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투로 얼룩지는 ‘태권도 성지’
  • 안성모 (asm@sisapress.com)
  • 승인 2010.07.06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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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원, 새 이사회 구성에 친 정권 인사들 개입 의혹…2년 전 태권도진흥법 발효 후 내부 갈등 심화

“정권의 꼭두각시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태권도계 한 인사가 새로 출범한 국기원을 두고 한 말이다. 이사회와 임원 구성 과정에 현 정권 인사들이 개입한 의혹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각본에 따라 인사가 진행된 국기원에 태권도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 이사회를 즉각 해체하고, 참신하고 존경받는 인물들로 새롭게 구성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 서울 강남에 위치한 국기원의 입구. ⓒ시사저널 박은숙

국기원은 지난 5월28일 법정법인으로 전환했다. 재단법인에서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화부) 산하 특수법인으로 바뀐 것이다. 당초 우려했던 신·구 법인 간의 무력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6월4일 열린 첫 이사회에서는 강원식 대한태권도협회 사료편찬위원장을 새 원장으로 선임했다. 행정 수장인 원장을 이사들이 만장일치로 재청하면서 특수법인 국기원의 첫 항해는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지난 2008년 6월 법정법인 전환의 기반이 된 태권도진흥법이 발효된 이후 2년 동안 보여준 문화부와의 극한 대립과 태권도계 내부 갈등은 향후 국기원의 앞날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국기원은 1972년 설립되었다. 이후 태권도를 범국민적인 운동으로 확산시키는 한편, 한국의 문화유산인 태권도를 전세계에 알리는 데 앞장섰다. 현재 1백92개국에서 7천5백여 만명이 태권도를 수련하고 있으며, 이들에게 국기원은 성지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이처럼 외형적인 성장을 이루는 동안 국기원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내부 갈등도 갈수록 골이 깊어졌다.

지난 2008년 6월 태권도계 원로인 엄운규 원장이 사표를 제출하면서 갈등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당시 엄원장은 서울시태권도협회(이하 서울협회)로부터 국기원 부지의 사용 문제 등을 놓고 공격을 받는 상황이었다. 엄원장이 자리를 떠난 이후 국기원은 이승완 당시 이사가 사실상 주도권을 잡았다.

양측은 국기원 운영의 틀인 정관 개정을 놓고 대립했다. 문화부의 안을 최대한 받아들이려는 엄원장측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이이사측이 맞선 것이다. 이듬해인 2009년 1월19일에는 이른바 ‘국기원 1·19 사태’가 발생했다. 국기원 임직원들이 엄원장의 복귀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가지려고 하자 서울협회 관계자들이 이를 물리력으로 저지하고 나선 것이다. 이들은 고성과 멱살잡이를 주고받으며 몸싸움까지 벌이는 추태를 보였다.

그해 3월 국기원 정기이사회는 ‘국기원 정상화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에 이승완 이사를 임명했다. 이이사는 위원장으로서 국기원 문제를 해결하는 데 발 벗고 나섰다. 하지만 출발부터 삐걱거렸다. 문화부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소문과 함께 13명의 이사가 동시에 사표를 제출한 것이다. 이후 별도의 이사회가 개최되는 등 국기원은 세력이 양분되어 파행을 거듭했다.

우여곡절 끝에 10월23일 열린 이사회에서 이승완 이사가 이사장과 원장 직무 대행으로 선출되었다. 국기원과 문화부는 협상을 통해 합의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불신의 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문화부는 11월4일 보도 자료를 통해 “국기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태권도진흥법 개정을 검토하기로 했다”라고 밝혔다.

 

▲ 지난해 6월 강원식 국기원 원장 등이 참석한 ‘정치인 국기원 장악 음모 저지’ 기자회견. ⓒ연합뉴스

임원 자격 요건 놓고 문화부와 첨예한 대립

쟁점은 국기원 임원의 자격 요건이었다. 문화부는 “파행의 원인은, 국기원을 사실상 장악하고 있는 현행 이사진들이 법정법인으로서 최소한의 공공성을 담보하기 위해 일반 법정법인들이 채택하고 있는 ‘임원에 대한 결격 사유 조항’을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시각은 유인촌 문화부장관이 올해 2월18일 태권도 관장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잘 드러난다. 유장관은 국기원의 정관이 승인받지 못한 이유에 대해 “국기원 임원 임용 시 국가공무원법상 결격 사유를 규정하라는 문화부의 요청 사항을 국기원이 거부했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유장관은 “국기원이 전과자들이나 이에 준하는 사람들에 의해 운영된다면 전세계 태권도인들이 우리 국기원을 어떻게 보겠나”라고 반문했다.

문화부의 이런 움직임은 이승완 전 원장을 겨냥한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이 전 원장은 한국 최초의 태권도 국가대표 선수이며, 해병대 태권도부 창설의 주역이다. 하지만 그의 이름 뒤에는 ‘조폭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이 전 원장은 1987년 4월23일 통일민주당 창당 과정에서 1백50여 명의 폭력배들이 난입해 폭행과 함께 행사를 방해한 이른바 ‘용팔이 사건’의 배후로 알려져 있다. 당시 그는 호국청년단의 총재를 맡고 있었다.

