라는 전형을 창출했다. 남아공월드컵에서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한국은 앞으로 세계의 축구 강국으로 거듭날 것이다. <시사저널>은 한국팀의 원정 첫 16강 진출이라는 역사적인 쾌거를 계기로 한국 축구가 왜 강한지 심층 분석했다. 나ㅁ아공 현지에서 활약 중인 정해상 심판의 기고도 독점 게재했다. 더불어 FIFA와 돈, 월드컵에서 펼쳐지는 마케팅 전쟁 실상 등 월드컵과 관련한 대형 특집을 마련했다.

 

 

한국 축구를 날아오르게 한 추진체는 무엇일까. 월드컵에서 우리가 세계의 강호들과 대등한 플레이를 펼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일까.

“대패하지나 않을까 걱정된다.” 축구팬들은 걱정했다. 지난 3월3일, 우리보다 한 수 위로 여겨지던 코트디부아르와의 평가전을 앞두고 TV를 지켜보는 축구팬의 심정은 한결같았다. 드로그바(첼시)를 포함해 대다수 선수가 유럽에서 뛰고 있는 코트디부아르가 우리 골문 쪽을 향해 맹공을 펼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과 한 달 전인 2월10일, 중국에게 세 골이나 헌납한 수비진이 과연 코트디부아르의 막강 공격진을 상대로 버틸 수나 있을지 염려하는 것은 당연했다. 불안한 마음은 선수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라커룸을 빠져나와 경기장에 들어선 선수들의 초반 몸놀림은 어딘가 긴장되어 보였다. 하지만 평가전이 끝난 뒤 TV를 보는 시청자들은 우리 대표팀이 꽤 세다는 데 동의해야만 했다. 코트디부아르는 볼 점유율만 높았을 뿐, 이렇다 할 공격 찬스를 잡지 못했다. 한국 대표팀은 2-0의 완승을 거두었다. 더 놀랐던 것은 이른바 ‘해외파 효과’의 거대함이었다. 이 정도까지 비중이 클 줄은 몰랐던 것이다. 코트디부아르를 꽁꽁 묶기 위해서는 미드필더와 공격진의 수비 가담 능력, 특히 수비진과의 유기적인 호흡이 무엇보다 중요했는데 이날 미드필드 진영에 자리 잡은 박지성(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이청용(볼튼 원더러스), 기성용(셀틱)과 수비진에 새로 가세했던 이영표(알힐랄), 차두리(SC 프라이부르크)는 그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허정무 감독은 경기 후 가진 인터뷰에서 “11명이 경기장에서 함께한 경기였다. 수비는 어느 한 쪽이나 네 명만 하는 것이 아니다. 공격수와 미드필더들도 거리를 좁혀 공간을 주지 않은 것이 오늘 강한 모습을 보인 결과이다”라고 설명했다.

 

▲ 6월13일, 다른 선수들이 훈련하는 동안 허정무 감독과 박지성 선수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숙성된 해외파와 싹트는 해외파의 화학적 결합

코트디부아르전은 한국 축구를 날아오르게 한 추진체가 어디에 달렸는지 명확히 보여주는 한판이었다. ‘해외파’라는 추진체가 본격적으로 힘을 발휘하면서 한국 대표팀은 월드컵에서 날아올랐다.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의 동력은 이른바 ‘양박쌍용’으로 통칭되는 네 명의 핵심 선수 박지성·박주영·이청용·기성용이다. 이들은 이번 월드컵에서 모두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며 한국 축구의 진화를 상징했다. 이 중 박지성을 제외한 나머지 선수는 2002년 한·일월드컵 이후 등장한 새로운 유형의 축구 천재들이다. 2002년 4강 신화는 박지성·이영표·송종국·설기현 등 경쟁력 있는 선수들이 유럽으로 진출해 주전급 선수로 뛰는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해외 진출의 성과가 어느 정도 소득을 본 때가 원정 첫 승과 프랑스전 무승부라는 실적을 남긴 2006년 독일월드컵이었다. 그러나 원정 첫 16강 진출에는 실패하면서 그 성과는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반면,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서는 숙성된 선배들과 새로운 해외파 후배들이 화학적 결합을 이루어 냈고, 결국 사고를 쳤다.

