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릴라 생활로 단련된 ‘철의 여인’
  • 김회권 (judge003@sisapress.com)
  • 승인 2010.11.0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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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프 대통령 당선자의 인생 역정 / 발레리나 꿈꾸던 여고생, 16살부터 반정부 투쟁에 나서

1964년 브라질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나 브랑쿠 장군이 이끄는 군사 정부가 들어섰다. 그리고 1967년 대통령의 권한이 강화되는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이후 21년간 대통령은 계속 바뀌었지만 군인들 간의 대물림에 불과했다. 군부 독재 시절, 브라질은 농업 중심의 산업 구조를 개선했고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 시기는 군사 정부에 반대하는 인사들이 색출당하고 고문을 당하는 등 인권이 유린된 기간이기도 했다. 1985년 문민 정부가 들어서기까지의 브라질 모습은 특히 우리네 현대사와 닮은 면이 많다.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 당선자(62)는 남미의 형님뻘인 브라질에서 배출된 첫 여성 대통령이다. 남녀 차별이 강한 브라질에서 여성이, 그리고 두 번의 이혼 경력이 있는 독신녀가 대통령이 된 것은 혁명적인 일로 여겨진다. 브라질 현지에서는 ‘브라질 민주주의의 결정체’라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경제 성장에 이은 정치 성장을 기뻐하는 모양새이다.

1964년 군사 쿠데타 겪고 책 대신 총 선택

▲ 1970년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게릴라 활동 혐의로 검거된 지우마 호세프. ⓒAP연합

호세프 당선자는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브라질 언론에서는 또 다른 ‘철의 여인’인 마가릿 대처 전 영국 총리와 비교하며 ‘브라질의 대처’로 소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둘은 별명만 같을 뿐, 살아온 궤적은 완전히 다르다. 대처 전 총리는 영국의 노조를 굴복시키고 강력한 시장주의 정책을 펴며 보수의 상징으로 불렸다. 특히 영국 탄광노조와의 대결에서 승리하며 그 강인함을 각인시켰고,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을 세계에 널리 알렸다. 반면 호세프 당선자는 이념 지도상 대처 전 총리와 반대편에 위치해 있다.

호세프 당선자의 아버지 페드로 호세프는 불가리아 출신 이민자였다. 구두닦이까지 할 정도로 가난했던 룰라 다 실바 현 대통령과 달리 그는 중산층 가정에서 유복하게 자랐다. 부족한 것 없이 지내며 발레리나를 꿈꿨던 호세프 당선자를 변화시킨 것은 한 권의 책이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읽은 프랑스 철학가 레즈 드브레의 <혁명 속 혁명(Revolution in the Revolution)>에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1964년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책 대신 총을 선택했고, 군사 정부와 싸우기 시작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열여섯 살이었다. 사회당의 ‘노동자 정파(POLOP)’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투사의 길을 선택한 호세프는 이후 전국해방지휘본부(COLINA)에 참여하며 게릴라의 길을 걷게 된다. 첫 남편 클라우디우 갈레노를 만난 것도 이때였고, 둘은 3년간 결혼 생활을 했다.

1969년 전국해방지휘본부는 리우데자네이루로 본거지를 옮기고 호세프는 이곳에서 두 번째 남편인 변호사 카를로스 아라조를 만난다. 아라조를 만난 이듬해인 1970년 그는 상파울루에서 검거되었고 22일간 고문을 당했다. 이후 1972년까지 수감 생활을 했다.  호세프와 아라조 부부는 30년간 관계를 유지하다 지난 2000년 결국 헤어졌다. 그 이후 호세프는 아라조와의 사이에 난 외동딸과 함께 독신으로 살고 있다.

