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 공룡’ 새 주인 보인다
  • 이철현 기자 (lee@sisapress.com)
  • 승인 2010.10.04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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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그룹·현대그룹, 현대건설 인수전 돌입…자금 규모·자금 조달 방법 등에서 현대차가 우세

‘현대그룹 모태이자 순자산 가치 10조원 기업의 주인 찾기’라는 뼈대에 형제간 다툼, 미망인의 눈물겨운 호소, 창업주 적통 승계 같은 감상적 요소가 덧대어지면서, 현대건설 인수전은 국내 인수·합병(M&A) 역사상 최고의 흥행 스토리를 만들고 있다. 미국 경제 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 9월27일 현대건설 인수전을 ‘흥행 요소를 두루 갖춘 TV 드라마’에 비유했다. 드라마 주인공은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다.  

▲ 서울 종로구 계동에 있는 현대건설 본사. ⓒ시사저널 임준선

 현대건설 채권단이 지난 9월24일 보유 지분 34.88%를 매각하겠다고 공고하면서 M&A 드라마는 크랭크인(촬영 개시)했다. 첫 등장인물은 현대차그룹이다. 현대차그룹은 지난 9월27일 ‘미래 성장 동력 사업을 강화하고 시너지를 창출하기 위해 현대건설 매각 입찰에 참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대차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현대건설 인수와 관련해 결정된 것이 없다’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김영진 한국M&A연구소 소장은 “현대차그룹이 현대건설 인수와 관련해 입장이 바뀌는 과정을 살펴보면, M&A 전문가가 마련한 M&A 시나리오에 의거해 움직이는 것으로 보인다. 매각 입찰에 참여하기 전까지는 인수 의향을 일관되게 부인하는 것이 인수·합병에 나서는 기업의 기본 원칙이다”라고 말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 2~3년 동안 현대건설 인수를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그룹으로부터 용역을 받아 현대건설 인수 시나리오 작성에 참여한 M&A 전문가 김 아무개씨는 “현대차그룹은 현대건설 인수에 따른 갖가지 변수를 검토하고 인수 방식과 절차를 담은 시나리오를 마련했다”라고 말했다.

▲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시사저널자료

현대건설 인수 시나리오에서 가장 주목받는 회사는 현대엠코이다. 현대엠코는 현대차그룹 소속 건설업체이다. 지난 2002년 건설과 토목 사업 면허를 취득한 이래 현대건설의 핵심 인재를 꾸준히 스카우트했다. M&A 전문가 김씨는 “현대엠코가 현대건설 핵심 인력을 꾸준히 영입한 것은 현대건설 인수를 감안한 조처이다. 이 역시 인수 시나리오에 따른 것이다”라고 말했다. 현대차그룹 내부에는 M&A팀이 비공식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M&A 팀은 인수 전략의 틀을 만들고 실무는 외부 기관에 용역을 주어 맡겼다. 이 팀에는 현대건설 출신 임직원이 상당수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M&A 전문가 김씨는 “그룹 내부 M&A팀이 뼈대를 만들고 회계 실사는 삼일회계법인, 해외 자금 조달은 골드만삭스, 법률 검토는 태평양이나 세종에게 맡기는 식으로 일이 진행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현대건설에서 영입한 현대엠코 임직원은 현대건설 인수에 성공할 경우 경영까지 맡을 것으로 점쳐진다. 현대건설의 내부 사정을 훤히 알고 있는 인사가 경영에 참여하는 만큼 인수에 따른 시행착오를 줄이고 그룹 소속사로 빠르게 안정될 것으로 기대된다. 현대건설이 해외 플랜트 사업을 맡고 현대엠코가 건축과 토목을 맡는 방식으로 결합하면 상당한 시너지 효과를 거둘 것으로 예상된다. 
 

현대차그룹 소속 건설사 현대엠코와 현대건설의 합병 가능성에 주목

현대엠코는 궁극적으로 현대건설과 합병하는 수순을 밟게 될 것으로 보인다. 현대건설이 올해 새로 수주한 내역을 살펴보면, 해외 시장 비중이 59%나 된다. 건축과 주택 부문은 26%이다. 해외 수주 가운데 플랜트·전기 부문의 비중이 69.4%로 압도적으로 높다. 건축과 토목은 각각 15.7%와 14.9%에 불과했다. 송흥익 대우증권 애널리스트는 지난 9월28일 기업 분석 보고서에서 “현대건설은 정유·석유화학보다 발전·원자력 위주로 수주했고, 앞으로도 발전·원자력 플랜트 중심으로 수주가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라고 밝혔다. 이와 달리 현대엠코는 그룹 주요 계열사로부터 공사를 수주했다. 국내외 자동차 공장을 짓거나 연구소와 기숙사를 수주받아 성장했다. 그룹이 ‘특혜 시비’까지 감수하면서 지원한 덕에 현대엠코는 지난해 도급 순위 20위 건설사로 성장했다. 하지만 지난 3년 동안 매출과 영입이익은 큰 폭으로 줄어들고 있다. 그룹 주요 계열사들의 지원이 없으면 지속 가능성조차 위협받는다.

