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영욕과 함께 뜨고 진 ‘관우’
  • 이순우 |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
  • 승인 2010.07.20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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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묘의 역사를 통해 본 관왕묘의 전성시대와 국권 피탈의 흔적

서울 동대문을 벗어나 신설동 쪽으로 나아가면 이내 길 오른편에 ‘동묘’(보물 제142호)가 나타난다. 동묘는 삼국지의 영웅 관우(關羽)를 모시는 사당으로 흔히 관묘(關廟), 관성묘(關聖廟), 현성묘(顯聖廟), 관제묘(關帝廟) 등으로 부르며, 문묘(文廟)에 대칭된다는 뜻으로 무묘(武廟)라는 이름도 갖고 있다.

 

▲ 두 개의 현판이 나란히 달려있는 동묘 정전. 작은 사진은 1900년 무렵의 동묘 전경.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이곳의 건물을 살펴보니 가로 배치에만 익숙한 우리들에게는 많이 낯설게 여겨질 만큼 세로 방향으로 더 길쭉하게 생겼다. 마치 건물 옆구리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드는 이곳은 뒤쪽으로 삼면이 온통 벽돌 벽으로 둘러싸인 모양이 영락없는 중국풍(中國風)이다.

그런데 이곳을 들를 때마다 자꾸 궁금증을 솟아나게 하는 것이 하나 있으니, 동묘 정전 앞에 달아놓은 편액이 둘이나 된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현판의 길이만 약간 다를 뿐 ‘顯靈昭德義烈武安聖帝廟(현령소덕의열무안성제묘)’라고 하는 글자와 글씨체라든지 모든 것이 똑같다.

현판의 한쪽에 적혀 있는 작은 글씨를 보니까, 이는 고종 황제가 관왕(關王)을 관제(關帝)로 추숭하면서 친히 글씨를 내려 고쳐 달게 했던 것이고, 그때가 광무임인맹춘(光武壬寅孟春)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이 편액은 과연 처음부터 두 개였던 것일까?

돌이켜보면 조선 땅에 관왕묘, 즉 관우의 사당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선조 31년(1598년)의 일이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군 진인(陳寅)이 울산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후 서울 남대문 밖에 거처를 정하고 요양을 하면서 이곳 후원에 사당을 설치한 것이 그 기원이었다. 이것이 남관왕묘(南關王廟)이며, 줄여서 ‘남묘(南廟)’라고 불렀다.

그리고 다시 동대문 밖에 ‘동묘’가 들어선 것은 그 이듬해의 일이며, 공사가 완공된 것은 선조 34년(1601년)이었다. 이 당시 두 번째 관왕묘를 세우기로 작정했던 명나라측에서 애당초 남대문 밖을 건립 위치로 지정했다는데, 선조 임금은 이에 맞서 동대문 밖에 관왕묘를 세우도록 여러 번 교섭했다고 알려진다. 구태여 이곳을 고집한 것은 남대문 밖에 이미 남묘가 있으니 한 곳에다 중복되게 관왕묘를 세우는 것은 불가한 일이며, 이와는 별도로 서울의 지세로 보아 동쪽이 허하다 하여 이를 보완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 그 이유였다.

이 땅에 느닷없이, 그것도 한꺼번에 둘씩이나 ‘관왕묘’가 들어선 것은 요컨대 임진왜란의 와중에 대국(大國)의 원조와 군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조선의 처지가 빚어낸 반대급부이자 부산물이었다. 하지만 참으로 묘한 것은 한번 그렇게 관왕묘가 자리를 잡게 되자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관왕’의 위상은 서서히, 그리고 아주 굳건히 조선 땅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1691년에 능행(陵幸)을 하고 돌아오던 숙종 임금이 몸소 이곳을 들른 것은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 이것이 선례가 된 이래로 그 이후 국왕이 모두 기회가 닿을 때마다 동묘를 찾게 되었고, 자연스레 이곳은 나라의 지극한 보살핌을 받는 장소로 탈바꿈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언제부터인가 숱한 백성들에게 관왕은 ‘신통방통’하고 ‘영험’한 존재로 통했다. 민간에서는 곧잘 ‘재앙을 막아주고 복을 비는’ 대상으로 섬김을 받았고, 무당이나 점바치가 사는 공간마다 어김없이 관우의 형상이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으로 풀이된다.

