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과 원로가 키운 ‘준비된 태자’
  • 김회권 (judge003@sisapress.com)
  • 승인 2010.10.25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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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대 중국 지도자 시진핑은 누구인가 / 숙청당한 혁명가의 아들로 농민과 부대끼며 성장해

2007년 10월 열린 중국 공산당 제17차 당 대회는 포스트 후진타오를 점칠 수 있는 자리로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새로운 권력이 태동하는 역사적인 자리였지만, 한 50대 중년의 아저씨는 이런 팽팽한 기운에 아랑곳하지 않고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촌스런 복장으로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 일본 아사히 신문은 당시 이 사내를 이렇게 묘사했다. “당 대회 상하이 분과가 열리는 내내 짧은 정장 바지 자락 안으로 검은 양말과 맨살이 비쳤다. 정장은 중국제 국산 제품이었고, 화려한 패션 센스를 자랑하는 다른 태자당(혁명 1세대의 자제들) 인사들과는 달랐다.”

▲ 전국인민대표자회의에서 이야기 나누는 후진타오 중국 주석과 시진핑 부주석(오른쪽). ⓒ연합뉴스

이 촌스런 사내가 제17차 당 대회에서 공청단(共靑團; 공산주의청년단)의 리커창 당시 상무부총리를 제치고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며 사실상 중국의 차기 후계자로 낙점된 시진핑(習近平)이다. 그리고 3년 뒤인 2010년 10월 중국 공산당은 제17차 당 중앙위원회 제5차 전체회의(17기 5중전회)를 개최해 시진핑을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 선출하며 사실상 후진타오 현 국가주석의 후계자로 확정했다. 이변이 없는 한 시 부주석은 2012년부터 2022년까지 중국을 책임지게 된다.

시 부주석은 최근 들어 “권력은 민이 준 것이며, 민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權爲民所賦 權爲民所用)”라는 말을 자주 쓰고 있다. ‘인민’은 시진핑을 설명하는 열쇳말이다. 그는 간부의 자제가 다니던 81학교를 그만두고 15세 때 옌안 산베이의 한 작은 산촌으로 내려갔다. 당시 마오쩌둥은 상산하향 운동을 주장하며 “지식 청년은 농촌에 내려가서 농민의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라고 주장했는데, 여기에 호응한 것이다.

여기에는 사정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인 혁명 원로 시중쉰(習仲勳)은 문화대혁명으로 숙청된 상태였고, ‘반동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소년관교소(일종의 수용소)에 보내질 뻔했기 때문에 일종의 피난처로 농촌을 택했던 것이다. 그는 슬퍼하는 배웅객들에게 “내가 못 가고 여기에 있으면 목숨이 붙어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일 아니냐”라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고 한다.

이 어린 날의 선택은 그의 정치 인생을 좌우하게 되었다. 동굴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벼룩과 사투를 벌이며 7년을 보낸 그는, 량자허(梁家河) 산촌 마을에서 농민의 현실을 보았고 그들과 부대끼는 법을 배웠으며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철저하게 인민 속으로 들어간 결과 마을의 서기로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시 부주석은 매번 지방에서 행정을 펼칠 때 지역 주민들의 고충을 듣는 데에 능하다고 평가받았다. 산베이에서부터 계속된 이런 경험은 그가 중국공산당 5세대 중에서 기층 경험이 가장 풍부한 인물로 부각되게 한 바탕이 되었다. 시 부주석은 “나의 성장·진보는 산베이에서 보낸 7년부터 시작되었다. 군중을 알게 되었고 자신감을 깨달았으며, 어떤 어려움에 직면해서도 그때보다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그가 인민과 호흡할 수 있었던 데는 아버지 시중쉰의 영향이 컸다. 시중쉰은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총리의 조언자였고, 덩샤오핑 전 주석과 절친했다. 혁명 원로 1세대 중 선두 주자로 분류되었지만 시중쉰은 가정 교육에 매우 엄격했다. 특히 근검절약과 사람 사이의 인화를 강조했다. 시중쉰의 비서인 장즈궁은 “시중쉰의 자제들은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면서도 나에게 푼돈을 달라고 부탁했다. 그 달의 금전출납부를 시중쉰 동지에게 보내 살펴보게 하면 아이들은 자기들이 돈을 많이 써서 아버지에게 야단맞을까 봐 두려워할 정도로 어린 나이에 벌써 스스로 자제할 줄 알았다”라고 기억했다. 다른 태자당 자제들이 비서나 가정부를 하대했던 것과 달리 시진핑 등은 자라서도 자신을 “장 아저씨”라고 부르며 친근하게 대했다고 한다.