이들 세 선수는 축구 IQ가 높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스피드나 체력, 기동력 같은 육체적 장점으로 세계와 승부하려 했던 선배들과 달리 공간 이해나 전술 소화 능력이 유럽 선수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는다. 퍼거슨 감독이 “공간 창출 능력이 뛰어나다”라고 칭찬한 박지성까지 포함하면 현 대표팀 공격진은 역대 대표팀 가운데 축구 IQ가 가장 높은 멤버로 구성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축구 지능이 높은 데에는 선천적인 재능도 중요하지만 일반적인 축구 선수와는 다른, 그들만의 독특한 성장 배경도 연관되어 있다. 박주영은 대구 청구고에 재학 중이던 2001년, 브라질의 지코 축구 학교로 1년간 유학을 다녀왔다. 선수로서 발전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시기에 자유롭게 브라질의 기술 축구를 배워 왔다. 기성용 역시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을 호주에서 보낸 유학파로, 그의 강력한 프리킥은 영국에서 건너온 현지 지도자들과 넓은 잔디구장에서 완성되었다.

이청용은 유학파는 아니지만 남들과 다르게 살았다. 15세의 나이에 학업을 그만두고 프로 무대에 뛰어들었다. 도봉중 3학년이던 이청용을 FC 서울로 입단시킨 사람은 조광래 현 경남 FC 감독이었다. 조감독은 “도봉중이 강팀은 아니었지만 이청용의 플레이가 유달리 눈에 띄었다. 수비수를 앞에 두고 펼치는 도전적인 드리블에 마음이 뺏겨 당장 프로 입단 계약을 맺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친구들이 고교 무대에서 경쟁하는 동안 이청용은 프로의 쟁쟁한 선배들과 부딪혔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세 선수는 청소년대표팀 시절부터 세계 무대에서 역량을 발휘해왔고 주목받았다. 박주영은 2005년 U-20월드컵에서 고질적인 팔꿈치 탈골 부상을 입은 상황에서도 나이지리아전에서 프리킥 골을 성공시키며 역전승을 이끌어내 국제축구연맹(FIFA)으로부터 큰 관심을 받았다. 이청용과 기성용은 2007년 U-20월드컵에서 16강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세련된 기술과 정확한 패스를 기반으로 한 경기를 펼쳐 유럽 스카우터들에게 눈도장을 받았다. 2008년 박주영이 프랑스로, 2009년 이청용이 잉글랜드로, 2010년 기성용이 스코틀랜드로 진출하며 이들은 차례로 유럽파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이들 신세대 해외파는 영민하다. 기성용은 무작정 앞으로 내지르지 않고 목표 지점을 설정해 공을 전방으로 배급한다. 빈 공간을 찾아 침투하던 이청용과 박지성 그리고 박주영은 유럽 혹은 아프리카 선수들과 볼 경합을 해 따내기도 하고 안정된 트래핑에 이은 몸놀림으로 상대 수비를 따돌린다. 지난 한국 원톱 축구의 역사는 지루하기 일쑤였지만, 이번 원톱 축구는 움직임부터 다르다. 활발한 스위칭과 공간 이용 그리고 창의적인 몸놀림이 이어졌다. 그래서 빠르고 역동적이다. 자신이 어디로 볼을 보내야 할지, 그리고 어디로 움직여야 할지 잘 안다.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를 전성기로 이끌었던 드라간 스토이코비치 감독(나고야 그램퍼스)은 “축구 지능이라는 것은 게임에서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한다. 일본 축구해설가 스기야마 시게키 씨는 “한국은 박지성이 공을 가지고 있을 때, 이청용·박주영·염기훈이 세 방향으로 패스 코스를 열고 있다. 한국의 공격 경로가 일본보다 많다”라고 설명한다. 우리 공격진의 축구 지능은 라이벌 일본으로부터 더 높게 평가받는다. 정효웅 MBC ESPN 해설위원 역시 우리 공격진의 ‘오프더볼(off the ball)’, 즉 공이 없을 때의 움직임을 높이 평가했다. “상대 수비의 예측을 뛰어넘는 행위, 상대 수비가 없는 공간을 찾아들어가는 행위가 뛰어나다”라는 것이다.

