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 그득한 냇가에 ‘흰 부처’가 가부좌 튼 까닭은
  • 글·사진 이순우 |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
  • 승인 2010.07.06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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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홍지문 아래 옥천암 마애좌상과 홍제천에 얽힌 이야기

 

▲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에 위치한 옥천암. ‘보도각 백불’로 더 많이 불리는 ‘마애좌상’의 모습이 보인다.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태조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이 유교의 나라라는 것은 서울 도성 4대문의 이름에 유교 사상의 네 가지 덕목인 인의예지(仁義禮智)를 한 글자씩 나누어 붙인 데서 잘 드러난다. 동쪽을 ‘흥인문’이라 부르고, 서쪽을 ‘돈의문’이라 하며, 남쪽이 ‘숭례문’이라는 명칭을 갖게 된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다.

다만, 북쪽은 예외적으로 ‘숙청문’이라고 정했다가 나중에 이것조차 ‘숙정문’으로 이름을 고쳤다. 이때에 사용이 유보된 나머지 한 글자는 조선 숙종 시절에 와서야 서울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탕춘대성을 쌓으면서 새로 지은 대문에 ‘홍지문(弘智門)’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으로 비로소 자리매김이 완료되었다.

흔히 ‘한북문(漢北門)’이라고도 불렀던 홍지문은 바로 위쪽에 경관이 좋다는 소문이 자자했던 세검정이 자리한 탓에 비교적 서울 장안의 한량이나 풍류객들이 즐겨 찾는 공간이었다. 또한, 이곳은 자하문을 벗어나면 곧장 닿을 수 있는 거리인 데다 여름철 피서지로도 잘 알려진 북한산성으로 올라가는 길목이었으므로 서울 주변의 여느 장소보다도 사람들의 발길이 분주히 닿는 곳이었다. 근대 개화기 우리나라를 찾아온 서양인들의 체류기나 여행기에 이 홍지문 지역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이를테면 이 주변은 필수 탐방 코스의 하나쯤으로 간주되었는데, 이 때문인지 이들이 채록한 사진 자료도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 있는 편이다.

특히 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관광 명소는 홍지문 바로 아래쪽에 해당하는 보도각 백불(普渡閣 白佛)이었다. 홍제천의 물길 바로 옆에 자리한 큰 바위 면에 관음보살을 새기고 여기에 하얀 호분(胡粉)을 칠한 모습을 지녔다 하여 그러한 이름을 갖게 되었다.

지금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곳의 정식 명칭이 얼마 전에 ‘옥천암 마애좌상(玉泉庵 磨崖坐像)’으로 바뀌었지만, 많은 사람에게는 여전히 ‘보도각 백불’이라는 명칭이 더 익숙하다. 근대 시기의 서양인들에게 통용되던 이름도 글자 그대로 ‘흰 부처(The White Buddha)’였다.

이곳의 풍경이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는 1901년 봄에 우리나라를 찾은 미국의 저명한 사진여행가 엘리아스 버튼 홈즈의 글에서도 잘 나타난다. “한국의 여러 곳을 광범위하게 여행했던 사람들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풍경이나 마을들은 어디나 별 차이가 없으며, 서울에 가까운 변두리 지역은 앞으로 긴 여행을 하는 도중에 보게 될 모든 것의 표본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외딴 산속에 있는 불교 사찰들만은 순례의 가치가 꽤나 있다는 사실에는 모두가 동의했다. 그리고 백불의 형체 앞에 발길을 멈추었을 때 우리는 이 말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그것은 수도 주변에서 가장 진귀한 구경거리였다.”

 

▲ 1910년 11월호에 실린 당시의 현장.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못된 시어머니에게 쫓겨난 못생긴 부인의 슬픈 전설

그리고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가 간행하던 월간지 <더 코리아 리뷰> 1902년 2월호에는 흥미롭게도 ‘백불’의 탄생에 얽힌 전설이 다소 길게 채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조선 명종 때의 사람 ‘김수동’과 중매로 맺어진 ‘해수’라는 이름의 새색시 그리고 시어머니 사이의 갈등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

그의 아주 ‘못생긴’ 부인은 ‘못된’ 시어머니의 구박을 받아 쫓겨나고 결국 굶어죽기에 이르렀는데,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화병을 식혀줄 수 있도록 물이 흐르는 냇가에 시신을 묻어주기를 바랐고, 끝내 혼령의 소원을 받아들여 그녀를 바위 아래 강바닥에 묻어주었다는 것이다. 이때 김수동은 그 바위에 자기 아내의 모습을 새겨 넣었고, 사람들은 이것을 가리켜 해수관음의 형상이라 불러 신성한 장소로 여기기 시작했다.