이번 선거 기간 내내 그의 젊은 날 행적은 야당의 주요 공격 거리가 되었다. 야당 후보들은 호세프 당선자를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그가 게릴라 진영에서 맡았던 역할은 집회 참석, 회계, 현금 수송 등 운영에 관한 부분으로 게릴라 전사라는 이미지는 과도한 공격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호세프는 자신의 과거에 대한 공격을 두고 “더 나은 브라질이라는 꿈을 위해 싸웠다”라고 말하며 정면 대응했고, 민주화 투쟁을 하다 옥고를 치른 점을 부각시켰다. 그가 얻은 ‘철의 여인’은 이런 과거 때문에 얻은 별명으로 대처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는 출감 이후에도 군사 정부를 반대하는 자세를 견지했다. 1977년에는 포르토알레그레시 연방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며 공부에 매진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방법론을 바꾸어 제도권 내로 들어갔다. 1980년 민주노동당(PDT) 결성에 앞장섰는데 이후 군사 정부가 1981년 정당 합법화 정책을 실시한 뒤 정식 야당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1986년부터는 시 재무국장과 리우그란데두술 주 에너지장관을 맡으며 지방 행정의 현장에서 수완을 발휘했다.

그가 다 실바 현 대통령이 이끌던 집권 노동자당(PT)으로 옮긴 때는 2001년이다. 이듬해 실시된 브라질 대선에서 그는 룰라 캠프에서 에너지 정책의 밑그림을 그렸고 대통령에 당선된 룰라는 그를 2003년 연방 정부 에너지장관직에 임명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호세프 당선자는 정치인보다 관료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옷차림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전형적인 일꾼형 인물이었다. 숫자에 강해 연방 정부 장관직에 부임하자마자 각종 사업 수치를 외며 조직을 장악했고, 동료 장관이든 부하든 가리지 않고 충돌하기로 악명 높았다. 그녀의 장점인 공격적인 추진력은 주변 사람들에게 지탄의 대상이었다.

수석장관 맡으면서 경제 성장 촉진에 큰 기여

▲ 11월1일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 당선자(오른쪽)가 룰라 다 실바 대통령과 함께 승리를 자축하고 있다. ⓒEPA

‘정치인 호세프’가 대중 앞에 부각된 것은 다 실바 대통령이 위기를 겪으면서부터였다. 2005년 다 실바 정부는 야당 의원들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 정치 자금을 건네는 순진한 방법을 택했는데, 이것이 대중에게 알려졌고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었다. 다 실바 대통령에게 가장 큰 문제는 최측근이자 동지인 조제 디르세우 수석장관(국무총리와 비슷한 역할)이 이 사건에 개입되었다는 의혹을 받아 사임했다는 데 있었다. 재선을 판가름하는 대선이 불과 1년여 남은 때였다. 그리고 구원투수로 등장해 수석장관을 맡은 사람이 호세프 당선자였다. 이듬해 룰라가 악재를 딛고 재선에 성공하자 그는 유력한 차기 대선 주자군으로 급부상했다. 다 실바 대통령은 2007년 브라질판 뉴딜 정책이라 불리는 경제 성장 촉진 프로그램(PAC)을 가동시키는데, PAC를 입안하기까지는 호세프 당선자가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현재 브라질은 세계 7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했고, 룰라는 그를 ‘경제 성장의 어머니’라고 부르며 대선 주자로서 입지를 다지는 데 적극적 관여했다.

대선 주자가 되기 위해서 그는 그동안의 이미지를 벗겨내야 했다. 안경 대신 렌즈를 착용했고 성형을 해 좀 더 여성스러워지려고 노력했다. 전문적이고 공격적인 화술 대신 쉽고 비유적인 표현을 연습했고, 동영상을 검토하며 발언 자세도 교정했다. 지난해 암의 일종인 림프종 진단을 받은 뒤 카메라 앞에서 가발을 흔들며 브라질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모습은 그런 연습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룰라가 가는 곳에는 항상 호세프가 있었다. 브라질의 사회학자 디메트리오 매그놀리는 “룰라는 마치 자신의 재선거를 치르듯 호세프를 도와주었다”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호세프가 대통령이 되었다. 8년의 재임이 끝나가는 시점에서도 다 실바 대통령의 지지율은 무려 80%에 달한다. 현 정부의 뒤를 잇는 것은 독이 든 성배를 드는 것과 다름없는 셈이고, 호세프는 내년 1월1일이 되면 그 잔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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