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골동상들 ‘약탈’에 정처 잃은 우리 보물들
  • 이순우┃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sisa@sisapress.com)
  • 승인 2010.11.01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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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 시작 전후로 싹쓸이하듯 도굴·반출 ‘수난’

지난 1987년 2월6일,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무려 6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도록 낯선 땅에 머물러야 했던 우리의 소중한 석조 유물 하나가 국립중앙박물관(경복궁)으로 되돌아왔다. 한 번 해외로 유출된 문화재가 국내로 되돌아오는 것도 드문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유물 소유자인 일본인이 자진해 기증하는 형식으로 이를 되돌려준 것은 이례적인 일로 평가되었다.

이 유물의 정체는 ‘봉인사 부도암 사리탑’으로, 둥근 모양의 탑신에 운룡문(雲龍文)이 화려하게 새겨진 것이 특징이다. 또한 비석과 사리구가 온전하게 갖추어져 있다는 사실 등이 주목되어, 유물 반환 직후 이 사리탑과 관련된 유물 일체는 보물 제928호로 일괄 지정되었다.

이 사리탑의 원래 위치인 봉인사(奉印寺)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리의 천마산 서쪽 기슭에 있는 사찰이다. 비석과 사리함에 새겨진 기록에 따르면, 조선 광해군 때인 1619년에 중국에서 가져온 진신사리 1과를 그 이듬해에 왕세자의 수복무강을 기원하는 뜻을 담아 탑 안에 봉납했다.

하지만 국운이 크게 기울던 무렵 이 절터의 절지기는 이곳에 남은 사리탑과 범종을 몰래 가져다가 서울에 있는 일본인 골동상에게 처분했다. 이것이 1911년 8월에 일본인 변호사 이와타 센소(岩田仙宗)의 수중으로 다시 넘어감에 따라 이 유물들의 고단한 타향살이가 시작되었다. 이와타 자신이 남긴 기록물에 따르면, 이 사리탑은 한동안 남산 아래 동본원사에 맡겨졌다가 1927년에 이르러 마침내 일본 고베로 반출된 것으로 확인된다. 이 사리탑은 다시 오사카시립미술관 앞뜰에 줄곧 위탁 진열되었다가, 소유주인 이와타의 유언에 따라 마침내 1987년에 한국으로 반환되었다.

▲ 봉인사 부도암 사리탑

여기에 나오는 이와타 변호사는 1906년 이후 서울에서 활동했던 인물로, 그의 행적에 대해 자세히 알려진 것은 없다. 하지만 1909년 12월 서울 명동성당 앞에서 매국노 이완용을 처단하려다 실패한 ‘이재명 의사의 의거’에 대한 재판 당시 변호인단의 명단에서 그의 이름이 포함된 사실을 간신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타 변호사가 이 사리탑을 막 사들이던 바로 그 당시, 서울에는 이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던 석조 유물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때마침 동경제대 건축과의 세키노 타다시(關野貞) 교수가 남긴 1911년도 고적조사보고서와 유리 원판 사진 그리고 ‘필드 카드’에는 이들 유물의 면면이 고스란히 채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1911년 9월 당시 이미 명동성당 앞에는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이 원래의 절터를 벗어나 이곳에 자리했고, 다시 남산동 소재 경성호텔의 정원에는 곤도 사고로(近藤佐五郞)라는 일본인 골동상에 의해 ‘흥법사 진공대사탑’과 ‘염거화상탑’이 옮겨져 있던 상태였다. 그리고 와다 츠네이치(和田常市)라는 일본인 부호의 집이었던 남창동 202번지 홍엽정(紅葉亭, 현 일신교회 자리)에서는 ‘거돈사 원공국사승묘탑’과 ‘봉인사 사리탑’이 목격되기도 했다.

▲ 일본인 골동상의 소행으로 원래 자리에서 벗어난 수난의 석조 문화재들. 왼쪽부터 경천사 십층석탑, 염거화상탑, 흥법사 진공대사탑,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 거돈사 원공국사승묘탑.

