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군인’, 하늘의 별이 되다
  • 한기홍 | 자유기고가 ()
  • 승인 2010.08.03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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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사건 당시 신군부측에 맞섰던 장태완 전 수도경비사령관의 비극적 삶과 죽음

 

▲ 2001년 9월6일 부산 롯데호텔에서 열린 ‘노무현 후원회’에 참석한 장태완 전 수도경비사령관. ⓒ시사저널 임준선

1979년 12·12 사건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었던 장태완 장군이 지난 7월26일 향년 79세로 별세했다.

그는 1989년 숨진 채 발견된 정병주 당시 특전사령관과 함께 12·12 사건을 주도한 신군부 세력에 정면으로 대항한 참 군인으로 기억된다. 사건 직후 신군부에 의해 강제 전역 당한 그의 인생은 불우하고, 또 처절했다. 그의 부친은 “옛날부터 나라에 모반이 있을 때 충신은 모반자들에 의해 살아남을 수 없는 일이다”라며 막걸리 외에는 식음을 전폐해 이듬해 4월18일 별세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나 다름없는 비극이었다. 

1982년 외아들 성호씨(1962년생)마저 세상을 버렸다. 그해 1월9일 집을 나간 아들이 한 달 만에 경북 왜관 낙동강 인근 산기슭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것이다. 성호씨는 가택 연금 상황에서도 열심히 공부해 서울대 자연대학에 입학했고, 그해 자연대 수석을 차지한 모범생이었다. 성호씨는 평소 “아버지의 충정은 역사가 기억할 것이다”라며 부친을 위로했다고 한다. 생전에 장장군은 “우리 내외의 인생은 아들이 죽은 날 끝났다”라며 피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는 회고록 <12·12 쿠데타와 나>에서 아들 잃은 슬픔을 이렇게 회고했다. “미칠 듯이 아들놈 생각이 나면 밤이고 낮이고 때를 가리지 않은 채 묘지로 달려가서 대성통곡도 해보고, 그러다가 지쳐버리면 그 놈 옆에 누워서 밤을 같이 새워본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장장군은 아들의 묘비에 이렇게 썼다. ‘고 장성호의 묘. 서울대학교 자연대학 1학년생. 모범 우등생. 여기 채 못다 핀 한 송이 꽃이 최고의 선을 위해 최대의 인고로 향학하다 수석의 영예를 안고 19년 4월의 짧은 인생을 마치고 고이 잠들다.’

12·12는 장장군의 가족을 쓰러뜨렸고, 그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파괴했다. 그는 사건 직후부터 화병에 시달렸고, 1987년에는 심장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는 하루 세 갑 이상의 담배를 피웠고, 독한 술에 정신을 잃었으며 여러 종류의 수면제를 상습 복용해야 했다. 심근경색 수술을 받기 직전 병실에서 1주일간 미친 듯 집필한 책이 바로 그의 회고록 <12·12 쿠데타와 나>였다. 그는 죽음의 한가운데에서도 ‘12·12 군사 반란’과의 싸움을 지속했던 것이다.  

그는 2008년 6월 폐암 진단을 받고, 폐의 3분의 1을 절제하는 대수술을 받았다. 수술 직후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는 동서고금의 쿠데타(군사 정변)를 연구하기 위해 방대한 자료를 섭렵했다. 역사에 오점을 남긴 쿠데타의 실상을 폭로하고, 그 어리석은 무력의 전율성을 고발하고자 했다. 그의 죽음으로 작업은 중단되었지만, 그의 삶과 죽음 자체가 쿠데타 권력의 불의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는 1993년 7월19일 전두환·노태우 등 34명을 반란 및 내란죄 혐의로 대검에 고소했다. 검찰은 1994년 10월29일 12·12 사건을 ‘軍(군) 형법상의 군사 반란’으로 규정했고, 법원은 피고소-고발인 전원에 대해 반란죄를 인정했다.

▲ 지난 7월27일 장태완 전 의원의 빈소가 차려진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유가족들이 슬픔을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군사 반란 막지 못한 데 대해 스스로 ‘패장’이라는 굴레 못 벗어나

그러나 그는 또 다른 의미에서 불행한 군인이었다. 스스로 ‘패장’이라는 강박 관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역사는 그의 죄의식에 면죄부를 주었지만 실존적 차원에서 그는 역사가 부여한 면죄부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군사 반란을 막지 못한 패장의 삶은 수치스럽다”라는 자괴감은 그의 뇌리와 영혼에 돌이킬 수 없는 상흔을 남겼다. 그는 예컨대 이런 식의 삶을 살았다.

