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길에 남은 ‘열강’의 옛 그림자
  • 이순우 |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
  • 승인 2010.10.04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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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개화기에 각국 공사관 들어찼던 거리, 을사조약 여파로 공사관 폐쇄되면서 그 흔적만 전해져

근대 개항기 이후 근대사의 굴곡이 가장 크게 집약된 상징적인 지역을 하나만 지목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단연 서울 중구 정동일 것이다. 일제의 무자비한 침탈이 이어지는 가운데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는 비극적인 장면이 연출된 곳이 이 지역이었고,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고자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해 자주 독립의 의지를 한껏 표출한 공간 역시 이곳이었다.

정동이라고 하면 으레 ‘덕수궁’부터 떠올리지만, 근대 개화기 이후 이곳은 서양인들의 공간이었다는 점 또한 결코 빼놓을 수 없다. 대개는 기독교 선교사들의 근거지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이곳에 처음 서양인들이 정착한 단초는 서구 열강의 ‘각국 공사관(各國 公使館)’이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 선 나라는 바로 미국이었다.

▲ 1885년에 세워진 당시 러시아 공사관. ⓒ이순우(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강화도조약 이후 대한제국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와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한 국가는 일본(1876년), 미국(1882년), 영국(1883년), 독일(1883년), 이탈리아(1884년), 러시아(1884년), 프랑스(1886년), 오스트리아(1892년), 청국(1899년), 벨기에(1901년), 덴마크(1902년) 등 11개국에 이른다. 이 가운데 자국의 공사관 또는 영사관을 개설한 나라는 모두 아홉 나라이며, 별도로 공관을 개설하지 않았던 나라는 오스트리아와 덴마크 두 나라였다.

1883년 5월 미국 공사관의 개설은 그 이듬해부터 서울로 본격 진입한 외국인 선교사들의 정동 지역 정착과 더불어 이곳이 하나의 거대한 서양인촌(西洋人村)으로 변모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정동 10번지’에 자리한 미국 공사관은 처음부터 줄곧 한 곳에만 머물렀던 사례에 속하며, 지금도 이곳은 미국대사관저로 사용되고 있다.

미국 공사관은 자국의 외교 공관을 서양식으로 신축했던 여타의 나라들과는 달리 처음 구입했던 ‘한옥’을 그대로 사용했는데, 이에 대해 의료 선교사이자 미국 공사로 활동했던 호레이스 알렌은 그 자신의 체험을 이렇게 정리했다.

“다른 열강들은 각기 조선에서 자기들의 대표자를 수용하기 위해 미국의 공사관보다 좋은 건물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들은 한때 조선 고관의 집이었던 이상한 모양의 아름다운 방갈로를 계속해서 사용하였다. …  하지만 공사관 건물은 다른 나라가 세운 거대한 구조물에 비교하면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초라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외교적 대표권의 행사가 종지부를 찍고, 그 멋있던 공사관 건물들 중의 하나가 공사의 철수와 동시에 매각되고 보니 우리가 새 건물을 짓지 않은 것은 잘한 일로 간주될 만했다.”

▲ 서울 정동에 일부만 남아 사적 제253호로 보존되고 있는 러시아 공사관. ⓒ이순우(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일본 상인들이 ‘공사관 거리’ 명칭 붙여

마지막 구절은 1905년 이른바 ‘을사조약’으로 우리나라의 외교권이 일제에게 강탈된 이후의 상황을 말한다. 일찍이 새 건물을 짓지 않았던 것이 다행한 일이라는 식의 표현은 자못 거슬리는 부분이 아닐 수 없지만, 냉혹한 국제 외교의 한 단면을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아무튼 미국 공사관(1883년, 정동 10번지)·영국 공사관(1884년, 정동 4번지)·러시아 공사관(1885년, 정동 15번지)이 그 선두에 서고, 다른 나라들도 정동 안쪽이나 정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장소에 자국의 외교 공관을 잇달아 개설함에 따라 정동 일대는 그야말로 각국 외교의 중심지로 변모했다. 여기에 더해 다른 지역에다 첫 공사관을 개설했던 프랑스 공사관(1889년, 정동 28번지)과 독일 영사관(1891년, 서소문동 38번지)의 경우에도 이내 정동 쪽으로 합류해 이러한 추세는 더욱 가속화했다.