일본인 부호들, ‘유망 사업’ 운운하며 계획적 ‘범행’

이 무렵은 일본인 골동상과 경성의 실업계를 장악한 일본인 부호들이 서로 결탁해 조선 전역의 폐사지를 마구잡이로 뒤지며, 쓸 만한 유물들을 싹쓸이하는 일이 극성을 부리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풍조에 대해 세키노 교수는 스스로 개탄의 목소리를 높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개인의 수중에 들어간 것으로 이번에 우리들이 목격했던 우수한 유물은 염거화상탑인데, 이와 같이 신라 고승의 묘탑으로 모름지기 다른 곳으로 옮겨져서는 안 될 것이 흩어지려는 것을 보니 통석에 이르지 않을 수 없다. 원주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과 같은 귀중한 유물이 여하히 개인의 손에 들어가 유서 있는 사적을 인멸하기에 이른 것인지가 심히 유감인 바이다.”

돈이 되는 것이라면 마구잡이로 반출해 이를 비싼 값에 되파는 일에 혈안을 올리는 일본인 골동상이 서울 주변에 처음 등장한 때는 언제일까. 1880년대 이후라고 알려진다. 인삼 거래를 위해 경기도 개성 지역을 드나들던 일본인 상인들에 의해 고려 왕릉과 고분 등지에서 출토된 고려자기가 외부로 유출되어 한둘씩 거래되기 시작한 때와 일치한다.

요시쿠라 본노(吉倉凡農)가 정리한 <기업 안내 실리지조선(企業案內 實利之朝鮮)>(1904년)이라는 책에는 조선에 진출해 성공할 수 있을 만한 업종의 하나로 ‘고물상(골동상)’을 꼽은 것이 눈에 띈다. 그는 ‘고려 시대의 도자기와 불상은 넉넉하고 가격도 저렴하며 대다수 땅속이나 사찰에서 발견되는데, 일본이나 구미로 수출하면 의외의 큰 이문이 생긴다’라고 그 이유를 달았다. 이와 아울러 요시쿠라는 ‘고적탐견(古蹟探見)’도 조선에 건너오는 일본인들이 시도해 볼 만한 유망 사업이라고 소개하면서 그 구체적인 방법까지 적시하고 있다.

 “한국 사람의 안중에는 원래 미술이라는 것도, 국보라는 것도 없는 까닭에 나는 팔도(八道)의 어느 곳에서나 그런 국보를 헐값으로 매수할 수 있었다. 고려자기는 최상의 물품을 고작 10원을 들이면 구할 수 있으며, 한층 더 싼값에 매입하고자 한다면 고분(古墳)이라고 생각되는 장소를 매입해 이곳을 발굴한 후 지하의 관 속에 숨겨진 도자기를 꺼내는데, 고분이 있는 토지의 땅값이 그다지 높은 것이 아니라면, 이러한 수단을 쓰는 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의외의 수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와중에 일제의 침탈과 위세가 커지는 것에 비례해 이들 골동상의 숫자도 늘어났으며, 이에 따라 1902년에는 서울에 사는 일본인 골동상이 10명에 불과했던 것이 1909년에 이르러서는 그 숫자가 1백62명으로 크게 늘었다. 그야말로 일본인 골동상들의 전성시대가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 골동상의 소행으로 제자리를 벗어나 무단 반출된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들을 일일이 나열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들이 이 땅에 남겨놓은 무수한 폐해들 가운데 가장 고질적인 부분 하나만큼은 꼭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탐욕에 눈 먼 이들 골동상의 무분별한 유물 반출로 인해 그 출처를 전혀 모르거나, 심지어 원래 위치를 고의로 은폐하는 바람에 제 고향조차 어딘지 영영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사례가 부지기수라는 사실이다.

 대구광역시에 있는 경북대학교 교정에는 보물로 지정된 석조부도가 두 개나 있다. 보물 제135호와 보물 제258호인 이 유물의 정식 지정 명칭은 달랑 ‘석조부도’이다. 일본인 골동상의 손을 거치는 동안 원래의 출처를 전혀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까닭에 그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 서울의 이화여대 구내에 있는 보물 제351호 ‘석조부도’ 역시 이와 완전히 동일한 사례에 속한다. 언젠가 돌아가야 할 제 고향조차 어딘지 전혀 모른다는 것, 그래서 이러한 반출 문화재의 신세는 더욱 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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