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긁어 터진 ‘NL-PD 갈등’
  • 반도헌 (bani001@sisapress.com)
  • 승인 2010.10.18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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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3대 세습 둘러싸고 진보 진영 내에서 의견 대립…민노당과 경향신문 간 논쟁도

북한의 3대 세습이 한국 진보 진영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다. 사실상 북한의 공식 후계자로 지명된 김정일의 셋째아들 김정은이 한국 진보 진영에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있는 셈이다. 시작은 민주노동당이 북한의 3대 세습에 대한 모호한 태도를 취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민노당이 북한의 세습 체제에 대한 비판을 유보하면서 이를 두고 진보 진영 내부에서 의견 대립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오른쪽)가 10월13일 국회 민노당 대표실에서 이정희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뉴시스

사설을 통해 민노당을 공식적으로 비판한 경향신문과 이에 반발한 민노당이 대립각을 세우자, 진보 진영 지식인과 논객들도 각각의 입장을 내세우며 편 가르기에 나섰다.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진보 대통합을 준비하고 있는 민노당과 진보신당 역시 북한 세습 문제에 대해서는 입장 차이가 분명하게 갈리고 있다. 2008년 진보 진영의 분당으로 치달은 ‘종북주의 논란’이 재현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북한의 세습 체제에 대한 입장 차이가 자칫 진보 진영의 큰 축을 형성해왔던 NL(민족해방)과 PD(민중민주)의 해묵은 감정 싸움으로 이어질 경우, 진보 진영 통합 논의가 다시 한번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가능성도 엿보인다. NL은 한국 사회의 모순이 미국 ‘제국주의’에서 비롯되었다는 입장을 취하며, 민족 문제와 통일 문제에 중점을 두면서 친북 성향이 강하다. 민노당 내에는 NL계 인사들이 많다. 반면 PD는 한국 사회의 모순이 자본주의의 모순에서 비롯되었다고 규정한다. 계급 문제, 노동 문제, 인권 문제에 중점을 두며 북한의 지배 체제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PD계 인사들은 2008년 민노당을 탈당해 진보신당을 만들었다. 

민노당이 지난 9월29일 북한 후계 구도와 관련해 “국민들의 눈높이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더라도 북한의 문제는 북한이 결정할 문제이다”라는 입장을 밝혔을 때만 해도 파장이 크게 확산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이에 대해 경향신문이 10월1일자 ‘민주노동당은 3대 세습을 인정하겠다는 것인가’라는 사설을 통해 비판하고 나서면서 본격적으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진보 언론으로 분류되는 경향신문이 민노당을 공식적으로 비판하고 나서자, 민노당은 확대 간부회의를 소집해 대처 방안을 논의했다. 결론은 중앙당 차원에서 구체적인 대응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파문이 확산된 것은 민노당 울산시당이 경향신문 영남지사에 절독 통지문을 보내고, 경향신문이 이를 공개하면서부터다. 김창현 울산시당 위원장은 “울산시당 집행위원회 회의를 연 결과 항의 형태로 신문을 안 보기로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면서 우리가 이런 행동을 하게 된 이유를 신문사측에 공문 형태로 알리게 된 것이다. 경향신문이 이를 공개하리라고 예상하지는 못했다”라고 말했다. 경향신문 절독 선언에 대해 진보 진영 내부에서조차 비판이 일자 김위원장은 “우리가 공문을 보냈으니만큼 신문사측도 공문으로 답하는 것이 맞다. 이렇게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다면 차라리 반론을 게재하는 방법을 썼을 것이다. 나름의 항의 방식이었지, 시민운동 형태의 절독 운동을 전개하겠다는 것은 아니었다”라며 곤혹스런 입장을 밝혔다.

