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부터 균열 조짐 있었다
  • 김지영 (young@sisapress.com)
  • 승인 2010.08.03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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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리비아, 언제 틀어졌나 / 카다피 서울·평양 연쇄 방문 추진 등 좋은 분위기에 찬물 끼얹는 사건 터져

 

▲ 2005년 1월 말 리비아를 방문한 반기문 당시 외교통상부장관이 카다피 국가 원수에게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있다. ⓒ연합뉴스

수교 30주년을 맞고 있는 한국과 리비아의 관계가 악화 일로로 치닫고 있다. 리비아 주재 한국대사관에 근무했던 국가정보원 직원이 간첩 혐의로 추방되었고, 이와 맞물려 리비아에 거주하는 선교사 등 한국인 두 명이 리비아 보안 당국에 의해 구금되어 있다. 그런데 사실 한국-리비아 관계에서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던 시기는 5년 전인 2005년이다. 이때부터 양국 관계에서 이상 기류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기자는 2005년 1월10일부터 14일까지 작성된 A4용지 14장 분량의 ‘청와대 NSC(대통령 직속 국가안전보장회의) 일일 정보’라는 제목의 2급 비밀 문건을 당시 입수한 바 있다. 이 문건은 당시 통일부와 외교부, 국가정보원 그리고 미국과 중국 등 해외 공관이 NSC에 보고한 정보들을 취합한 것이다. 북핵 문제와 6자회담 등으로 민감했던 당시 한국과 중국 정부가 다양한 외교 채널을 가동해 미국 부시 행정부에 “북한을 자극하지 말 것”을 강하게 요청했던 비밀 외교 활동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도 했다. 이밖에도 우리의 외교·안보 측면에서 상당히 민감한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문건 안에는,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 원수가 한국 정부의 초청을 갈망한다’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2005년 1월14일자 ‘NSC 일일 정보’에 따르면, 그해 1월11일 압두사렘 아라파 당시 주한 리비아 대사가 통일부장관인 정동영 NSC 의장을 예방했다. 당시 정장관은 “카다피 원수가 방한해서 북한의 핵 폐기 등을 권고한다면 북한은 물론 국제 사회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발언으로 평가받을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이에 아라파 대사는 “카다피 원수는 (2003년 12월 리비아의) 대량살상무기(WMD) 프로그램 폐기 (선언) 이후 북한·이란 등을 대상으로 ‘평화의 주창자’ 역할 수행을 희망하고 있다. 한국이 카다피 원수의 방한을 적극 추진해주기 바라며, (2005년) 1월 하순 반기문 외교통상부장관의 리비아 방문이 ‘초청 성사’의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이날 아라파 대사의 발언 가운데 눈길을 끄는 대목은 또 있다. 그는 “카다피 원수가 방한한다면 서울을 거쳐 평양을 갈 수 있을 것이며, 북한이 대가를 요구할 경우에는 지불할 능력도 갖고 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2005년 당시 이른바 ‘카다피의 서울-평양 연쇄 방문 프로젝트’가 가동되었던 것이다.

‘정동영-아라파 밀담’이 있은 지 불과 보름 정도 지난 그해 1월 말 반기문 외교통상부장관은 리비아를 방문해 카다피 원수에게 노무현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면서 “한국을 방문해달라”라고 전했고, 카다피 원수도 “적절한 시기에 방한하겠다”라는 뜻을 밝혔다.

▲ 아라파 주한 리비아 대사가 2005년 3월과 4월에 한국 기업들에게 보낸 미술 전시회 협찬금 요청 공문.


