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달도 놀랄 감쪽 ‘경호원 연기’
  • 김세희 기자 (luxmea@sisapress.com)
  • 승인 2010.10.11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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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근무한다며 속이고 거액 갈취한 30대 구속…경찰 소지품·대통령 표창장 등 준비 치밀

‘청와대 경호원’을 사칭한 희대의 사기꾼이 경찰에 붙잡혔다. 인천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지난 10월1일 청와대 근무 경찰을 사칭해 백화점 입점을 도와주겠다며 거액을 갈취한 주 아무개씨(36·남)를 상습 사기 혐의로 검거했다. 또 주씨에게 예금 계좌를 빌려준 양 아무개씨(27·여)를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주씨의 원래 꿈은 청와대 경호원이었다. 지난 2000년쯤에 군에서 전역한 주씨는 이때부터 경찰관 시험에 응시했다. 하지만 번번이 낙방했고, 4년간이나 시험을 보았지만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 청와대 경호원을 사칭해 백화점 미용실 입점을 미끼로 금품을 갈취해 오다 검거된 주 아무개씨에게서 압수한 문서와 총, 수갑 등의 증거물. ⓒ시사저널 박은숙

그는 그 후 경찰이 되겠다는 생각을 접고 개인 사업을 시작했다. 청바지 한 벌에 몇십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 전문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했다. 이 과정에서 주씨는 상당한 빚을 지게 된다. 처형의 돈을 빌려 쓰고, 제2 금융권에서 대출을 받고, 심지어 부인 명의로 대출을 받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주씨를 수사한 경찰 관계자는 “돈이 급해지니 피의자가 허황된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라고 전했다.

주씨가 피해자 이 아무개씨(50·남)를 만나게 된 것은 그가 인터넷 쇼핑몰 사업을 시작했을 때쯤인 2006~07년이었다.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은 아니었다. 쇼핑몰 사업을 하며 차량이 필요해 렌트카를 빌리러 갔던 주씨는 우연히 그곳에서 영업소를 운영하던 피해자 이씨를 만났다. 그들은 렌트카를 매개로 자주 왕래했고, 자연스럽게 친분을 쌓았다.

그러던 중 주씨는 이씨에게 “청와대 경호실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라는 말을 흘렸다. 그리고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주씨는 본격적으로 사기 행각을 벌이기 시작했다. 당시 그가 이씨에게 건넨 한마디는 “청와대 경호실 시험에 붙었다”라는 것이었다.

“모 수석의 목숨 구해줘 막역한 사이”

그때부터 주씨는 평소에는 입지 않았던 정복 차림에 가슴에는 청와대 경호처 배지를 붙인 채 나타났다. 또 빌려간 차량에는 경호처 표식이 그려진 물품들을 곳곳에 남겨놓는 치밀함을 보였다. 경호처 마크가 붙어 있는 휴대전화 번호 표시 장치에서부터 수갑, 가스총 등 종류도 다양했다. 주씨가 빌려간 차를 반납하면 이씨는 해당 차량의 내부를 정리했다. 그 과정에서 이씨는 주씨가 흘리듯 두고 간 경호처 물품들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씨가 주씨를 믿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따로 있었다.

당시 외국 항공사 승무원으로 일하고 있었던 이씨의 딸은 국내 항공사로 옮기기 위해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씨는 이씨에게 접근해 “내가 (딸이) 국내 항공사에 합격할 수 있는지 검토해주겠다”라고 말했다. 얼마 후에 나타난 주씨의 손에는 서류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딸의 사진과 주민번호 등 인적 사항이 나열된 서류였다. 딸의 이름과 생일만 알고 갔던 주씨가 인적 사항, 근무 경력까지 상세히 적힌 서류를 들고 오자 이씨는 주씨의 사기 행각에 깊숙이 걸려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서류 마지막 줄에는 ‘경력 기간이 불안’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국내 항공사에 합격하기에는 외국 항공사 근무 경력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이 문구는 주씨가 놓은 또 하나의 덫이었다. 주씨는 “그래도 내가 윗선에 잘 말해보겠다”라고 말하며 이씨를 격려했다. 주씨의 힘이 통했을까.

이씨의 딸은 당당히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경력 기간이 불안’해 합격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딸이 국내 항공사에 취직을 한 것이다. 예정된 수순대로 합격의 모든 공은 주씨에게 돌아갔다. 딸의 실력으로 합격한 사실은 온데간데없고, 주씨가 쓴 ‘청와대의 힘’만 보였다. 이씨의 딸이 오래전에 다녔던 승무원 학원에서 사진을 퍼와 포토샵으로 꾸미고, 검색 몇 번으로 근무 경력과 인적 사항을 파악해 가짜 서류를 꾸몄던 주씨의 덫에 이씨가 완전히 걸려든 순간이었다.

