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국노’들 위해 훈장 잔치 벌이다
  • 이순우 |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
  • 승인 2010.08.03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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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보’에서 드러난 대한제국 마지막 한 달간의 어처구니없는 풍경

지금부터 딱 100년 전인 1910년 7월23일은 이른바 ‘한국병합조약’의 원흉인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통감이 서울에 당도한 날이다. 일본 군함 야쿠모(八雲)를 타고 인천항에 들어와 다시 특별 열차편으로 상경하는 동안 엄격히 통제된 환영 인파가 그를 맞이했다. 남대문정거장에서 발사된 아홉 발의 예포를 통해 그가 도착했다는 소식은 저절로 서울 장안으로 퍼져나갔다.

전임 소네 아라스케 통감에 이어 그가 새로운 한국 통감으로 임명된 때가 그해 5월30일이었으니 그의 부임은 무려 50여 일이나 지체된 셈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식으로 부임하기도 전에 ‘경찰 사무 위탁에 관한 각서’의 체결을 강요해 한국의 경찰권 전부를 빼앗았고, 이에 따라 경무총감부가 새로 설치되면서 진작에 헌병 경찰에 의한 무단 통치의 서막을 알렸다.

테라우치 통감의 서울 도착은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일을 그야말로 시간문제로 만들어놓았다. 그는 한국 병합에서 대표적인 강경론자의 한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통감이기에 앞서 일본 제국의 무력을 통제하는 육군대신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가 부임하고 나서 불과 한 달 여 동안에 강제 병합을 체결하고 그 처리 절차가 종결된 사실로도 이러한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 가슴에 훈장을 단 대한제국 시절 친일 대신들.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금척대수장을 수여받았던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이다. ⓒ이순우 |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그렇다면 1910년 8월22일의 병합조약 체결을 거쳐 경술국치에 이르는 순간까지 대한제국의 마지막 나날들은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이 점에서 개략적인 흐름을 살펴보는 데에 편리한 자료가 바로 ‘관보(官報)’이다. 그 시절 대한제국 정부에 의해 공식 발간되던 이 자료에는 당시의 정치 상황을 반영한 황제의 동태라든가 법률고시 그리고 관직 임명과 서훈 사항과 같은 내역들이 두루 기록되어 있으므로 많은 참고가 된다.

이 가운데 우선 특징적으로 포착되는 서술 내용은 시호(諡號)에 관한 것들이다. 1910년 6월30일자로 개화파 정치가인 김홍집·홍영식·김옥균·어윤중 등에게 한꺼번에 시호가 내려진 것을 계기로 다수의 문무관에게 그 혜택이 확대되었으며, 특히 경술국치일에 가까울수록 이 일은 서둘러 추진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가령 실학자 정약용·박지원에게는 똑같이 ‘문도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병조판서를 지낸 남이 장군에게 ‘충무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진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이것 말고도 또 하나 주목되는 사실은 ‘흥친왕(興親王)’의 책봉과 관련된 대목이다. 1910년 8월16일자 관보에는 고종 황제의 형님이 되는 완흥군 이재면(完興君 李載冕)을 흥친왕으로 삼는다는 조칙이 수록되어 있다. 이날은 테라우치 통감과 이완용 내각 총리대신 사이에 병합조약에 관한 밀담의 결과 조약안이 구체화한 날로 알려져 있다. 하필이면 바로 그러한 날에 서둘러 흥친왕의 책봉에 관한 조칙이 내려진 것이다.