현대차그룹은 지난 9월27일 현대건설 인수 의향을 밝히는 보도자료에서 ‘현대건설을 인수할 경우 현대엠코의 합병은 검토하지 않고 있다’라고 밝혔다. 현대차그룹이 합병을 부인하고 있으나  M&A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외교적 수사’에 불과한 발언으로 취급되고 있다. 김영진 한국M&A연구소 소장은 “현대건설과 현대엠코를 합병하지 않겠다는 말은 얼마 전까지 현대차그룹이 현대건설 인수를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언급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다만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달리 현대엠코와 현대건설 합병이 현대차그룹의 경영권 승계와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양 사 합병이 현대엠코 지분 25.06%를 보유한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에게 시세 차익을 줄 수는 있으나 그것이 경영권 승계와 연결될 고리를 찾기 어렵다는 얘기이다. M&A 전문가 김씨는 “현대건설과 현대엠코의 합병은 정의선 부회장에 의한 그룹 경영권 승계와는 직접적인 상관성이 없다”라고 말했다. 
 

▲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시사저널자료

채권단, 자금 조달 방법도 주요 평가 기준으로 올려 현대그룹에 ‘치명타’

현대건설은 시가총액이 7조원에 이르고 순자산 가치가 10조5천억원에 이르는 국내 1위 건설업체이다. 따라서 현대건설과 현대엠코가 합병하더라도 합병 주체는 현대건설이 된다. 주식 스와프 방식으로 합병이 되더라도 양 사 시세와 가치를 종합적으로 판단해 주식 교환 비율이 결정될 것이다. 그런 만큼 정의선 부회장이 현대건설 대주주로 등장할 수는 있다. 하지만 현대건설 대주주가 되는 것과 현대차그룹 주력사인 현대차·현대모비스·기아차 지분을 늘리는 것 사이에 연결 고리를 찾기는 어렵다. 

현대차그룹이 내부 자금으로 현대건설을 독자 인수하겠다고 밝힌 것도 인수 시나리오에 따른 조처로 해석된다. 채권단은 지난 9월29일 자금력 부족에 시름하는 현대그룹에게 치명타와 같은 입찰 평가 기준을 흘렸다. 채권단은 ‘인수 가격과 함께 자금 조달 방법도 중요 평가 기준이 되므로 무리하게 차입을 시도하는 인수 후보자는 감점 처리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이 대우건설을 인수하다 유동성 위기를 겪은 사례를 감안한 조처이다. 그러다 보니 현대그룹 내부에서도 현대차그룹에 맞서 현대건설 인수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절대적으로 우세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기정 신한금융투자 애널리스트는 “현대건설 채권이 보유한 지분 34.88%를 인수하는 데 소요되는 자금은 경영권 프리미엄 30%를 가정하면 4조1천억원에 이른다”라고 분석했다. 박영호 대우증권 애널리스트는 “2010년 상반기 말 본사 기준 현금성 자산은 현대차 7조5천억원, 현대모비스 1조6천억원, 기아차 1조9천억원으로 총 10조9천억원에 이른다. 4조원이 넘는 예상 인수 비용을 충분히 상회하고 있어 자동차그룹 본원적 사업 투자 여력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이와 달리 현대차그룹과 인수 경쟁을 벌이는 현대그룹은 동원 가능한 여유 자금이 1조5천억원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운영 자금까지 감안하면 최소 3조원 이상을 외부에서 끌어들여야 한다. 현대그룹은 고 현영원 현대상선 회장 시절부터 현씨 일가와 친분이 깊은 유럽 금융권과 접촉하고 있다. 중동 지역 전략적 투자자까지 만나 유치를 조율하고 있다. 김영진 소장은 “현대그룹이 주 채권은행과 껄끄러운 관계라는 사실을 외국 금융 기관도 알고 있어 외국 자금을 유치하기는커녕 컨소시엄을 구성하기도 쉽지 않을 듯하다”라고 말했다.  