“… 혼자만이 지낼 수 있는, 특히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 외진 낚시터를 주로 찾아다니고 명절이나 연휴 때는 아들의 묘를 둘러본 다음에는 혼자 차를 몰고 정처 없이 돌아다니기도 한다. 소백산 등 화전민들이 사는 골짜기를 찾아가 시골 노인들과 토종닭을 잡아놓고 막걸리나 소주를 들면서 연휴를 보내고는 노인들에게 몇만 원의 용돈을 준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내게 그나마 편안한 마음을 허락했다….”(회고록 <12·12 쿠데타와 나> 중에서)

육군종합학교 출신으로 6·25가 한창이던 1950년 12월 소위로 임관한 장장군은 수도사단 26연대의 한 소대장으로 향로봉 전투 등 숱한 격전을 치러냈다. 동료와 부하들의 ‘흔하디 흔한’ 죽음을 목도하면서 그는 “삶에 대한 애착을 완전히 상실했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중대장 시절 그는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중·동부 전선 수도고지 전투, 금성지구 전투, 금화지구 전선에 투입되었다. 금화지구 전선에서 휴전을 맞이할 때까지 그는 단 하루도 수도사단 26연대 1대대 2중대를 떠난 적이 없었다. 중령 시절이었던 1965년 10월 맹호사단 제1연대의 1진으로 베트남에 갔던 그는, 이듬해 9월 대령으로 승진해 귀국했다. 준장 진급은 1971년, 선배와 동기보다 먼저 별을 달았다는 송구함으로 그는 1년간이나 지프차의 성판(星板) 커버를 열지 않았다. 보다 못한 부인 이병호 여사가 “이제는 별판의 커버를 좀 벗기고 다니세요. 별판에 땀띠 나겠어요”라고 했다던 유명한 일화가 있다.

장장군은 1973년 4월 수도경비사령부(수경사) 참모장으로 보직되면서 그를 가혹한 운명으로 몰아넣었던 부대와 인연을 맺게 된다. 세칭 윤필용 사건으로 군복을 벗은 당시 수경사 참모장 손영길 준장(육사 11기)의 자리를 물려받은 것이다. 1975년 보병 제26사단장, 1978년 육군본부 교육참모부 차장을 거쳐 1979년 11월16일 그는 수도경비사령관에 보임되었다. 당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절친했던 이병형 장군(당시 2군사령관·2003년 별세)의 강력한 천거가 주효했고, 수경사 참모장 경력도 반영된 인사였다.

당시 수경사의 주력 부대는 30·33경비단이었다. 30경비단장은 장세동 대령, 33경비단장은 김진영 대령으로 두 사람 모두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최측근이자 하나회의 핵심이었다. 30·33경비단 등 청와대 근위부대는 이른바 ‘특정지역’으로 분류되어 상급 부대의 지휘 검열을 받지 않았다. 군 조직상 지휘 계통은 엄연히 수경사 예하 부대이나 청와대 경호실의 작전 통제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경호실은 30·33경비단의 작전 통제뿐만 아니라 지휘관을 선발하는 인사권까지 행사했다.

장장군은 당시를 회고하며 “해가 저물면 그 부대에는 사령관조차도 가지 않는 성역이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처럼 불합리한 작전통제권·인사권을 사령관 예하로 되돌려야 한다는 것이 새로 부임한 장사령관의 의지이자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는 수경사 개혁의 첫 삽도 뜨지 못한 상태에서 12·12를 맞았다. 주력인 30·33경비단과 사령관 자신을 체포한 헌병단은 하나회 출신 장교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그같은 구조가 12·12 사건 진압에 실패한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장장군은 생전 제갈공명의 ‘강류석불전’(江流石不轉)이라는 성어를 좋아했다. 강물은 흘러도 그 안의 돌은 물결 따라 이리저리 구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결 따라 구르지 않았지만 그는 물결과 함께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졌다. 흘러간 물은 되돌릴 수 없지만, 탁류가 다시 흐르는 것은 막을 수 있다. 이른바 석능방탁류(石能防濁流)이다. 돌아간 그의 영혼이 탁류를 막는 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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