이후에도 주씨의 거짓말은 계속되었다. 하루는 “지난번에 한 청와대 수석의 목숨을 구해줬는데, 그 수석이 도와주어서 이번에 국정원으로 옮기게 되었다”라며 청와대에서 받은 표창장 사본을 이씨에게 보여주었다.

국정원에 제출해야 한다고 말하며 자연스럽게 표창장을 꺼내든 것이다. 주씨가 받은 표창장은 한두 장이 아니었다. 이달곤 장관, 원세훈 장관 등 각 정부와 시기에 맞춰 주씨가 조작한 표창장은 수십 장에 달했다. 표창장의 형식과 내용, 청와대 표식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조작된 것이었다.

주씨가 목숨을 구해주었다는 청와대 고위 수석은 이씨에게 본격적인 사기 행각을 벌일 때 다시 등장했다. 이씨의 부인은 인천시 연수구에서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탄탄하게 운영되고 있었던 미용실이 주씨의 타깃이 되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이씨에게 미끼를 던졌다. “청와대 수석과 막역한 사이이니 그분을 통해 잠실 롯데백화점에 입점시켜주겠다”라는 것이었다.

백화점 입점 알선 내세워 유인

또 “수석을 통해 롯데 신격호 회장을 소개받고 그 아들 신동빈씨까지 만나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라고 말하며 쐐기를 박았다. 백화점 내 95㎡ 규모 미용실 입점은 그 자체로 대박을 터뜨릴 수 있는 기회였다. 이미 주씨를 완벽하게 신뢰하고 있었던 이씨는 미끼를 덥석 물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주씨가 쳐놓은 덫에 걸려들기 시작했다. 물론 이 모든 사항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주씨와 나눈 사소한 이야기 한마디도 모두 비밀에 붙여졌다. 이씨는 ‘청와대 경호원’인 주씨 자체가 보안이 유지되어야 할 인물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주씨는 총 13회에 걸쳐 로비 자금 명목으로 약 1억6천만원을 가로챘다. 정확히는 1억5천9백15만원가량이다. 주씨는 “입점하게 되면 인테리어 같은 것은 다 해주는데, 부가세는 직접 내줘야 한다”라고 말하며 1만원 단위까지 꼼꼼하게 챙기는 치밀함을 보였다.

백화점 입점을 진행하면서 주고받은 서류도 ‘진짜’처럼 보이게 했다. 공공 기관에서 공문서를 전달할 때 사용하는 방법들이 그대로 사용되었다. 서류가 접히는 부분, 심지어 겉봉투 곳곳에도 도장이 찍혀 있고 행정용 언어와 문체로 현혹시켰다. 그리고 항상 동원되는 보안 유지에 대한 언급이 뒤따랐다. 수석의 문서를 주씨가 대신 전달하는 상황의 서류에는 이런 글귀가 나온다. ‘본인 외에는 친족 또는 주○○ 경위 또한 알아서는 안 됨을 항상 강조하지만 노파심에 다시 한번 주의를 환기시키며 이에 보안 강구된 장소에서 필독 요망’

의도된 ‘철저한 보안’ 속에 이씨는 주씨에게 상품권·현금 전달·계좌 이체 등의 방식으로 계속해서 돈을 건네주었다. 이미 인테리어가 진행되고 있었고, 입점을 눈앞에 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씨는 최근 들어 갑자기 의심을 갖기 시작했다. 1억6천만원이라는 거액을 지불했는데도 오가는 문서만 있을 뿐 실체는 직접 눈으로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이씨는 지인을 통해 경찰관에게 상담을 했다. 그리고 충격적인 말을 들어야 했다. “주○○씨는 경찰이 아닙니다.”

체포된 주씨는 현재 구속 수감 중이다. 주씨와 함께 불구속 입건된 양씨는 주씨의 처형과 함께 백화점에서 일하는 동료로 주씨의 부탁을 받고 자신의 예금 계좌를 빌려준 혐의로 기소되었다. ‘청와대의 힘’을 빌어 백화점에 입점하려 했던 헛된 욕심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기 때문일까. 경찰 관계자는 “이씨의 부인은 현재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다”라고 전했다. 피해자인 이씨는 “그 생각만 하면 머리가 아파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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