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으로 배우는 미국식 금융 자본주의
  • 김진령 (jy@sisapress.com)
  • 승인 2010.10.18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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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스톤 감독의 <월 스트리트: 머니 네버 슬립스>

세계의 금융 수도 뉴욕의 패권은 유태계 금융 자본가 손에 있다. 유태계 투자은행의 수장과 유태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모여 앉아 미국 재무부장관을 불러다 놓고 금융 위기에 빠진 투자은행에 정부가 긴급 지원을 하지 않으면 미국 경제는 물론 전세계가 공황에 빠질 것이라고 ‘협박’한다. 곧 개봉하는 영화 <월 스트리트: 머니 네버 슬립스>(올리버 스톤 감독)의 한 장면이다.

이 장면은 영화적인 ‘뻥’일까? 아니다. 지난 2008년 9월12일 금융 위기 때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 여부를 놓고 FRB에서 당시 헨리 폴슨 재무부장관과 금융 관계자들이 비상 대책회의를 열었다. 결국 금융 위기 때 리먼은 파산했지만 더 큰 대마인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는 정부 지원으로 위기에서 벗어난 뒤 경쟁자가 적어지면서 더 큰 규모로 돈을 벌고 있다. 헨리 폴슨은 골드만삭스의 최고경영자를 지낸 인물이다. 이만하면 ‘그물을 찢는 큰 물고기, 대마불사’라는 지극히 한국적인 정치 용어가 생각나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금융 위기 때의 실제 상황 촘촘히 반영

영화 <월 스트리트: 머니 네버 슬립스>는 2008년 금융 위기 때의 실제 상황을 촘촘히 반영했다. 금융 위기 때 독일의 억만장자 아돌프 메르클레가 투기성 주식 거래로 인해 기차에 투신하는 실제 사건까지 담겨 있다.

올리버 스톤의 자본주의 탐구는 여기서 멈춘다. 유태계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유태계 감독과 유태계 배우가 모여 뉴욕 증시의 환대까지 받아가면서 만든 이 영화가 현실을 더 신랄하게 파헤칠 것이라는 기대는 과욕이다. 스톤은 중반부 이후 가족 멜로드라마로 방향을 잡고 모두가 고깔쓰고 행복해 하는 파티로 끝을 맺는다.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투자은행에 취직해 큰 돈을 벌고 싶은 청춘들의 주말 데이트 영화로 적합할 만큼 말랑말랑하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는 개봉 첫 주에 박스 오피스 1위에 올랐다.

감독은 대신 미국 실물 경제와는 전혀 상관없이 금융 위기 뒤에도 계속 파티를 즐기고 있는 맨해튼의 금융계 풍속도를 눈요깃거리로 던져주었다. 영화에도 나오듯이 미국 증시는 중국계 큰손의 투자 유치에 혈안이다. 후퇴하고 있는 미국 내 2차 산업의 현실과는 갈수록 유리되고 있다. 덕분에 맨해튼은 금융 자본가가 흘리는 ‘콩고물’로 여전히 사치와 쾌락의 중심이 되고 있다. 미국식 금융 자본주의가 패권을 차지하면서 현금화될 수 있는 모든 보물과 미술품은 금융 자본가의 손에 넘어갔고, 그들은 죽기 전에 이를 맨해튼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 기부해 자신의 신분을 한 단계 더 높이고 상속세를 몇 단계 더 줄인다. 후배 금융 자본가들은 1만 달러의 입장료를 내는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 열리는 자선 파티에 가기 위해 1만 달러보다 더 비싼 옷과 사치품을 5번가의 상점에서 사들인다. 그들이 뿌리는 ‘콩고물’을 받아먹기 위해 월 스트리트 턱밑에 전세계 사치품 장사치들이 진을 치고 있다. 금융 자본의 ‘사소한’ 부산물로 뉴욕은 사치와 패션의 1번지가 되었고 나머지 세계는 그 사소함을 ‘선망’하고 있다.

부동산 버블 붕괴로 인해 주택담보대출로 제 발등을 찍고 빈민층으로 수직 낙하하는 미국 중산층의 문제를 통해 금융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좀 더 신랄하게 파헤친 영화도 있다. 마이클 무어의 2009년 작품 <캐피탈리즘: 러브 스토리>가 그것이다. 이 영화는 국내에 수입되었지만 개봉일은 미정이다. 마이클 무어의 장광설이 더욱 장황해졌고 현실의 쓰린 상처를 잠시 잊을 만한 당의정도 입히지 않은 다큐멘터리라 상업성이 작기 때문일 것이다.   

 

ⓒ프리디젼 엔터테이먼트
결혼식과 장례식은 영화의 좋은 소재이다. 한 사회의 문화가 집약된 행사로 볼거리를 제공하는 데다, 오랜만에 모인 가족들 사이의 갈등이 드라마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결혼식보다 장례식이 더 극적이다. 예약된 행사가 아니기에 응급 상황이 속출하고, 종교적인 문제가 대두되고, 주인공이 부재한 상황에서 갈등이 더 노골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은 힘이 세다. 웬만한 갈등은 결국 장례 과정을 거치며 봉합된다. 임권택 감독의 <축제>나 영국의 블랙코미디 <미스터 후아유>는 이러한 장례식의 속성을 잘 살린 사례이다.  

멕시코 신예 여성 감독의 <노라 없는 5일>은 다소 특이한 장례식 영화이다. 20년 전 이혼한 전 남편과 이웃에 사는 노라는 유대교 명절 만찬을 준비하고 가족과 친구를 초대한다. 그러나 가장 먼저 도착한 전 남편을 맞는 것은 그녀의 주검이다. 30년간 자살을 시도해 온 그녀가 자신에게는 유서조차 남기지 않았으며, 더구나 이혼 전 다른 남자를 만났음을 알게 된 그는 분노해 유대교식이 아니라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치러버리려 한다. 극구 아내임을 부인하며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던 그는, 막상 자살자인 그녀를 죄인 취급하는 유대교 의식에 부딪히자 그녀를 자신의 묘자리에 안치시킨다. 그리고 장례 후 그녀가 준비한 만찬을 먹으며 그녀가 일생 사랑했던 사람이 자신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자살 금기는 종교적 교리에 근거한 것이지만, 이를 떠받치는 세속적 이유는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 영향 때문일 것이다. 그녀를 원망하며 신을 모욕하던 그가 진심으로 애도의 눈물을 보이자, 랍비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 알 수 없으며, 우리가 심판할 수도 없다”라고 말한다. 유명인의 자살에 대해 말들이 많다. 그러나 자살자에 대한 비난이나 억측을 접고 다만 그들을 애도하는 성숙함이 정착된다면, 자살자에 대한 종교적 금기도 느슨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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