 

▲ 경향신문 10월1일자 사설. ⓒ시사저널 유장훈


진보 대통합 논의에도 영향 미칠 듯

논란은 경향신문 사설을 쓴 이대근 논설위원의 반박-이정희 민노당 대표의 블로그를 통한 입장 표명-이위원의 재반박으로 이어지며 확대되고 있다. 진보 진영 지식인들도 민노당의 태도를 비판 또는 옹호하는 글을 쏟아내고 있다. 진보 논객 진중권씨는 “모든 개인은 자신의 양심에 대해 침묵할 자유가 있다. 다만 공당에게 그런 자유는 없다”라며 민노당의 명확한 태도 표명을 요구하고 나섰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 신율 명지대 교수, 홍세화 한겨레신문 기획위원 등도 민노당 비판에 동참했다. 민주언론실천위원회 역시 민노당 울산시당이 경향신문 절독 선언을 한 데 대해 비판하고 나섰다. 민노당을 옹호하는 쪽의 목소리도 만만찮다. 시사평론가 유창선 박사는 “민노당이 3대 세습을 옹호한 것도 아니고 단지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종북주의 취급을 당해야 하는 이유를 알기 어렵다”라며 경향신문의 비판이 진보 안에서의 색깔 씌우기라는 입장을 밝혔다. 역사학자 김기협씨와 최형익 한신대 교수도 민노당의 입장을 옹호했다.

북한 세습 문제를 놓고 민노당과 진보신당의 입장 차이가 다시 한번 확인되면서 당장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진보 대통합 논의이다. 진보 진영은 진보 대통합, 나아가서는 민주진보 대통합을 통해 2012년 총선과 대선 국면을 돌파해나가야 한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10월13일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가 퇴임 인사차 이정희 대표를 방문한 것도 그 일환으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북한에 대한 민노당의 태도가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의견이 대두된다. 진보신당은 이번 논란에서 민노당이 입장을 분명하게 표명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김종철 진보신당 대변인은 “정치적으로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민노당이 북한 핵개발을 옹호한 전력이 있기 때문에 진보 진영 입장에서는 이를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반면 “당 공식 입장은 대변인 논평으로 정리되어 나갔다. 그 외에 덧붙일 말은 없다”라는 우위영 민노당 대변인 말처럼 민노당은 이 문제가 계속 거론되는 것을 꺼리는 입장이다.

열쇠는 10월15일 취임한 조승수 신임 진보신당 대표가 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대표는 지난 2008년 민노당 분당과 진보신당 창당 사태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다. 당시 민노당의 위기에 대해 “다수파를 형성하고 있는 NL계 지도부의 친북 노선에 (문제가) 있다. 다수 정파가 2선으로 후퇴해 문제제기를 수용해야 한다”라고 주장한 장본인이다. 2008년 민노당은 대선 참패와 최기영 전 사무부총장이 북한 공작원과 접촉했다는 혐의를 받은 ‘일심회 사건’ 등으로 당내 NL계와 PD계 사이에 대립이 팽배했었다. “종북주의다” “색깔 공세다”로 갈라져 벌어진 첨예한 대립은 결국 화해가 아닌 결별로 정리되었다. 2년이 흐른 지금 통합을 논의하는 시점에 두 정파의 갈등이 다시 한번 불거졌다. 논란을 확산시킨 김창현 울산시당 위원장은 NL계 핵심 인사로 거론되는 인물이다. 김위원장은 2008년 당시 종북주의로 공세를 가하는 것에는 타협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던 바 있다. 이번에도 그는 경향신문에 대해 절독 선언을 한 이유로 “비판은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저주와 같은 종북주의 운운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라고 밝혔다.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진보 진영 내부에서는 “NL과 PD는 1980년대 학생 운동의 산물일 뿐, 2010년에 통용되는 사상은 아니다”라는 목소리가 강하다. 북한 실상이 다 알려진 마당에 북한을 따라 사회를 변화시키겠다는 사상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라는 회의적인 시각이 그것이다. 민노당과 진보신당의 분당 역시 사상적 갈등이라기보다는 당 운영 과정에서 충돌하며 빚어진 앙금이 표출된 것이라는 해석이다. 민주진보 대통합의 주역을 자처하며 민주당 전당대회에 바람을 일으킨 이인영 최고위원은 “하나의 방향성을 가지고 공동의 실천을 조직한 경험이 훨씬 많다. 대화와 논의를 하다 보면 가까워지고 조정되고 합의될 수 있는 영역이 많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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