이에 따라 미국 공사관과 영국 총영사관이 정동의 동쪽과 서쪽에 나란히 자리하고, 그 북쪽으로는 러시아 공사관과 프랑스 공사관이, 다시 그 남쪽으로는 독일 영사관이 포진하는 형태가 만들어졌다. 이들보다는 많이 늦었지만 벨기에 영사관(1901년, 정동 16번지)도 처음에 단기간이나마 정동에 터전을 잡은 적이 있었고, 이탈리아 영사관(1902년, 서소문동 41번지)도 한동안 바로 이웃하는 서소문길에 자리한 바도 있었다.

그렇다면 그 당시 서양인들은 ‘정동(貞洞)’이라는 곳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이에 대한 용례를 살펴보면 대개 ‘정동(Chong Dong)’이라는 용어가 자연스레 그대로 사용된 것으로 확인되지만, 이 시기에 우리나라를 다녀간 서양인들의 저작물이나 탐방 안내서 등에는 이것보다 ‘공사관 거리’라는 용어가 더욱 흔하게 채택된 것이 눈에 띈다. 그리고 이것 말고도 ‘공사관 구역’ ‘유럽인 지구’ 또는 ‘유럽인 거류지’로 표시한 자료들도 많았다.

그런데 <더 코리안 리포지토리> 1895년 4월호에는 흥미롭게도 이 ‘공사관 거리’라는 표현의 유래에 대한 설명이 남아 있다. “서대문에서 ‘가구 거리(Furniture Street)’로 이어지는 거리는 매우 중요한 통행로이다.… 이 거리에는 어떠한 이름이 부여되어야 할까? 여러 해 전에 워싱턴 애비뉴(Washington Avenue)와 빅토리안 로드(Victorian Road)라는 것이 제안된 바 있었다. 최근에 미셔너리 애비뉴(Missionary Avenue, 선교사 거리)도 제시되었으나, 그 사이에 일본 상인들은 그들이 ‘공사관 거리(Legation Street)’에서 개업 중이라고 광고를 하고 있다.”

 

▲ 강화도조약 이후 대한제국이 막을 내릴 때까지 서울 정동 주변에 각국 공사관이 들어섰다. 왼쪽부터 일본·미국·프랑스·영국·러시아 공사관. ⓒ이순우(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이렇게 보면 결국 ‘공사관 거리’라는 이름을 작명한 주체는 서양인들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일본인 상인들이 되는 셈이다. 하기야 정동이 제 아무리 ‘서양인촌’이었다고 할지라도, 그 내막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온통 서양인 천지가 아니라 거기에 가게를 열고 땅도 사고 빌딩도 짓고 한 일본인들이 무수하게 섞여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을사조약의 여파로 각국 공사관이 폐쇄되면서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원래의 자리에 그대로 영사관을 재개설한 경우도 있었지만, 여타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지거나 아예 외교 공관 자체를 폐쇄한 경우도 없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들 각국 공사관이 설치되었던 원래 자리에는 현재 어떠한 흔적이 남아 있을까? 미국과 영국의 경우에는 여전히 그 자리를 대사관 또는 대사관저로 사용하고 있지만, 러시아 공사관(사적 제253호)은 한국전쟁 때 파괴되어 3층 전망탑만 겨우 남겨진 상태이다. 더구나 ‘회현동 2가 78번지’에 있던 벨기에 영사관(사적 제254호)은 아예 건물이 통째로 ‘사당동 네거리’ 쪽으로 옮겨진 지 오래다. 또한 프랑스 공사관이 있던 자리(창덕여중 구내)에는 정초석 하나만 간신히 남아 있을 뿐이고, 건물이 완전히 사라진 독일 영사관이나 이탈리아 공사관 자리는 그 위치조차 제대로 기억하는 이가 드물다.

근대 개항기 이후 크건 작건 우리나라 근대사의 전개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던 또 다른 주체가 서구 열강이었기에, 그 흔적을 보존하거나 기억하는 일도 결코 가벼이 여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각국 공사관이 있던 자리에 표지석 하나 정도는 남겨두는 과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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