또 다른 열쇳말은 ‘원로’이다. 시진핑에게 원로는 중요한 우군 세력이다. ‘원로’는 중국 공산당의 정치적 특색 중의 하나이다. 비록 그들은 정계를 떠나 물러나 있지만 인사 배치 분야에서 발언권을 보유하고 있고, 그들의 논의가 가지는 파괴력은 무시할 수 없다. 시 부주석은 젊은 날부터 원로들을 깍듯하게 모셨다. 정딩 현 위원회 부서기로 간 젊은 시진핑은  “1~2년 내에 여기 거주하는 당 원로들을 모두 한 번씩 방문하고 싶다”라고 말하며 일과를 마친 뒤 반드시 시간을 내어 지역에 거주하는 원로 간부들을 방문하곤 했다. 아버지 시중쉰의 존재는 원로들과 융합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고, 혁명 1세대 집안에서 자란 터라 그들을 대하는 방법 역시 자연스레 익힌 터였다. 시 부주석은 원로들의 지지가 공고해질수록 자신의 지위가 높아진다는 것도 깨닫고 있었다.

현역 군인 경력도 있어 군부와 소통 원활

▲ 지난해 방한해 경제단체장 환영 만찬 때 참석한 시진핑. ⓒ연합뉴스
‘군(軍)’도 시 부주석에게 빼놓을 수 없다. 아버지 시중쉰이 복권된 이후 시진핑은 군사위원회 비서장을 맡고 있던 겅뱌오의 비서로 일했는데, 당시 시진핑도 군복을 입고 현역 군인이 되어 시중을 들었다. 이런 군인 이력은 5세대 정치인 가운데 그만이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경력이다. 그는 군의 중요성을 알고 중요하게 대했다. 푸젠 성 성장 시절, 타이완과의 군사 갈등이 고조되었을 때 예비역 고사포 부대 훈련센터를 설립하는 등 적극적으로 군의 입장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인 것도 군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당시 푸젠 성은 타이완 자본 유치에 적극적인 곳이었기에 이례적이었다.

시 부주석이 생각하는 ‘정치관’은 그가 여태껏 남긴 발언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우선 그는 무리하지 않는다. 닝더에서 지내던 시절을 보면 알 수 있다. 푸젠 성 북동부에 위치한 닝더는 개발이 더딘 가난한 지역이었다. 35세의 시진핑이 이곳에 부임했을 때 지역민들은 그가 ‘시중쉰의 아들’이기 때문에 큰 개발 프로젝트를 따 올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시진핑은 그런 기대를 가장 불편해했다. 그는 어떤 정책을 펼칠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격에 맞고 성숙한 지도자는 노선·방침·정책을 잘 파악해야 하고, 시기와 형세를 잘 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그에게 중요한 것을 선택해 행하고 그가 잘하는 것을 선택해 그 일을 행하는 것을 잘해야 하는 반면, 일시적인 공을 탐하거나 일시적인 빠른 것을 추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는 지방 정부와 중앙 정부가 조화를 이루는 것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정치가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2004년, 중앙 정부의 거시적 조정·통제 정책은 당시 상하이와 저장 성 등 급속하게 발전하던 지역에는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오고 있었고, 천량위 상하이 시위원회 서기는 이런 중앙 정부의 통제를 강하게 비판했다. 반면 시진핑은 자신이 부임한 저장 성에 마이너스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중앙 정부의 방침을 엄격히 따라 후진타오 주석과 원자바오 총리의 환심을 샀다.

지난 2007년 시 부주석이 상무위원에 선출될 것을 예상한 해외 매스컴들은 허베이 성 정딩 현을 방문했다. 시 부주석은 1982~83년 이곳에서 서기로 일했다. 시 부주석의 흔적을 쫓으려는 이들의 노력은 난관에 부딪쳤다. 당시 시 부주석과 일했던 이들이 인터뷰를 극구 사양했기 때문이다. 시진핑과 함께 일했던 한 전직 공무원은 홍콩 동방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시진핑을 매우 존경하지만 그가 불쾌해할까 두려워 인터뷰를 수락하지 못하겠다. 그는 자신을 선전하지 말라고 수차례 부탁했다”라고 말했다. 최근 ‘오만하다’는 평가를 듣는 중국에 등장한 온화하고 겸손한 지도자가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참고 : <시진핑 평전>, 지식의 숲, 우밍 지음 / 송삼헌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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