헐버트는 이 얘기의 말미에 제 아무리 개울의 물이 넘쳐나도 결코 이 형상을 적시는 법이 없이 다만 소용돌이처럼 그 앞을 감아돌며 흘러갈 뿐이라고 적고 있다. 이 얘기는 다른 서양인들의 저작물에 거듭 인용되면서 널리 퍼져나가, 서울을 찾는 외국인 탐방객들로 하여금 백불을 한층 더 신비로운 존재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조선 성종 때의 문헌 자료인 <용재총화>에는 이미 ‘불암(佛巖)’이라는 이름으로 이곳의 존재가 뚜렷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김수동에 얽힌 얘기는 사실 관계와는 전혀 무관하게 만들어진 민간 설화의 일종이라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고종이 즉위한 이후에 이곳에는 보호 전각이 새로 만들어졌으며, 여기에 붙여진 ‘보도각’이라는 편액의 글씨는 흥선대원군의 것이라고 전해진다. 백불이 새겨진 바위 면에는 ‘황제폐하성수만세(皇帝陛下聖壽萬歲)’라는 전패 형태의 축원문도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근대 시기 이후 서양인들이 남겨놓은 여러 장의 사진 자료를 살펴보면, 보도각 주변의 지형이 지금과는 현저히 다르다는 사실이 퍼뜩 눈에 띈다. 하천의 바닥 면은 보호각의 주춧돌이 놓인 높이만큼 모래와 자갈이 그득하게 쌓여 있는가 하면, 그 앞으로는 인력거가 다니는 광경이 보일 정도로 평평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폭우가 쏟아질 때마다 북한산 계곡에서 토사가 쉴새없이 밀려드는 탓에 이러한 풍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하기야 이곳 하천의 이름이 달리 ‘모래내(沙川)’였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고작 100년의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이러한 풍경은 더 이상 찾을 수가 없다. 모래가 그득했던 하천 바닥은 자갈은커녕 제법 큼직한 바윗덩어리조차 거의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말끔해진 상태이다. 모래가 사라진 공간에는 땅속 깊이 바위 면이 그대로 드러나 있고, 그만큼 물길은 패여 사람 키 높이 이상으로 내려가 있다. 더구나 보호각 앞으로는 전에 없던 블록 담벼락이 막아서고 있어 수려한 백불의 형상을 제대로 감상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고 말았다.

▲ 1910년 무렵의 ‘보도각 백불’. ‘황제폐하성수만세’라고 쓴 축원문이 보인다.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예전의 사진 자료들을 죽 훑어보았더니 대략 해방을 전후한 시기부터 이러한 지형의 변화가 가속화한 것으로 확인된다. 일제 강점기 이후 지속된 사방 공사와 식목 사업의 결과로 주변 산악 지역에 숲이 우거지고, 서울 변두리로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산비탈의 경사면에까지 집들이 들어차면서 상류 쪽에서 유입되는 토사량이 크게 줄어든 것이 그 원인이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반면에 보도각 앞 하천에 수백 년간 쌓여 있던 모래층은 큰물이 질 때마다 계속 유실되는 바람에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계속 바닥 면을 드러내게 되었던 것이다.

큰비가 내릴 때면 상류에서 떠내려온 모래 더미가 새로 쌓이고 이를 주기적으로 치워내는 문제가 불거지는 것은 서울 주변 하천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서울 시내를 관통해 흐르는 청계천의 경우도 이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환경의 변화에 따라 상류로부터 토사의 유입이 거의 끊긴 것은 청계천이나 홍제천이나 모두 마찬가지인 상태이다.

듣자 하니 청계천이 복원 공사를 한 이후 인공 하천의 형식을 따라 운영하는 것처럼 홍제천에서도 2008년 6월 이후 양수식 방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모래내의 징검다리를 건너 보도각 백불의 모습을 감상하고 해수부인의 전설을 음미하는 일은 이제 옛 사진 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풍경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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