 

▲ 6월17일 아르헨티나전에서 리오넬 메시를 막기 위해 박지성·이청용·기성용 선수가 압박 수비를 펼치고 있다.

 

겁 없는 천재들 ‘축구판 G세대’가 달려나간다

개방적이면서도 체계적인 환경 속에서 성장한 축구 신세대는 이른바 ‘G세대’로 불리는 밴쿠버 동계올림픽의 주역들과 닮았다. 강한 자의식과 도전 정신, 그리고 위기조차도 즐길 줄 아는 유쾌한 면모가 뒤섞여 있다. 위계질서를 거부하는 이들은 때로는 선배, 심지어는 팬들과도 충돌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청용은 K리그에서 ‘그라운드의 악동’ 취급을 받기도 했다. 위험한 파울로 선배들과 수차례 부딪히며 건방지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기성용은 축구팬들이 대표팀 경기에서 부진했다며 자신을 비난하자 개인 홈페이지에 ‘그럼 니들이 뛰던가’라는 글을 올렸다가 큰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과거보다 좀 더 성숙해진 그들은 이제 솔직해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안다. 이청용은 아르헨티나전에서 1-4로 패한 뒤 “진작 공격적으로 나갔으면 좋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자칫하면 감독 전술에 대한 항명으로 오해를 받을 수도 있어 쉬쉬할 수도 있지만, 자신의 의견을 거침없이 내놓았다. 최근 기성용의 미니홈피에는 ‘즐겨라. 먼 훗날 이 시간은 소중한 추억이 될 테니’라는 문구가 올라와 있었다. 박주영은 그리스와의 1차전이 끝난 뒤 “그리스와의 경기는 평가전과 같은 기분으로 즐겼다”라고 말했다. 과거 월드컵 무대에 서면 긴장감에 다리를 떨었다는 선배들의 이야기는 이 겁 없는 천재들에게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1980년대 독일 분데스리가를 주름 잡았던 차범근 이후 걸출한 유럽파 선수를 배출하는 것은 남의 나라 일이었다. 2000년대 들어서야 우리는 비로소 기다리던 별을 만난다. 바로 박지성과 이영표로 대표되는 ‘장수’ 유럽파이다. 네덜란드를 거쳐 잉글랜드의 프리미어리그에 입성한 두 선수는 현재 대표팀 공격과 수비의 리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세계적인 명문 클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다섯 시즌을 보내며 아시아 선수 최초로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출전한 박지성은 후배들의 절대적인 우상이다. 박지성이 물꼬를 튼 뒤 늘어나고 있는 후배 유럽파들은 그의 성공 방식을 하나의 교본처럼 따르고 있다. 실제로 이청용은 볼턴 입성 초기에 박지성의 조언을 철저히 믿고 따랐다.

주장 박지성의 힘은 ‘존경’에서 비롯된다. 조용한 외유내강형 성격이라 애초부터 카리스마 넘치는 ‘홍명보형 주장’은 되지 못한다. 하지만 세계 최고 클럽의 일원으로 활약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선수들은 자연스럽게 그를 따르고 있다. 그것이 그라운드의 룰이다. 박지성의 행동과 원칙은 선수들에게 세계와의 격차를 좁힐 수 있는 글로벌 스탠다드로 통한다. 때문에 비판이나 호통이 없어도 박지성에게는 자연스럽게 권위가 실린다.

