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목 따라 몸 따라 ‘고무줄 은퇴’
  • 신명철 | 인스포츠 편집위원 ()
  • 승인 2010.08.30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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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선수의 현역 기간, 프로화 시대 맞으면서 길어져…포지션 바꿔 선수 생명 이어가는 경우도

 

▲ 50세의 나이로 유럽육상선수권대회 최고령 기록을 갈아치운 슬로베니아의 멀린 오티 선수. ⓒAP연합

야구 선수 양준혁은 올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고, 양준혁과 41세 동갑인 농구 선수 이창수는 2010-11시즌에도 코트를 누빈다. 농구 선수 우지원은 2009-10시즌을 마지막으로 코트를 떠난 반면, 우지원과 37세 동갑인 야구 선수 박찬호는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에 새롭게 둥지를 틀고 선수 생활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다. 8월11일 나이지리아와의 친선 경기를 마지막으로 국가대표팀에서 물러난 ‘영원한 수문장’ 이운재는 올해 37세이다. 같은 나이에 누구는 은퇴하고 누구는 운동을 계속하고, 또 누구는 국가대표 유니폼은 반납하지만 그라운드에서는 물러나지 않겠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국내 스포츠팬들에게 낯설지 않은 여자 단거리의 ‘영원한 청춘’ 멀린 오티는 지난 8월2일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제20회 유럽육상선수권대회 400m 계주에 출전해 노장의 투혼을 발휘했다. 놀라지 마시라. 오티는 1960년 5월10일 태어났다. 일찍 자식을 보았으면 할머니도 되었을 나이에 장거리도 아닌 단거리 선수로 활동하고 있다. 오티는 1980년 모스크바대회 때 올림픽 무대에 데뷔했다. 한국이 출전하지 않은 올림픽이기도 하고 30년 전에 열렸기 때문에 대회 자체를 잘 모르는 신세대 스포츠팬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오티는 올림픽에 일곱 번 출전했고 은메달 세 개, 동메달 여섯 개를 목에 걸었다. 세계적인 선수이면서도 올림픽 금메달이 없어 ‘비운의 여왕’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금메달 세 개, 은메달 네 개, 동메달 일곱 개를 차지했다. 세계실내선수권대회와 영연방대회 등 세계 규모 대회에서 거두어들인 메달이 33개나 된다. 한마디로 오티는 세계 여자 육상계의 ‘걸어다니는 전설’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오티가 2011년 대구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대회와 2012년 런던올림픽에 도전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오티 수준은 아니지만 이봉주도 39세였던 지난해까지 마라톤 풀코스를 뛰었다. 세계 무대에서 30대 후반의 마라토너는 흔히 찾아볼 수 있다. 포르투갈의 카를로스 로페스는 37세 때인 19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 마라톤에서 당시 기준 올림픽 최고 기록인 2시간 9분21초로 금메달을 차지했다. 

도대체 운동선수는 몇 살까지 활동할 수 있을까. 정년은 있는 것인가. 프로야구 삼성라이온즈 김응룡 사장이 국가대표팀 지휘봉을 잡고 한국 야구 사상 처음으로 세계 규모 대회인 19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에서 우승했을 때의 나이는 36세였다. 박찬호보다 어린 나이에 은퇴해 실업야구팀 한일은행 사령탑에 올랐고, 국제 무대에서 한국 야구를 빛냈다. 그런데 미국 프로야구의 전설적인 투수 새철 페이지는 58세 때인 1965년 메이저리그 경기에 선발 등판해 3이닝을 던졌다. 우리나라 나이로 치면 환갑이 내일모레였다.

오는 11월 광저우에서 열리는 아시아경기대회를 준비하는 한편 9월 체코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할 여자 농구 대표팀의 주력은 전주원, 정선민, 박정은 등 서른 살이 넘은 선수들이다. 20세의 최연소 김단비는 전주원과 무려 열여덟 살 차이가 난다. ‘이모급’ 선배와 코트를 누비는 것이다. 전주원은 김응룡 사장보다 더 오래 현역으로 뛰고 있다.

