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 시장도 ‘창작’하는 미술가들
  • 파리│최정민 통신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0.10.11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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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이유 궁전의 무라카미 다케시 전 주목…명품 디자인뿐 아니라 대중적 신상품에 참여하기도

 

루이 14세로 대표되는 절대 왕정의 상징이자 프랑스의 자존심인 베르사이유 궁전, 그리고 2백50만평의 부지에 프랑스식 정원 양식을 완성한 것으로 유명한 르노트르가 설계한 걸작인 베르사이유 정원. 이 고풍스런 궁전과 정원에 난데없이 일본 망가(Manga; 만화)의 주인공들이 들이닥쳤다. 바로 일본 현대미술가인 무라카미 다케시가 연 베르사이유 특별전이다.

무라카미 다케시의 트레이드마크인 ‘웃는 꽃’ 연작에서 미소녀 조각상, 5m에 이르는 황금 부처상까지 베르사이유 곳곳에 망가 작품들이 들어섰다. 이런 파격이 베르사이유에서 처음은 아니다. 2년 전 제프 쿤스의 팝 아트풍(風)의 작품이 베르사이유에 들어섰을 때에도 찬반양론이 들끓었었다. 화려한 컬러의 고무 풍선 강아지에서 마이클 잭슨의 동상으로 대표되는 파격적인 작품이 베르사이유에 입성한 것은 센세이션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분위기에 대해 “루이 14세가 지금 살아 있다면 이런 작품을 수집하지 않았겠는가?”라고 배짱 좋게 받아친 쿤스 앞에 모두 할 말을 잃기도 했다.

그러나 올해 무라카미의 전시까지 이어지자 여론과 관객의 반응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쿤스는 팝 아트이기는 했지만 서양 문화라는 동질감과 함께 팝 아트의 상징인 엔디 워홀의 계승자로, 또 뉴욕으로 대표되는 현대미술의 선두 주자이자 뉴욕의 대표 작가라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었다. 무라카미는 2007년 미국 뉴욕의 초특급 갤러리인 가고시안에서 전시회를 연 적이 있어 국제적인 인지도는 있었지만, 망가라는 일본 문화는 아무래도 너무 파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다케시의 작품 가운데 외설적인 주제로 논란이 될 만한 것은 일치감치 전시 리스트에서 제외되었음에도 반대 여론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급기야 베르사이유 연회원 단체는 전시 철회 서명 운동을 벌여 6천여 명의 서명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전 문화부장관이자 베르사이유의 책임자인 쟝 쟈크 아야공의 입장은 완강했다.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지 말고 새로운 눈으로 보아주기 바란다”라며 철회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파격적인 소란은 어디에서 비롯한 것일까.

 

▲ 일본 팝아티스트 무라카미 다케시가 지난 9월부터 프랑스 파리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전시 중인 설치미술. ⓒ연합뉴스