이들을 이끄는 허정무 감독의 리더십은 따뜻한 카리스마로 통한다. 이전의 한국인 감독들이 패배 후 다급해지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해 자중지란에 빠졌다면, 허정무 감독은 위기에서 선수들을 더욱 안고 가고 있다. 지난 2월 일본에서 열린 동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중국에 패하며 대대적인 비난을 받은 다음 날, 허정무 감독은 훈련을 취소하고 식사 자리에서 대표팀 스태프에게 피아노 연주를 들려줄 것을 부탁했다. 대표팀은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허정무 감독은 “피아노 선율 속에 어제 패배는 모두 잊자”라고 당부했을 뿐이다. 과거 ‘진돗개’로 불릴 만큼 정신력과 투지를 강조했지만 ‘50대의 허정무’는 패배 속에서 오히려 여유를 찾을 줄 아는 지도자가 되었다. 결국, 한국은 사흘 뒤 치른 한·일전에서 3-1 완승을 거두며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월드컵 본선을 앞두고 실시한 벨라루스와의 평가전에서 0-1로 패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허감독은 선수들을 책망하기보다는 격려하고 나섰다. 다음 날 훈련 일정을 취소하고 선수들에게 인근의 빙하 지대로 나가 바람을 쐬고 올 것을 지시했다. 언론과 팬들의 눈이 무서워 호텔 안에 박혀 있거나 무리하게 훈련을 실시하던 옛 지도자들의 구태는 이제 더 이상 한국 대표팀에서 찾아볼 수 없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최근 허감독의 리더십으로 말해지고 있는 ‘소통’이다. 선수들과의 격의 없는 대화만이 소통이 아니다. 정효웅 해설위원은 “주장 박지성에게 선수단 관리에 관한 상당 부분의 권한을 맡겼다. 대신 자신은 박지성과 밀착하며 선수단과 호흡했는데, 이것이 대표팀을 열린 분위기로 만들었다”라고 설명했다. 선수들이 서로 활발히 이야기하고 해외파와 국내파 간 마찰 없이 사이좋은 분위기를 가져갈 수 있었던 데는 ‘권력을 분산시킨’ 허감독의 결정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선수단과 마찰을 일으켜 대표팀 경기력을 저하시켰던 여러 축구 선진국의 감독들보다 허감독이 커 보이는 이유이다.

▲ 6월12일 서울 어린이대공원에서 열린 유소년 미니 축구 경기에서 어린이들이 열띤 수중전을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과거에도 천재형 선수는 있었다. ‘앙팡 테리블’로 불리던 고종수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지금의 천재들은 과거 ‘어쩌다 한 번씩 하늘이 내려주던 천재’들과는 태어난 환경이 다르다. 잘 갖추어진 환경과 정돈된 유소년 체계 그리고 선진 교육을 받은 지도자 아래에서 꾸준히 탄생했기 때문이다. 2002년 4강 신화가 남긴 유산 덕분이다. 아마추어 팀의 경우 한·일월드컵 이전만 해도 각 대회 결승전이 아니고서는 잔디구장에서 공을 차는 것은 생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선수를 관리하고 육성할 유소년 체계조차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한 번 부상을 당하면 은퇴할 때까지 고질병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이전의 천재형 선수들이 우울한 선수 생활을 보내며 ‘비운의 스타’로 떠나야 했던 이유이다.

대한축구협회는 2002년 월드컵 이후 발생한 잉여금을 ‘풀뿌리 축구’에 집중 투자했다. 전국에 크고 작은 규모의 축구센터를 건립했고, 전국을 다섯 개 권역으로 나누어 연령별 상비군을 운영했다. 지도자들의 능력을 키우기 위해 라이선스 제도를 실시해 교육 방식과 기준도 통일시켰다. K리그 각 팀들에게는 2009년을 기점으로 초·중·고 팀을 확보할 것을 의무화시켰다. 이전에 차범근·이회택·최순호 등 스타플레이어들이 자신의 이름을 내걸며 산발적으로 운영하던 유소년 교육은 대한축구협회의 지도·관리 아래 점점 체계화되었다.

조영증 대한축구협회 기술국장은 한·일월드컵의 유산이 발휘하는 힘에 대해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조국장은 “체계를 정비해 현재 각 연령별로 해마다 2백여 명의 유망주가 길러지고 있다. 유럽의 수준 높은 지도자를 초빙해 유소년 단계에서부터 지도자들의 역량을 강화했다. 이같은 방식이 5년 정도 더 유지되면 한국 축구는 더욱 강해질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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