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성 한국산악평론클럽 회장 “오은선, 양심선언하기 바란다”
  • 정락인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10.08.30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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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첸중가 정상 안 간 것, 산악계에서는 쫙 퍼져 있는 얘기”

 

▲ 지난 8월25일 서울 인사동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박기성 한국산악평론클럽 회장. ⓒ시사저널 윤성호

‘국민 산악 영웅’으로 떠오른 여성 산악인 오은선씨(44)가 벼랑 끝에 섰다. 그녀가 세운 ‘세계 여성 최초 히말라야 14봉 등정’이라는 기록이 아슬아슬하다. 지난해 5월 정상을 등정했다는 ‘칸첸중가’가 발목을 잡았다. 정상 등정을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는 가운데, 새로운 의혹이 나오면서 거센 파장을 부르고 있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대한산악연맹은 8월26일 경기단체 회의실에서 칸첸중가 정상을 밟은 산악인 6명과 함께 오은선의 등정 관련 자료를 검토한 후 “정상 등극을 인정하기 힘들다”라는 결론을 냈다. 결국 오은선의 ‘세계 기록을 인정하지 않은 셈이다. 물론 오씨는 여기에 반발하고 있다.

<시사저널>은 지난 1997년 한국대학산악연맹의 가셔브룸Ⅱ 원정대에서 오은선씨와 함께 대원으로 참여했던 박기성 한국산악평론클럽 회장(54)을 만나 국내 산악계의 고질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집중적으로 짚어보았다. 박회장은 산악 전문지인 <사람과 산> 편집장을 역임했고, 지금까지 34년간 전문 산악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오은선씨의 칸첸중가 등정 의혹이 불거졌다. 산악인으로서 어떤 생각이 드나?

전문 산악인들에게 아주 미안하다. 전문 산악인들은 산을 개인사에서 최고의 가치로 생각한다.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평생 등반을 하며 자신과의 도전에 나선다. 그런데 상업(프로) 산악인들이 전문 산악인들의 가치를 훼손하고, 국민들을 기만하고 있다. 이 사람들 때문에 전문 산악인들까지 도매금으로 지탄받는 현실이 안타깝다. 선배 산악인으로서 이런 사태를 미연에 막지 못해 부끄러울 따름이다. 전문 산악인들과 국민들께 사죄하고 싶다.

▶상업 산악인들은 구체적으로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아마추어 산악인은 ‘전문 산악인’으로 불리고, 상업 산악인은 등산 용품업체에 소속되어서 월급 또는 정기적인 후원을 받는 사람들이다. 상업 산악인은 후원업체와 개인의 이익을 위해 ‘타이틀’에 집착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산악인의 정신을 잃어버리게 되고 오은선의 경우처럼 ‘등정 의혹’이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엄홍길·박영석·오은선·한왕용·고 고미영 씨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이 ‘타이틀’에 집착하면서 산악인들의 도전 정신이 망가지고 있다. 세계 산악계에서 ‘16봉 등정’이니 ‘14봉 등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미 용도 폐기된 것들이다. 지금까지 세계에서 히말라야 14봉을 올라간 팀은 모두 20개이다. 그중 우리나라에 네 팀이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세계 산악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황금 피켈상’을 한 번도 받지 못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산악계의 현실이다.

▶‘황금 피켈상’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황금 피켈상’은 프랑스 산악 잡지 <몽타뉴>가 해마다 그해 최고 등반대에게 준다.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본상 수상은커녕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다. 산악인들의 공통적인 가치는 인간의 능력으로 난공불락의 목표를 정복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상업 산악인들은 돈의 힘으로 올라간다. 이들은 새로운 루트를 통해 간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올랐던 길을 그대로 따라갔다. 셰르파가 앞에서 길을 다지고 산소 호흡기를 이용하는가 하면, 심지어 8천m 고봉을 올라가는데 5천m까지는 헬기를 타고 간다. 이러니 국제 산악계에서 한국 산악인들을 일컬어 ‘가마 타고 간다’라며 조롱하는 것이다.