더구나 흥친왕의 책봉 의식은 당초 9월3일로 정해졌다는 궁내부 고시가 수록되기도 했으나 그 사이에 병합조약이 체결되면서 이 날짜가 부랴부랴 조약 발표 직전일인 8월28일로 앞당겨지는 소동이 벌어졌다. 황성신문 1910년 8월30일자에는 “흥왕 전하는 재작일 책봉식을 행한 후 기녀와 창부를 불러모아 술과 고기로 밤새도록 연회하였더라”라는 내용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큰 광영일지 몰라도 경술국치 당일까지 술판을 벌였다는 것은 결코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 (왼쪽)1910년 7월23일 테라우치 통감의 서울 부임 광경. 마차를 타고 주자동 골목을 지나 통감 관저로 들어가는 중이다. 저 뒤로 보이는 종탑은 명동성당이다. (오른쪽)인사동길 초입에 설치되어 있는 ‘충훈부 터’ 표석. 이곳은 곧 ‘표훈원’ 자리(관훈동 118번지 일대)로 대한제국의 패망 직전 무더기 훈장 잔치가 벌어진 현장이기도 하다.

‘병합조약’ 공표일 며칠 앞둔 시점에 무더기로 훈장 지급해

한편, 경술년 그해의 관보에 드러난 대한제국 마지막 한 달의 풍경 가운데 가장 가관인 것은 아마도 ‘훈장 수여’와 관련된 대목이 아닌가 싶다. 원래 근대적인 훈장 제도의 도입은 1899년에 표훈원(表勳院)이 설립된 데서 본격적으로 비롯되었다. 이때에 제정된 훈장의 종류로는 금척대훈장·서성대훈장·이화대훈장·태극장·팔괘장·자응장 등이 있었으며, 1907년에는 황후가 내명부와 외명부에 수여하는 서봉훈장이 추가되었다.

하지만 훈장이라는 것은 공을 세우거나 모범이 되는 사람들에게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주는 것이 원칙일 텐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를 못했던 모양이다. 일찍이 황현 선생은 <매천야록>을 통해 훈장 지급의 난맥상을 이렇게 꼬집기도 했다. “훈장은 서양에서 시작된 것으로 혹은 군주끼리 서로 주고받거나 신하에게 특별한 공로가 있을 경우 하사한다. 임금은 외국을 흠모하여 표훈원을 설치하고 훈장의 격식도 정하였는데, 세상에서 매국자라고 불리는 자들이 모두 훈장을 받았으며 1년 뒤에는 병졸과 하인들조차 훈장을 달지 않은 자가 없어 훈장을 단 자들이 서로 바라보며 웃을 지경이었다. 간혹 훈장을 외국에 보냈지만 거절을 당하기도 하였고, 왜인은 훈장을 받으면 며칠 동안 차고는 바로 녹여서 팔기도 하였다.”

특히 1910년 8월26일에는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궁내부대신 민병석에게 최고 훈장인 금척대수장(金尺大綬章)을 수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에게 이른바 ‘병합조약’의 체결에 앞장서서 동조한 사실 이외에 어떠한 공로가 더 있었는지는 참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들 외에 고관대작들의 부인과 궁중 여인들에게도 조약 공표일을 불과 며칠 앞둔 시점에서 무더기로 훈장이 지급되었다. 특히 최후의 관보 발행일인 1910년 8월29일자에는 기타의 전·현직 대·소 관원들에 대한 이러한 훈장 지급 목록이 제법 길게 덧붙여져 있고, 이것으로도 모자라 날짜를 소급해 여러 번의 호외가 더 발행된 것으로 확인된다.

아무튼 이러한 무더기 훈장 잔치 덕분에 표훈원은 훈장을 제조하기에 너무 바빠 대한제국의 다른 행정 기구와는 달리 이듬해인 1911년 3월에 가서야 사무 처리가 완전히 종결된 것으로 파악된다. 나라는 망했어도 그로 인해 훈장을 담당하는 기구는 그만큼 수명이 더 길어졌으니 참으로 묘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안국동 사거리에서 인사동길로 접어드는 초입의 북편 소공원 자리에 보면 ‘충훈부 터’라는 작은 표석 하나가 놓여 있는데, 이곳이 곧 옛 ‘표훈원’ 자리(관훈동 118번지 일대)이다. 혹여 인사동 거리를 거닐 일이 있거든 우스꽝스럽고도 부끄러운 풍경이 벌어졌던 그 현장을 잠시나마 둘러보는 것도 경술국치 100년의 뜻을 되새겨보는 유용한 방법 가운데 하나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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