 현대그룹의 현정은 회장이 기대는 것은 여론이다.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회장과 그 승계자 정몽헌 회장이 나오는 TV 광고까지 방영하면서 현대건설 인수전은 이제 선전전 단계에 들어섰다. 자금 규모나 조달 방법에서 앞선 현대차그룹에게는 선전전에서 설득력 있는 해명거리를 마련할 과제가 생겼다. ‘자동차 제조업체가 미래 성장 동력으로 건설업체를 인수하는 것이 타당한가?’라거나 ‘자동차 산업과 건설 업종 사이에 무슨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나?’라는 의문을 해소하는 일이 그것이다. 현대차그룹은 ‘친환경 발전소 건립부터 하이브리드와 전기 차량 충전소 건설까지 시너지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현재 M&A 전문가들 사이에는 “시너지 효과라는 현대차그룹의 합병논리가 설득력이 떨어진다”라는 견해도 있다. 당분간 현대그룹은 이 점을 공격하고 현대차그룹은 방어하는 모양으로 선전전이 펼쳐질 것으로 예상된다.

▲ 지난 2003년 정몽준 의원이 고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현대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분향을 한 뒤 걸어나가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과거 현대그룹의 옛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범현대가 오너가 나섰다. 현대차그룹 용역을 받아 현대건설 인수 시나리오 작성에 참여한 한 M&A 전문가는 “범현대가 기업 오너 사이에 (옛 현대그룹 계열사 인수와 관련해) 교통정리가 있던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범현대가의 기업 오너라면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정몽준 한나라당 의원(현대중공업 최대 주주), 정상영 KCC 명예회장을 일컫는다. 정몽구 회장은 현대그룹 창업주인 고 정주영 회장의 차남이고, 정몽준 회장은 6남이다. 정상영 명예회장은 정주영 회장의 넷째 동생이다.

세 사람은 지난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잃었던 옛 현대그룹 계열사를 하나씩 사들이고 있다. 현대중공업은 현대종합상사와 현대오일뱅크를 잇따라 인수했다. 현대중공업은 지난해 12월 현대종합상사를 인수한 데 이어 지난 9월 IPIC(아부다비 국영석유투자회사)와 법정 다툼까지 벌이면서 현대오일뱅크 경영권을 확보했다.

옛 현대그룹의 영광을 재현하려면 명분상 적자 기업인 현대그룹의 경영권을 인수해야 한다. 현대그룹 경영권 인수에 가장 먼저 나선 이는 정상영 KCC 명예회장이다. 정상영 명예회장은 지난 2003년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매집하면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지분 다툼을 벌였다. 2006년에는 현대중공업이 현대그룹 지주회사 격인 현대상선 지분을 매집해 최대 주주로 떠올랐다. 당시 현정은 회장에 대한 동정 여론에 밀려 경영권 탈취에는 실패했다.

현대차그룹이 현대건설을 인수하면 현대상선 지분은 현대중공업에게 넘길 듯하다. 조선과 해운 업종의 결합이라는 그럴듯한 명분도 있다. 현대건설이 보유한 현대상선 지분만 확보하면, 현대중공업은 현대그룹 경영권까지 사정권 안에 둘 수 있다. 국내 인수·합병(M&A) 전문가들 사이에서 ‘현대건설 인수전이 더 큰 인수·합병(M&A) 건의 전초전’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현대그룹은 지난 9월28일 우호 세력인 아일랜드 투자자 넥스젠캐피탈에게 현대상선 자사주 0.6%를 매입하게 했다. 의결권이 없는 자사주를 우호 세력에게 넘기고 지분율을 0.52%포인트 높였다. 현대그룹은 이로써 현대상선 지분을 40.76%까지 늘렸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넥스젠캐피탈은 현대상선 주식 1백80만주(1.8%)를 추가 매입하기로 지난 9월17일 현대엘리베이터와 계약을 체결했다. 주가가 떨어져 손실이 발생하면 현대엘리베이터가 손실분을 떠안되 시세 차익이 발생하면 현대엘리베이터(80%)와 넥스젠(20%)이 나눈다.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해 손실 위험은 현대엘리베이터가 떠안고 이익은 나누는 불평등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그렇다고 경영권 위기가 해소된 것은 아니다. 현대엘리베이터는 지난 2006년 10월 넥스젠과 비슷한 계약을 체결했다. 넥스젠은 당시 현대상선 주식 6백만주를 매입했다. 내년 상반기 만기가 돌아온다. 넥스젠이 만기를 맞아 주식을 팔면 현대그룹 지분율은 떨어진다. 자금력이 풍부한 현대중공업그룹이 공개 시장에서 매집할 수 있다. 현대건설 인수전이 마무리되면 뒤이어 현대상선 경영권 다툼이 예상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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