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업계, 지각 변동 시작됐다
  • 이은지 (lej81@sisapress.com)
  • 승인 2010.09.06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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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토탈·현대중공업, SK에너지와 GS칼텍스 양강 구도에 도전장…산업용 시장에서 경쟁 붙을 듯

 

▲ SK에너지 정유 수출 현장. ⓒSK에너지 제공

정유업계에 군웅할거 시대가 열렸다. 업계 만년 꼴찌인 현대오일뱅크가 현대중공업에 인수되면서 현대가(家)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급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여기에 삼성토탈이 항공유와 휘발유를 생산하면서 이 분야에 새롭게 진입했다. 현재는 정유업계 1, 2위를 차지하고 있는 SK에너지와 GS칼텍스가 70% 가까운 시장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그 뒤를 에쓰오일과 현대오일뱅크가 쫓고 있는 형국이다. 정유업은 기초 투자비가 많이 드는 자본집약적 장치 산업이기 때문에 새로운 경쟁자가 등장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그동안에는 매출과 시장점유율에 큰 변동이 없었다. 하지만 현대오일뱅크가 현대가의 힘을 받기 시작한 데다가, 삼성토탈이 삼성이라는 브랜드 파워를 앞세워 정유업으로 눈을 돌리면서 일대 지각 변동이 예상된다. SK에너지와 GS칼텍스가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불편한 심기를 내보이는 이유이다.

일단 SK에너지와 GS칼텍스는 삼성토탈의 발목 잡기에 나섰다. 석유화학기업인 삼성토탈이 휘발유와 항공유를 생산해내는 데는 법적으로 문제가 있다며 제동을 걸었다. 현행법상 석유정제업으로 등록된 업체만 원유를 정제해 휘발유와 경유 등을 생산할 수 있다. 석유정제업으로 등록되면 비축 저장 시설을 완비해야 하고, 원유를 수입할 때 관세 3%를 내야 한다. 삼성토탈은 석유화학기업으로 ‘석유 수출입업 및 부산물 판매업’으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기준을 적용받지 않는다. SK에너지는 ‘생산 과정이 다르더라도 결과물이 같다면 석유정제업을 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삼성토탈측은 원유가 아닌 나프타를 분해하는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을 가공해서 항공유와 휘발유를 생산하는 만큼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민병기 삼성토탈 홍보팀장은 “그동안 부산물을 재사용하거나 정유사에 판매했다. 그렇게 되면 생산 효율성이 떨어진다. 부산물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기술 투자를 했고, 석유화학기업 가운데 최초로 부산물에서 항공유를 생산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데에 성공했다. 기술을 개발해 원유가 아닌 부산물에서 석유를 생산해내는 것은 장려할 일이지 막을 일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삼성토탈은 자문사에 법률적인 검토를 의뢰한 상태이다.

판단의 칼자루를 쥔 지식경제부는 삼성토탈이 법리 해석 결과를 제출하면 타당성 검토를 한 뒤 입장을 내놓겠다는 계획이다. 유연백 지식경제부 석유산업과장은 “논란의 핵심은 원유가 아닌 부산물에서 석유를 뽑아내더라도 석유정제업으로 봐야 하는지 여부이다. 기술 개발로 인해 이전에는 없던 논란거리가 생겼다. ‘삼성’이라는 후광 때문에 업계가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다. 빨라야 이번 달 안에 정부의 입장 표명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삼성토탈이 올해 목표로 잡은 항공유 생산량은 10만 t(73만 배럴)이다. 매출로 따지면 연간 9백억원 정도로 삼성토탈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에 불과하다. SK에너지가 한 해 수출하는 항공유 3천50만 배럴과 비교해도 2%밖에 되지 않는 적은 생산량이다.

삼성토탈은 지금 당장은 정유업으로 진출할 의사가 없다고 밝히고 있지만, 항공유를 생산해보고 괜찮은 사업이라는 검토가 끝나면 정식으로 정유업에 뛰어들 수도 있다. 업계에서는 이를 염두에 두고 사전에 불안 요소를 없애기 위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게다가 현대중공업을 등에 업은 현대오일뱅크가 광폭 성장을 하지 않을까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현대중공업은 11년 전 아부다비 국영석유투자회사(IPIC)에 넘긴 현대오일뱅크를 2조5천억원에 인수했다. 다소 비싸게 인수했다는 평이다. 유영국 KTB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보통 시가총액의 1.1배 수준에서 거래되는 데 비해 현대오일뱅크는 지분 인수 금액이 시가총액의 두 배를 넘어섰다. 현대가의 사업을 되찾아야겠다는 의지가 가장 컸고, 다음으로 이익 증대에 대한 확신이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라고 말했다.

중국·인도의 수요 많아 국내 정유업체들 호황 누릴 듯

▲ 삼성토탈 대산 공장. ⓒ삼성토탈 제공

실제로 지난해까지 금융 위기 여파 때문에 정유업은 적자였다. 그러던 것이 올해 1분기에 바닥을 찍고 흑자로 돌아서면서 영업이익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유영국 애널리스트는 “아시아의 주요 성장국인 중국과 인도의 수요가 상당히 많다. 생산량의 60%를 수출하고 있는 국내 정유업체들은 앞으로 호황을 누릴 것이다. 현대오일뱅크의 최대 약점인 고도화 설비 부족 문제를 해결하면 현대중공업은 5년 뒤에 현대오일뱅크 인수 가격을 모두 회수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예상했다. 현대오일뱅크는 지난해부터 2조5천억원을 투자해 고도화 시설 설비를 늘리고 있다. 내년 3월 완공을 목표로 90% 공정률을 보이고 있다. 고민수 현대오일뱅크 홍보차장은 “완공되고 나면 연간 영업이익이 3천억~4천억원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현대중공업의 인수 결정이 난 후부터 현대중공업과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사업 분야를 검토하고 있다. 종합 에너지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마케팅 강화는 물론 사업 영역 확대에 주력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정유업계의 경쟁은 날로 치열해지고 있지만 정작 소비자들에게 돌아올 혜택은 많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소비자가 대상인 주유소 시장보다 산업용 시장에서 경쟁이 붙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휘발유·등유·경유 등 정유 부문 순이익률은 2%로 가격 경쟁의 여지가 없다. 2%의 순이익을 포기하더라도 소비자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몇십 원에 불과하다. 오세진 SK에너지 홍보과장은 “마케팅을 강화한다는 차원에서 서비스 경쟁은 있을 수 있지만, 가격 경쟁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익이 많이 남는 자원 개발이나 신재생 에너지 개발 등에서 치열한 경쟁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된다”라고 말했다.

SK에너지는 영업이익의 절반을 비정유 사업에서 올릴 정도로 사업 방향을 많이 돌렸다. 특히 자원 개발은 SK에너지 전체 영업이익에서 30%를 차지할 정도로 수익성이 크다. SK에너지는 자원 개발과 2차 전지를 비롯한 신재생 에너지 개발에 주력한다는 계획이다. 내년에는 화학 사업과 석유 사업은 모두 자회사로 분사시키고, SK에너지는 지주회사로 남겠다는 큰 그림을 그려놓은 상태이다.

현대오일뱅크가 꼴찌의 반란을 일으킬지, 삼성토탈이 정유업계의 새로운 경쟁자로 떠오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정유업계의 판도가 요동치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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