 

▲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전시 구역에 옮겨져 있는 북묘비(왼쪽). 오른쪽은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위치한 동묘의 내부.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장훈

 

무녀 주청에 북묘·서묘까지 건립…1908년 칙령 내려 ‘구조조정’

어쨌거나 관왕을 추앙하는 일은 근대 시기 고종의 치세에 이르러 정점을 이루게 된다. 바야흐로 관왕묘의 전성시대가 열린 것이다. 남쪽과 동쪽에 있는 두 개의 관왕묘도 모자라 임오군란 이듬해인 고종 20년(1883년)이 되자 혜화문 근처 명륜동에 북묘(北廟)가 먼저 들어섰다. 잇달아 광무 6년(1902년)에는 새문 밖 천연동에 숭의묘(崇義廟), 즉 서묘(西廟)가 세워짐에 따라 관왕묘가 서울 주변을 동서남북으로 하나씩 에워싼 꼴이 되었다.

여기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북묘나 서묘가 창설된 것은 모두 왕실과 무녀가 얽힌 결과물이었다는 사실이다. 가령 북묘는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신한 민왕후(閔王后)에게 환궁 시기를 예언해주었다는 이른바 ‘진령군 대감(眞靈君 大監)’이라는 이성녀(李姓女)가 주청해 만든 것이라 했고, 서묘는 엄비(嚴妃)의 신임을 얻은 현령군(賢靈君)이라는 무녀 윤성녀(尹姓女)가 주청해 세운 것이라 전한다. 특히 북묘는 1884년에 벌어진 ‘갑신정변’의 현장이라는 데에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고종 임금이 정변을 맞아 피신한 장소가 바로 ‘북묘’였고, 1887년에는 이곳에서 겪은 일을 담아 손수 비문을 짓고 민영환에게 글씨를 쓰게 하여 ‘북묘비(北廟碑)’를 세우기까지 했다.

그리고 마침내 관왕묘의 위상에 큰 변화가 생겨난 것은 1902년 1월의 일이었다. 대한제국의 황제는 일찍이 북묘에서 겪은 일을 잊지 못했음인지 마침내 관왕을 높여 황제로 삼고 그 칭호를 ‘현령소덕의열무안관제’로 정했다. 그러니까 1598년에 처음 이 땅에 ‘관왕묘’로 뿌리를 내렸고 다시 3백년이 흘러 동방의 조선에서 그렇게 ‘황제’가 된 이, 그가 바로 중국 후한의 장수 관우였다. 하지만 세상은 이미 국권 피탈의 시기로 접어들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시절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국력이 쇠진하고 나라를 제대로 꾸려나갈 수 없는 형편이 된 마당에 때마다 사당에 제사를 올린다는 것은 너무도 벅찬 일이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이름하여 ‘칙령 제50호 향사이정(享祀釐整)에 관한 건’이었다. 1908년 7월23일에 공포된 이 칙령의 취지는 재정에 부담이 되는 제사의 횟수를 크게 줄이고, 사당은 중요한 것만 남기고 합쳐서 정리한다는 내용이었다. 흔히 육궁(六宮)으로 부르던 후궁들의 사당이 한곳에 모인 것도, 선농단과 선잠단이 사직단에 합쳐진 것도, 역대 어진을 모신 전각들이 선원전만 남기고 사라진 것도 모두 이때에 벌어진 일이었다.

당연히 네 곳이나 되던 관왕묘에 대한 정리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이로써 동서남북에 포진한 모든 ‘관제묘’에 대한 제사는 한꺼번에 폐지되었고, 소유권도 국유로 편입되거나 지방 관청에 넘겨지는 조치가 이어졌던 것이다. 이에 따라 서묘가 1909년 4월에 먼저 동묘에 합사(合祀)되었고, 북묘는 1910년 5월에 훼철되어 관련 비품 일체가 동묘로 옮겨지는 과정을 겪었다. 다만, 남묘의 경우에는 ‘남묘유지사(南廟維持社)’라는 민간 단체에 불하되어 그 존재가 계속 보존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짐작컨대 북묘의 정리와 더불어 그곳에 있던 ‘관제묘’의 현판 역시 동묘 쪽으로 따라왔을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동묘 정전에 똑같은 현판이 둘씩이나 달려 있는 연유는 바로 여기에 해답이 있다. 바꾸어 말하면 지금 동묘 정전에 매달린 두 개의 현판은 관왕묘의 전성시대와 대한제국의 멸망이 남긴 얄궂은 징표의 하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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