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만해서 신인 감독 앞세웠을까
  • 김진령 (jy@sisapress.com)
  • 승인 2010.09.27 17:1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올해 한국 영화 개봉작에 ‘낯선’ 이름 많이 올라…제작·투자사의 입김 때문이라는 비판 나와

올해 한국 영화의 흥행 성적표를 보면 낯선 이름의 감독들이 눈에 많이 띈다. 국산 영화 상반기 최고 흥행작으로 5백46만명을 동원한 <의형제>의 장훈 감독, 3백만명을 동원한 <하모니>의 강대규 감독, <의형제>를 넘어 올해 국산 영화 중 최대 히트작이 된 <아저씨>의 이정범 감독,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의 장철수 감독의 이름은 영화팬들에게도 친숙하지 않다. 올 하반기 기대작인 강동원·고수 주연의 <초능력자>도 신인 감독 김민석의 데뷔작이고, 내년 상반기 기대작인 <써니>(강형철 감독)도 아직은 <과속 스캔들> 감독의 작품이라고 설명해야 할 정도이다.

 이들을 ‘공통적으로 묶을 수 있는 작품 요소나 경향성은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하지만 이들이 40대 안팎의 나이이고 데뷔작이나 두 번째 작품으로 홈런을 쳤다는 점, 아직은 박찬욱이나 김지운 또는 봉준호 감독 같은 개인 브랜드를 형성할 만큼 지명도가 높지 않다는 점 등을 공통점으로 들 수 있다.

때문에 영화판에 작가주의는 멸종되고 제작·투자사의 입김이 큰 할리우드 시스템이 자리 잡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흥행작을 남긴 중견 감독들은 도태되고 신인급 감독으로 물갈이 된 이유가 제작사와 투자사에서 의도적으로 다루기 만만한(?) 신인급 감독만 선호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아저씨>를 통해 올해 최대의 흥행 감독으로 자리매김한 이정범 감독은 다른 견해를 밝혔다. 지난 2006년에 내놓은 그의  데뷔작 <열혈남아>는 흥행에서 완전히 실패했다. 하지만 <열혈남아>의 작품적인 완성도는 그에게 두 번째 기회를 안겨주었다. 이감독은 “시나리오가 제일 좋아야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배우 캐스팅도 좋아야 한다. 투자사는 상업적인 성공을 염두에 두어야 하기에 제작자 못지않게 불안해한다. 투자사가 다루기 쉽고 몸값이 싸기 때문에 신인 감독을 선호한다고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라고 밝혔다. 이감독 역시 원빈이라는 스타를 캐스팅하는 데 성공했지만 영화는 18세 관람가로 투자사가 선호하는 등급은 아니었다. 그는 “만약 제작사가 나를 믿지 못하고 15세 관람가 영화를 고집했더라면 지금 같은 느낌의 <아저씨>는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 ⓒ영화사 홍 제공

어려워진 시장 상황이라 감독 역량만으로는 영화 못 만들어

독립영화 시스템 안에서 <살인의 강>이라는 장편영화 데뷔작을 완성하고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김대현 감독은 신인 감독이 넘쳐나는 최근의 상황에 대해 좀 더 비관적이다. 현재의 상황이 “박찬욱이나 봉준호 감독을 빼고는 자기 색깔이 짙은 작품에 투자받기는 불가능하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감독으로서 색깔이 분명한 홍상수 감독의 경우 최근작 <옥희의 영화>를 실제작비 5천만원 안팎에서 만들었다. <살인의 강> 역시 뮤지컬계의 스타인 신성록과 김다현을 캐스팅했지만 실제작비는 1억원에 불과했고, 완성에서 상영까지 1년여의 긴 기다림을 감내해야 했다.

최근 재개봉관이나 DVD 등 2차 부가 판권 시장이 완전히 궤멸되면서 대규모 투자-대규모 개봉-대박 흥행이라는 한 가지 수익 모델로 초점이 모아지고 있는 흐름이다. 영화 투자사들이 예산을 집행할 때 영화의 성공에 대한 ‘증거’를 요구하면서 감독이 누구냐는 것 이상으로 스타 캐스팅과 시나리오에 집착하는 경향성을 나타내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신인 감독들에게 영화판의 문이 활짝 열린 것일까? 이정범 감독이나 김대현 감독은 이구동성으로 “요즘 데뷔작 찍기가 과거보다 어렵다”라고 입을 모았다.

IT 버블이 붕괴하면서 영화가 새로운 투자 대안으로 떠올라 투자가 몰리던 2000년대 초반 상황과 비교하면 제작 편수나 정교해진 리스크 관리 등으로 인해 기회를 잡기가 더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 ⓒ스폰지 제공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일상에서 얼마든지 마주칠 수 있는 일들을 낯설게 다룸으로써 새로운 감흥을 이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영화는 매 작품이 흥미로운, 그리고 (설령 이야기 자체가 비극적이거나 지지부진해서 피로해 보일지라도 결과적으로는) 유쾌한 ‘실험’이다. 그의 13번째 작품 <옥희의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감독이자 시간강사인 남진구의 하루를 담은 ‘주문을 외운 날’, 영화과 학생 진구와 옥희 그리고 송교수가 만드는 삼각관계를 담은 ‘키스왕’, 폭설로 대량 지각 사태가 벌어진 날 아침 시간강사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결심한 송교수와 지각한 두 학생(옥희·진구)이 나누는 솔직한 이야기를 담은 ‘폭설 후’, 자신이 사귀었던 젊은 남자(진구)와 나이 든 남자(송교수)에 대한 기억을 비교 반추하는 ‘옥희의 영화’를 묶은 <옥희의 영화>는 유기적이면서도 독립적인 옴니버스 영화이다. 

영화는 배우, 캐릭터의 이름, 배경이 되는 장소, 주요한 사건 등을 반복해 보여주지만 그 모든 것이 동일하다는 확신은 주지 않는다. 파란 화면 위에 갈겨쓴 글씨로 채워진 크레디트, 이야기 사이를 잇는 <위풍당당 행진곡>의 선율조차도 매번 반복되지만 또 매번 변주됨으로써 동일성의 확신을 지우는 동시에 네 개의 이야기를 동기화하는 역할을 한다. 

감독은 이러한 반복과 변주를 통해 지지부진한 일상에 낯선 생동감을 불어넣고 그 사이를 비틀린 유머와 씁쓸한 여운, 직관적 냉소 그리고 헛헛한 즐거움으로 채웠다. 같지만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들의 연기도 똑 떨어진다. 덕분에 관객이 얻어갈 감흥의 결은 홍감독의 어떤 전작보다 풍성하다.

첫 번째 단편 ‘주문을 외운 날’에서 진구는 관객을 향해 말한다. “제 영화가 살아 있는 물건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만일 그것이 홍상수 감독의 바람이라면, 그 바람은 온전히 실현된 것 같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