 

▲ 지난 4월26일 기상 악화로 안나푸르나 정상 도전이 이틀 정도 늦어진 오은선 대장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연합뉴스

▶오은선씨의 칸첸중가 등정 의혹은 산악계에서 ‘공공연한 비밀’ 아니었나?

그렇다. 오은선이 칸첸중가 정상을 가지 않았다는 것은 산악계에 쫙 퍼져 있는 얘기이다. 특히 김재수씨(산악인)가 오은선 등정 후에 칸첸중가에 오르면서 기정사실화되었다. 오은선은 수원대 깃발을 등반 도중에 잃어버렸다고 했지만, 김씨가 등반 도중 그 깃발을 발견한 것이다. 김씨가 ‘적당한 시기에 기자회견을 하겠다’라고 했으나 고미영씨가 죽고 나서 그냥 묻혀 있었다. 그러다가 터진 것이다. 산악계에서는 오은선의 칸첸중가 등정을 믿지 않고 있다.

▶제2·제3의 오은선은 없는가?

상업 산악인들 누구도 ‘등정 의혹’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1990년대 초반 대구·경북 산악연맹팀에서 히말라야 14좌 중 여섯 번째인 초호유 봉(8,201m)에 올라간 적이 있었다. 당시 정상 등정자는 두 명이라고 발표했고 정부에서 훈장까지 받았다. 그런데 나중에 한 명이 양심선언을 했다. 2007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한국산악회는 ‘에베레스트 실버 원정대’를 꾸리고 정상에 도전했다. 이때에도 두 명이 정상에 올랐다고 했고, 훈장도 받았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한 명만 정상에 올랐다. 나중에 본인이 실토하고 사과까지 했지만 아직까지 훈장을 반납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이것 말고도 많다.

▶‘등정 인증’을 받았기 때문에 훈장을 준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인증’이라는 것이 참 우습다. 검증 가치도 없는 것이다. 일부 언론들은 네팔에 거주하는 홀리 여사가 정상 등정을 공인하는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말도 안 되는 것이다. 홀리 여사는 고봉에 올라간 적이 없다. 산악인도 아니다. 검증의 객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녀는 그냥 ‘기록자’일 뿐이다. 네팔 정부의 ‘등정 확인증’도 공신력이 없다. 앞에서 언급했던 등정을 속이고 훈장을 받은 사람들도 모두 네팔 정부의 ‘등정 확인증’을 갖고 있었다. 산악인이 등정했다고 통보하면 검증 절차 없이 발급해주는 것이다. 홀리 여사나 네팔 정부는 산악인의 양심에 따라 기록하고 등정 인증을 해주고 있을 뿐이다.

▶산악 단체나 언론의 문제는 없는가?

대한산악연맹은 정부에서 지원을 받고 있다. 국고를 받기 위해 ‘국위 선양’이라는 명분이 필요하다. 국위를 선양했다면 외국 언론에도 나오고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만 ‘세계 최초’일 뿐이다. 언론의 ‘영웅 만들기’도 심각하다. 오은선이 14봉을 등정하자 일부 언론은 1면 톱으로 실었다. 언론과 업체들과의 결탁이 없다고 볼 수 없다. 원정대에 방송사가 붙게 마련인데 그래야만 원정 자금이 쉽게 모이기 때문이다. 결국 등산 장비·의류 업체, 상업 산악인, 언론, 사회 분위기 등이 국민을 기만한다고 볼 수 있다.

▶오은선씨가 의혹을 없애기 위해 ‘칸첸중가를 다시 올라가야 한다’라는 여론이 있다.

전혀 의미가 없는 말이다. 설사 다시 올라간다고 해도 자기 도덕성에 면죄부가 될 수 없다. 가령 남의 물건을 훔쳐갔는데, 문제가 생겨 다시 가져다 놓았다고 하자. 그럼 그 사람의 잘못이 없어지는 것인가. 산악인의 도전 정신은 양심에 밑바탕을 두고 있다. 오은선도 ‘양심선언’을 하고 국민 앞에 사죄해야 한다. ‘최초 타이틀’에 미련을 두지 말고 욕심을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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