이 전 원장의 한 측근 인사는 “태권도의 미래를 위해 열정을 가지고 국기원을 운영하고 싶지만 공무원법 적용에서 문제가 된다면 물러나겠다고 했다. 이 전 원장은 훌륭한 태권도인이 국기원을 자율적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라고 밝혔다.

이 전 원장은 문화부와의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 외부의 힘을 빌리기도 했다. 1972년 국기원 창설 때부터 2004년까지 32년간 국기원 원장과 이사장을 지낸 김운용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을 명예이사장으로 추대하는 한편, 국회의원 3선을 지낸 박창달 자유총연맹 총재를 이사장으로 영입했다. 경북 포항 출신인 박총재는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 특보단장과 2008년 제17대 대통령 취임준비위원회 상임 자문위원을 지낸 대표적인 ‘MB맨’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박총재는 이사장으로 취임한 지 50여 일 만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국기원과 문화부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양측의 불신의 골이 너무 깊어 타협점을 찾기 힘들었다는 것이 박총재측의 설명이다. 이 전 원장으로서는 회심의 카드마저 수포로 돌아간 셈이다. 결국, 지난 3월 태권도진흥법은 개정되었고, 이 전 원장은 6월10일 태권도인들에게 공개 편지를 보낸 후 국기원 수장에서 공식적으로 물러났다. 현재 이 전 원장은 개정 법안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과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해놓은 상태이다. 헌재의 결정에 따라 상황이 바뀔 수는 있지만, 그러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는 만큼 이 전 원장이 국기원에 재입성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 국민체육진흥공단 이사장 시절 국정감사에 참석한 김주훈 국기원 이사장(오른쪽). ⓒ시사저널 임영무

국기원 관련 괴문서 나돌기도

숨 가쁘게 진행된 일련의 사태가 마무리되면서 국기원은 본래의 모습을 찾아갈 수 있을 듯이 보였다. 하지만 갈등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이승완 체제에 반발하며 특수법인화에 찬성한 태권도계 내에서도 ‘국기원이 정치권력에 휘둘릴 수 있다’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번 첫 이사회 구성에서부터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김주훈 이사장은 ‘낙하산 인사’라는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조선대 총장 출신인 김이사장은 지난 대선에서 한나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과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정책자문위원을 지냈다. 특히 국기원 이사장에 취임하기 직전까지 국민체육진흥공단 이사장을 지내면서 경영 평가에서 2년 연속 경고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되고 있다. 이만재 이사도 최근까지 체육진흥공단 상임감사로 있었다. 16대 국회의원을 지낸 그는 서울시체육회 사무처장과 상임부회장 등을 지내면서 이대통령과 친분을 쌓아왔다. 특수부대 출신으로 군 인맥이 두텁다는 오현득 이사는 한국자유총연맹 연수원장을 지냈다. 두 이사 모두 지난 대선에서 이대통령의 당선을 도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옛 국기원에서 성추행 의혹 등으로 물의를 빚은 적이 있는 인사들이 이사로 선임되었다는 지적도 뒤따른다.

이러한 인선 결과가 미리 준비된 각본에 따라 진행되었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법정법인으로 전환되기 이전부터 태권도인들 사이에 국기원과 관련한 괴문서가 나돌았다는 것이다. 이 문서는 ‘법정법인 국기원 설립위원회’ 명단인데, 여기에 이름이 오른 인사들이 실제로 위원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태권도계의 한 인사는 “당시 한 오피스텔에서 국기원 인수위원회가 구성되었다는 이야기까지 있었다”라고 전했다. 이번 이사 임명 과정에 정권 핵심부가 개입했다는 의혹도 나왔다. 문화부장관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이사장이 원장 선임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 결국 정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한계도 문제로 거론된다. 김덕근 바른태권도시민연합회 대표는 “정치권의 개입을 막을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국기원측은 이러한 지적에 대해 “변화하는 과정에서 이해관계를 달리할 수 있지만, 반대보다는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는 입장이다. 국기원은 현재 발전전략위원회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해 구조 개혁과 정책 개발 등을 논의하고 있다. 김주훈 이사장 선임과 관련해서는 김이사장이 태권도인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국기원 관계자는 “태권도인을 이사장 자리에 앉힌 것은 정부에서도 그만큼 신경을 썼다고 생각한다. 김이사장 정도의 역량을 가진 태권도인을 찾기는 쉽지 않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정권이 인사에 개입했다는 의혹에 대해 “근거 없는 이야기일 뿐이다”라고 일축했다. 현 정권과 가까운 인사들이 이사로 선임된 것과 관련해서는 “정권과 가까우면 그만큼 역할이 있을 것이다. 우려도 있겠지만 기대도 크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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