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 승계’가 운명 가른다
  • 고유환 |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
  • 승인 2010.10.04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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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시대’ 남북 관계와 동북아 질서 / 일단은‘부자 정권’ 체제…핵문제 해결 안 되면 불안정 계속

이번 북한 조선로동당 당대표자회의 가장 큰 특징은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이 악화한 후 다시 부각된 급변 사태와 붕괴 가능성에 맞서 후계를 공식화하되 급격한 권력의 이동을 막으려는 과도적 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후계를 공식화함으로써 급변사태론을 잠재우는 등 급한 불은 끌 수 있겠지만, 경제난 해결 등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김정일의 삼남 김정은 후계 체제가 정당성을 확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번 당대표자회가 하루 만에 끝난 것으로 볼 때 지도부 선출과 당 규약 개정 이외에 새로운 정책 노선이 논의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북한 지도부가 더 이상 정책 전환을 미루기는 어려울 것이다. 김정일 시대는 대량살상무기(WMD) 중심의 군사력 증강 이외에는 사실상 총체적 실패라고 할 수 있다. 김정일 정권의 실패는 후계 구축에 난관을 조성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김정은 중심의 새로운 파워 엘리트층은 인민 생활 향상과 관련한 정책 전환을 조심스럽게 모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정은이 스위스에서 유학한 경험을 가지고 있고, 개방 마인드가 있는 준비된 혁명 3~4세대 엘리트들이 김정은 체제를 떠받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일본·한국 등 서방과의 적대 관계를 해소한다면 새로운 정책 노선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 2009년 8월23일 이명박 대통령이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조문단 대표로 방문한 김기남 당시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를 만나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도 ‘북한 새 지도부’ 첫 언급…권력 세습 인정하는 분위기

김정은 후계 공식화 이후 동북아 질서에도 다소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다. 급변사태론의 설득력이 떨어지고 북한에 대한 개입을 확대하려는 주변 국가들의 움직임이 본격화할 가능성이 크다. 북한의 후계 공식화 이후 우리 정부도 남북 관계 진전 여부를 두고 고민에 빠질 것이다.

김정은 후계 지명 이후 북한은 ‘김정일-김정은 공동 정권’ 체제로 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김정일 정권이 성공해야 김정은 정권으로의 이양이 순탄해진다. 김정일 정권이 순항하지 못한 데는 김일성 시대에 한·미·일 등 서방과의 적대 관계를 해소하지 못한 것도 한 원인이다. 김일성 주석이 사망 직전에 추진했던 서방과의 대타협 전략이 성공했다면 북한의 개혁·개방은 촉진되었을 것이다. 김정일 정권은 김일성 사후 공식화되었음에도 유훈 통치를 지속하면서 새로운 정책 노선을 제시하지 못했다. 김정일 정권은 ‘선군 정치’를 기본 통치 방식으로 내세우고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에 주력함으로써 미·일 등 서방과의 적대 관계를 해소하는 데에 실패했다. 김정일 정권이 ‘우리 민족끼리’를 내세우고 두 차례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하는 등 서울을 통해서 워싱턴, 도쿄로 가고자 했던 전략 역시 핵문제에 가로막혀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김정은 시대를 제대로 열 수 있느냐의 관건은 역시 핵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핵무기를 고수하면서 정권의 효율성을 발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효율성을 위해 핵을 포기하지도 않을 것이다. 북한은 북미 적대 관계 해소 등 평화협정을 통한 안전이 담보되지 않는 한 핵을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후계를 공식화한 직후인 9월29일 유엔총회에 참석 중이던 박길연 북한 외무성 부상은 “미국 핵 항공모함이 우리 바다 주변을 항해하는 한, 우리의 핵 억지력은 결코 포기될 수 없으며, 오히려 강화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으면 관계 정상화는 없다고 말한다. 이른바 ‘출구론’과 ‘입구론’이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2005년 9·19 공동성명과 2007년 2·13합의 등을 통해서 ‘동시 행동 원칙’에 합의했지만, 상호 불신으로 북핵 문제는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전략적 인내’, 한국은 ‘기다리는 전략’으로 일관하면서 북한이 굴복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미국은 북한의 권력 승계가 공식화하기 시작한 지금, 남북 관계 진전과 북한의 비핵화 합의 이행이 가장 중요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커트 캠벨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9월29일 “현재의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이 한국과 좀 더 미래를 향한 관계를 다시 만들기 시작하고, 도발적인 천안함 침몰 사건으로 중단된 대화를 재개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캠벨 차관보는 이어 “그런 뒤에 다자 외교와 6자회담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북한이 비핵화를 위해 2005년에 한 매우 분명한 약속을 이 (북한의) 새로운 지도부 또는 북한 내 어떤 체제(this new leadership or some structure in North Korea)가 받아들인다는 매우 명확한 신호를 우리가 볼 필요가 있다”라고 강조했다. 미국이 북한의 김정은 후계를 공식화한 이후 ‘새 지도부’라는 언급을 한 것은 처음으로, 미국 정부도 북한의 권력 승계 절차가 시작된 것을 인정한 셈이다. 

김일성 시대에 해결하지 못한 핵문제를 김정일 시대를 거쳐 김정은 시대로까지 물려준다면 김정은 정권이 효율성을 발휘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부 자원이 고갈된 북한으로서는 대외 관계 확장을 통해서 생존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당장은 전통적인 우방인 중국에 의존하면서 근근이 버텨내기를 할 수 있겠지만, 경제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당 규약에서 ‘공산주의 사회 건설’ 삭제된 점에 주목

이 대목에서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이번 당대표자회에서 개정한 당 규약의 ‘최종 목적’에서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삭제한 것이다. 지난해 4월 최고인민회의 제12기 1차 회의 때 개정한 헌법에서 공산주의를 모두 삭제한 데 이어 당 규약에서도 이를 삭제한 것은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실현 불가능한 현실을 반영한 조치라고 볼 수 있다. 그동안 당 규약에 명시된 ‘전 한반도의 공산화’ 목표 때문에 남북 화해에 진정성을 찾기 어렵다는 주장이 많았는데, 이번에 당 규약 서문을 당초의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와 공산주의 사회 건설’에서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와 인민 대중의 완전한 자주성 실현’으로 바꿈으로써 논란을 줄일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사상 이론적 조정 없이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남북 관계 진전이다. 북한은 혁명과 건설의 기본 단위를 나라와 민족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동안 북한은 남북 관계를 풀 때 ‘우리 민족끼리 이념’에 따라 협력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펴왔다. 이번에 북한이 당 규약을 개정함으로써 남북 관계 진전의 걸림돌 하나를 치워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현재까지 남북 관계가 경색되고 있지만, 후계 구축 과정에서 남북 관계가 진전될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김정일-김정은 공동 정권 체제에서 권력의 급격한 이동, 권력 투쟁 등에 따른 무리수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 정부도 더 이상 급변사태론에 기대어 시간을 허비하지 말아야 한다. 미국이 북한의 ‘새 지도부’를 언급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김정은 후계 체제가 공식화되었다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후계 인정 여부를 떠나 북한의 후계 공식화는 한반도를 둘러싼 중요한 새 ‘행위자’가 등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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