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사유화’ 논란 부른 그들만의 토크쇼
  • 정덕현 | 대중문화평론가 ()
  • 승인 2010.08.30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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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러와> 등 ‘자기들끼리 떠드는’ 예능 프로그램 많아

 

▲ MBC 예능 프로그램 가 정선희씨를 출연시켰는데, 한 회 분량 내내 지나치게 사적인 이야기만 오간 내용을 방송해 시청자들로부터 질타를 받았다. ⓒMBC

“지들끼리 떠드는 것을 뭐하러 보고 있냐?” 나이 든 세대들은 흔히들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이 얘기 속에는 작금의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꽤 많은 정보가 들어가 있다. 먼저 주목되는 것은 예능 프로그램이 만들어내는 세대별 공감대가 그다지 넓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30~40대 중년층은 예능 프로그램의 새로운 시청 권력으로 자리하고 있지만, 그 이상의 장년층들에게는 외계 프로그램을 보는 것만 같은 이질감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 주원인은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진 예능의 형식 때문이다. 메인 MC 한 명이 전체 프로그램을 조율하면서 쇼를 질서정연하게 풀어내던 과거의 방식과 비교해보면, MC들이 부지기수로 늘어나고 그들이 서로 중심과 주변의 경계를 허물며 던지는 멘트들은 실로 정신이 없을 지경이다. 게다가 화면을 거의 도배하다시피 하는 자막들은 또 어떻고.

하지만 예능 프로그램을 ‘지들끼리 떠드는’ 것으로 치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달라진 형식들 때문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떠드는 내용’이다. 토크쇼의 경우 출연자들이 자신들의 숨겨진 사생활을 까발리거나 심지어 동료 연예인의 사생활을 폭로하는 것은 이제 일상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누가 누구와 사귄다 정도는 이제 식상한 사생활이 되었다. 적어도 소속사 선배 가수에게 성추행당할 뻔했다는 정도의 이야기라야 이목을 끌 수 있게 된 토크쇼라는 온상 위에서, 사생활은 적나라하게 발가벗겨지게 마련이다.

사생활 공개가 토크쇼 메뉴의 주류를 차지하게 된 것에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신비주의화하고 권력화하던 스타가 친숙한 이미지로 귀환하고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니까. 게다가 이 신비적이던 스타의 사생활은 굳이 대중들의 관음증적인 욕망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충분한 재미를 준다. 남 얘기, 그것도 마치 신처럼 보이던 스타의 속 얘기이니 어찌 그렇지 않을까. 하지만 이 작은 긍정과 재미 뒤에는 큰 의문이 남는다. 도대체 왜 우리가 저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 심지어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저들끼리 노골적으로 띄워주고 챙겨주는 이야기를 듣다보면, 이것은 혹시 저들이 방송을 사유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된다.

정선희가 오랜 공백 기간을 가진 후 출연한 <놀러와>에 대해 갑작스럽게 불거져나온 논란은 방송의 사유화에 대한 대중의 마음을 잘 드러낸 사건이다. 남편과 친구의 잇따른 자살로 인해 2년여 동안 지상파 방송에 출연하지 못했던 정선희의 <놀러와> 출연은 방영 이전부터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많은 의혹이 완전히 풀리지 않은 상황에서 방송 복귀는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러와> 방영 후에 생겨난 논란을 들여다보면 그 논란이 정선희 출연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 논란의 핵심은 정선희 출연이 아니라, 정선희가 출연했을 때 그 방송이 어떤 모습으로 임했는가이다. ‘정선희 특집’이냐는 얘기가 나온 것은 거기 ‘절친’으로 등장한 이경실, 이성미, 김영철, 김제동은 물론이고 MC인 유재석과 김원희 역시 그 초점을 정선희의 복귀에 맞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칭찬하고 치켜세우기 바빴고, 어떤 면으로는 개그맨들끼리 돈독한 선후배 관계를 과시하는 모습으로 비쳤다. 그 지나치게 사적인(?) 이야기들은 물론 그간 고통스런 나날들을 버텨왔을 정선희를 위한 배려라고 말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한 회 분량 내내 정선희에 초점이 맞춰진 쇼는 어딘지 잘못된 느낌을 만들었다. 그것은 저들이 방송을 사유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그 생각을 다시 끄집어내게 했다.