작품을 투자 아닌 소비 대상으로 인식시켜

이미 베르사이유 궁전은 몇 해 전부터 현대미술가들을 초청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제프 쿤스, 쟈비에 베이안 등이 참여했다. 더군다나 이러한 특별 전시는 베르사이유만의 행보가 아니다. 파리의 주요 미술관들이 모두 이러한 프로그램을 진행해 오고 있다. 루브르 박물관은 현대 작가를 초청해 루브르 공간 한편에 전시를 하도록 한다. 이미 독일 작가 안셀름 키퍼가 다녀갔고, 2008년에는 연출가이자 미술가인 벨기에 작가 얀 파브르의 전시회가 열렸다. 현재는 현대 회화의 거장 싸이 톰블리의 작품이 이집트관 천정을 장식하고 있다. 그랑팔레 역시 ‘모뉴멘타’라는 이름으로 1년에 한 번씩 현대 작가의 전시를 주관한다. 4천2백㎡라는 거대한 공간답게 전시도 매머드급이다. 역시 독일 작가 안셀름 키퍼와 미국의 거장 리쳐드 세라 그리고 지난해에는 프랑스의 자존심 크리스티앙 볼탕스키가 초대되었다. 보통 3개월 동안 전시를 한다. 평균 관람객 수는 50만명 선이다. 올해 볼탕스키전의 경우 개관 36일 만에 15만명이 다녀가기도 했다. 메이저급 미술관들이 끊임없이 현대 작가를 초청하는 프로그램을 펼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대 미술 작가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예술가들이 시장을 주도하는 것은 미술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올해 베르사이유를 뒤흔들고 있는 무라카미는 이미 2003년 프랑스 명품 루이뷔통의 가방을 디자인하기도 했다. 한정 판매였으며, 일반 제품보다 높은 가격에 팔았다. 그를 이어 미국의 작가 리차드 프린스 또한 루이뷔통 가방을 디자인했으며, 그의 작품이 선보인 장소는 구겐하임 미술관이었다. 제프 쿤스는 올해 독일의 BMW 아트카 디자인을 발표했다. 지금까지 BMW는 총 17명의 예술가에게 자동차 디자인을 의뢰했는데 그 면면이 화려하다. 모빌로 유명한 알렉산더 칼더에서 프랭크 스텔라, 앤디 워홀까지 대가들만 참여해왔다. 초고가인 것은 당연하다. 뿐만 아니라 와인 명가인 샤토 무통 로칠드는 해마다 최고의 와인 라벨 디자인을 예술가들에게 의뢰한다. 피카소에서 샤갈, 칸딘스키, 쟝 콕도, 엔디 워홀까지 역대 참여 작가들은 거의 미술사 연보 수준이다.

그렇다고 현대 예술가들이 최고가 명품 시장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역발상도 이루어진다. 명품 가방의 대명사인 샤넬의 수장이자 세계 디자인계의 제왕인 캬를 라거펠트는 최근 자신의 모습이 실루엣으로 디자인된 라거펠트 콜라를 선보였다. 샤넬의 최고 럭셔리 이미지를 이용해 대중 소비 시장에 파고든 것이다. 샤넬의 매출이 줄어서가 아니다. 이미지 마케팅 전략에 따른 것이다. 샤넬은 올해만 52%의 판매 신장을 기록하고 있으며, 생산이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연말 물량을 공급하기 위해 최근 파리 매장은 1시간 일찍 문을 닫는다. 프랑스 패션계의 소냐 리키엘 또한 스웨덴 업체인 HM과 손잡고 신상품을 선보인다. 기성복 생산업체인 HM의 입장에서는 기업 이미지를 높이는 효과가 있으며, 고객들에게는 소냐 리키엘의 컬렉션을 구입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HM은 이미 캬를 라거펠트(2004년)와 폴 매카트니의 딸로 유명한 스타 디자이너 스텔라 매카트니(2005년) 그리고 지미 추(2009년)의 컬렉션을 선보인 바 있다.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이자 세계적인 작가였던 고 백남준은 1992년 예술의 의미와 예술가들의 역할을 묻는 철학자 김용옥의 질문에 “예술가들의 역할은 앞으로 폭력을 초래하지 않는 소비를 창출하는 일이다”라고 답한 바 있다. 지금까지 넘쳐나는 잉여를 전쟁이 해소해왔는데 전쟁이 없으면 예술가들이 필요 없는 소비를 창출하는 일을 담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예술가들이 지금까지는 자본과 반대의 입장을 걸어왔으나 이제는 신생 자본주의의 선봉장이 될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18년이 지난 지금 그의 예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뉴욕의 한 예술 컨설턴트는 “예술 작품이 투자 대상으로 인식되면서 생긴 변화는 시장 변화에 민감하다는 점이다”라고 말하며, “종전에는 4개월의 시차를 두고 작품 가격이 하락하거나 상승했지만 이제 시장보다 먼저 반응한다”라고 평했다. 경제 위기로 인해 현대 미술 시장은 분명히 위축되었다. 그러나 이제 예술은 투자 대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소비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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