운동선수들의 은퇴 연령은 시대상의 변화를 반영한다. 국내의 경우 1980년대 이후 운동이 직업화되는 프로화 시대를 맞아 전반적으로 운동선수들의 은퇴 연령이 높아지고 있다. 비교적 생명이 긴 야구의 경우 30대 중반은 기본이고 양준혁의 경우처럼 40대에 접어들면서야 그라운드를 떠나는 선수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축구도 골키퍼와 수비수 등 포지션에 따라 30대 중·후반까지 현역 생활을 이어가는 선수가 많다. 나이가 들면 공격수에서 수비수로 위치를 바꾸며 선수 생명을 이어가는 경우도 있다. 

▲ 8월11일 저녁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 나이지리아와의 친선 경기 중 은퇴식을 가진 이운재 선수를 동료 선수들이 헹가래 치고 있다. ⓒ시사저널 유장훈

부상으로 조기 은퇴하는 경우도  많아

1990년대 중반 농구대잔치의 인기를 이끌었던 선수들 가운데 현주엽·전희철·양희승 등이 우지원보다 먼저 코트를 떠났지만 이들도 모두 30대 중반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 이들은 농구가 프로화되지 않았다면 벌써 은퇴해 은행 창구 업무를 보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1970년대까지 농구는 남자의 경우 한국은행과 기업은행, 산업은행 그리고 여자의 경우 상업은행과 제일은행, 조흥은행 등 금융단이 이끌었다.  

프로화가 되었다고 모든 운동선수가 오랜 기간 선수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프로 선수가 일찌감치 선수 생활을 포기한 대표적인 사례로 일본 프로야구의 에가와 스구루가 흔히 인용된다. 1980년대 일본 프로야구 명문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기둥 투수로 활약하던 에가와가 32세의 비교적 이른 나이에 느닷없이 은퇴를 선언했을 때 일본은 물론 적지 않은 국내 팬들도 놀랐다. 에가와는 괴물이라는 별명으로 국내 팬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은퇴 이유는 오른쪽 어깨 통증이었다.

프로야구 초창기에는 국내 선수들도 조기에 선수 생활을 마감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선동열과 함께 현대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투수로 꼽히는 최동원은 1990년 시즌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에가와와 같은 32세 때였다. 최동원은 특별한 부상이 없었다.         

사실 운동선수들에게는 딱히 정해진 정년이 없다. 여러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운동선수들의 활동 기간은 천차만별이다. 그런데 에가와와 최동원에게서는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에가와가 국내 팬들에게 이름을 알린 것은 1973년 일본 고교 선발팀의 일원으로 방한 경기를 했을 때이다. 에가와는 그해 열린 제55회 여름철 고시엔대회 도치키 현 예선 5경기에 모두 등판해 44이닝 2안타 75탈삼진이라는 믿기 어려운 투구를 했다. 최동원은 1978년 대통령기전국대학야구대회 준결승전과 결승전에 잇따라 등판하며 연세대의 우승을 이끌었다.

그때 기록을 잠시 살펴보자. 준결승전 첫날은 동아대의 임호균과 투수전을 벌인 끝에 연장 14회 0-0, 일몰 일시 정지 경기가 되었다. 이튿날 계속 벌어진 경기에서 연장 18회 초 김봉연의 결승 홈런이 터져 연세대가 1-0으로 겨우 이겼다. 그리고 몇 시간 휴식을 한 뒤 연세대와 성균관대의 결승전이 이어졌다. 최동원은 또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연세대는 접전 끝에 성균관대를 3-2로 물리치고 우승했다. 최동원은 이틀 동안 27이닝에 투구 수 3백75개 12안타 33탈삼진 2실점이라는 요즘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투구 내용을 기록했다.

 투수의 어깨 수명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한계 투구 수 이론’이다. 1980년대 이전에 생산된 텔레비전은 ‘로터리 스위치’로 채널을 맞추었다. ‘로터리 스위치’는 제품이 생산될 때 일정 횟수를 돌리면 수명을 다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투수의 어깨도 그렇다는 얘기이다. 서른 살이 되었든 마흔 살이 되었든 투수에게는 타고난 투구 수가 있기 때문에 성장기에 많이 던진 투수의 선수 생명은 결코 길지 못하다는 것이다.

운동선수들은 누구보다도 스스로가 자신의 운동 능력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다. 반강제적인 은퇴는 우수 선수의 선수 생명을 끊고 팀 전력을 약화시킬 뿐이다. 무작정 선수 생활의 연장을 고집하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우수 선수의 은퇴와 이에 따른 세대교체는 조직의 틀이 깨지지 않는 범위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어디 이런 논리가 필요한 곳이 스포츠계뿐만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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