음반 출시·영화 개봉 등 맞춰 ‘연예인 홍보의 장’으로 전락하기도

애초에 정선희가 <놀러와>에 출연한다는 것에 대해 논란이 일었을 때, 신정수 PD는 “녹화를 안 할 이유도, 방송을 내지 못할 이유도 없다”라고 말한 바 있다. 맞는 이야기이다. 그의 말대로 정선희가 마약을 하거나 물의를 일으킨 인물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출연을 시켰다면 정선희 출연에 대한 시청자들의 궁금증이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도 생각해보아야 했을 것이다. 신PD는 “아침 방송처럼 정선희씨의 심경을 묻지 않았다”라고 자랑처럼 말했지만 그것은 어쩌면 시청자들의 관심과 상관없는 ‘저들끼리의 이야기’를 내보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또 ‘37.5℃ 뜨거운 마음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부제를 달았다면 거기 출연한 김제동이나 이경실, 이성미, 김영철이 각자의 이야기를 했어야 옳지 않았을까. 그들이 모두 ‘정선희 복귀 쇼’의 병풍처럼 작용한 것에 시청자들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 것은, 문득 이 토크쇼가 자신들을 배제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저들끼리 떠드는’ 방송의 사유화에 대한 논란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많은 토크쇼가 사유화되어가는 방송이라며 비판을 받았다. 토크쇼가 연예인들을 홍보하는 장이냐는 비판이 그런 것이다. 지금도 영화배우는 영화 개봉에 맞추어, 가수는 음반 출시에 즈음해 방송 3사의 예능 프로그램을 순례한다. 이에 토크쇼는 저마다 사적인 방송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안전장치를 마련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바로 시청자 참여 형식이다.

<야심만만>은 설문이라는 형식을 통해 연예인들의 사적인 이야기에 공적인 의미를 부여했고, <상상플러스>는 댓글 참여 형식은 물론이고, 에듀테인먼트적인 요소를 가미해 자칫 사적으로만 흘러갈 수 있는 토크쇼를 공공화했다. <황금어장>의 ‘무릎 팍 도사’나 ‘라디오 스타’ 같은 경우는 사적인 이야기를 내놓고 얘기하면서도 아예 정면으로 홍보성 멘트를 걷어냄으로써 시청자들이 원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이 문제를 넘어섰다. 하지만 이 직설어법의 토크쇼가 가져온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토크쇼가 자극적인 독설과 폭로의 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다시 주목되는 것이 <놀러와>나 <해피 투게더> 같은 이른바 ‘착한’ 토크쇼이다. 착한 토크쇼가 게스트를 배려하는 것은 시청자 입장에서도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지나친 배려는 시청자와의 공감대를 벗어나면서 문제를 만들어낸다. 토크쇼의 주체가 MC인 호스트와 초청된 게스트 그리고 이것을 보는 시청자(관객)로 균형을 맞춘다고 볼 때, 공감대의 상실은 호스트와 게스트들 둘만의 잔치로 전락하게 된다. 그러니 소외된 채 그것을 바라보는 시청자들의 마음이 편할 수가 있을까.  
 

 사적인 토크쇼, 공적인 토크쇼

토크쇼의 어떤 내용을 가지고 ‘사적이다, 공적이다’라고 말하는 기준은 애매모호하다. 토크쇼가 본래 게스트의 내밀한 사적인 영역을 질문과 답변을 통해 들여다보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미 스타들이 신매체에 의해 발가벗겨진 현대에 이르러 과거 같은 토크쇼는 더 이상 아무런 존재 의미도 갖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이미 신비로운 아우라가 깨진 그들의 사적인 이야기가 그다지 흥미를 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금의 토크쇼들은 거꾸로 그들이 얼마나 우리와 같은 사람인가를 강조한다. 그러니 더더욱 사적인 이야기에 몰두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 사적인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대중들과 호흡할 수 있는 공적인 이야기로 변환하는가라고 할 수 있다. <놀러와>가 그토록 게스트를 카테고리화하는 것은 다채로운 인간 군상을 담아내면서 그 속에서 우리와 닮은 공감대를 끄집어내기 위한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카테고리가 그저 허울 좋은 카테고리로만 흘러갈 때, 이 토크쇼의 공적인 느낌은 깨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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