당시 아라파 주한 대사가 한국 기업에 협찬 강요했다는 의혹 불거져

이처럼 우호적이었던 양국 관계가 반장관의 리비아 방문이 있은 몇 달 뒤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우리 외교가에서 “아라파 대사가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되었다”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시점에 기자는 “아라파 주한 리비아 대사가 우리 기업들에게 전시회 협찬금을 강요하고 있다”라는 제보와 함께 아라파 대사가 우리 기업들에게 보냈던 협찬 요청 공문을 입수했다. 여기에서 아라파 대사가 리비아 현지에서 건설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대한통운과 현대건설, 대우건설 세 곳에 ‘카다피 국가 원수의 둘째아들인 세이프 알 이슬람이 서울에서 개최할 예정인 미술 전시회에 소요되는 경비를 협찬해달라’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낸 사실이 확인되었다. 아라파 대사는 공문을 통해 각 기업들에게 구체적인 협찬 금액을 제시했고, 수취인(리비아 대사관)과 입금 은행(외환은행) 및 계좌 번호까지 명시했다. 세이프 알 이슬람은 미술에서도 유화 부문에 재능이 있으며 조예가 깊은 것으로 알려졌다.

아라파 대사가 2005년 3월15일 대한통운에 보낸 공문에는 ‘아라파 대사가 (2005년) 3월2일 대한통운 곽영욱 사장과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전시회 관련 비용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다. 약 2억원을 요청한다’라고 적시되어 있다. 4월11일에는 현대건설과 대우건설에도 각각 ‘1억원씩 협찬해달라’라는 공문을 발송했다. 아라파 대사가 세 기업에 요청한 협찬금은 모두 4억원이었다. 공문에는 ‘(당신네 기업이) 이 프로젝트(미술 전시회)에 기부하면 리비아와 당신 회사의 관계가 돈독해질 것이며, 리비아에서의 비즈니스 활동에도 도움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라고 밝혔다. 이 공문을 받은 해당 기업들은 상당히 곤혹스러워했다. 당시 해당 기업의 한 관계자는 “아라파 대사가 이번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면 향후 리비아 현지 사업 확장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리라는 점을 은근히 암시했다. 만일 협조하지 않으면 불이익이 돌아갈 것이라는 경고도 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일각에서는 “아라파 대사가 세이프 알 이슬람의 서울 전시회 개최를 명분으로 우리 기업들에게 압력을 가해 개인적인 치부를 하려는 것이 아니냐”라는 의혹의 시선을 보냈다. 이런 의혹을 제기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세이프 알 이슬람은 2005년 3월 일본 도쿄에서도 전시를 개최한 바 있었다. 전시 비용 일체는 세이프 알 이슬람이 총재로 있는 ‘카다피 국제 자선 재단’이 지불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기업에서 “왜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협찬금을 요구하는지 모르겠다”라는 볼멘소리가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더군다나 석유 부국인 리비아의 차기 지도자로 유력한 이슬람이 자신의 이미지를 훼손시킬 수도 있는 협찬금 모금에 나선 것도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었다. 이와 관련해 당시 아라파 대사의 해명을 듣고자 했으나 대사관측은 “미술 전시회는 연기되었고, 스폰서 자금은 받지 않았다”라는 입장만 밝혔다. 최근 다시 확인한 결과, 이슬람의 미술 전시회는 국내에서 개최된 적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이 시점부터 한국-리비아 양국 사이에서는 균열의 조짐이 일기 시작했다는 전언이다. 한 외교 소식통은 “2006년 9월 당시 한명숙 국무총리가 리비아를 방문했을 때, 양국 간 경제 협력 및 북핵 문제 해결 방안 등을 논의했다. 당시 아라파 대사 문제도 거론했지만, 양국 간의 입장 차이 때문에 제대로 해결되지 못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당시 리비아는 한국과의 무역 역조와 우리의 원유 수입선 다변화 등을 계속 문제 삼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급기야 2007년 7월 아라파 대사는 본국으로 돌아갔고, 리비아는 그해 10월 주한 리비아대사관을 주한 경제협력대표부로 격하시켰다.

그리고 지난 정부 말기 냉랭해진 양국 관계는 현 정부 들어 더욱 틀어졌다. “리비아가 한국의 네 번째 해외 건설 시장임에도, 한국 언론이 카다피 대통령에 관해 부정적으로 다루는 것에 대해 리비아 내부에서 상당한 불만을 갖고 있다”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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