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빛난 두 천재 닮은 듯 다른 ‘폭풍 질주’
  • 신명철│인스포츠 편집위원 ()
  • 승인 2010.11.22 13:4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 축구 영웅 차범근과 새별 손흥민의 성공 방정식

 

▲ 독일 FC 쾰른과의 경기에서 분데스리가 데뷔골을 넣고 좋아하는 함부르크 SV의 손흥민 선수. ⓒ연합뉴스

1978년, 스물다섯 살 청년 차범근과 2010년, 열여덟 살 소년 손흥민.
한 세대를 뛰어넘어 독일 프로 축구 분데스리가에 데뷔한 두 한국 선수에게는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요즘 축구 팬들은 혜성처럼 나타난 손흥민에 열광하고 있다. 함부르크 SV의 손흥민은 지난 10월30일 FC 쾰른과 치른 분데스리가 2010~11시즌 원정 경기에서 1-1로 맞서던 전반 24분 골키퍼 미로 바르도비치의 키를 살짝 넘긴 뒤 왼발로 역전 골을 터뜨렸다. 눈에 번쩍 띌 만한 데뷔 골이었다. 함부르크 팬에게는 2-3으로 진 경기 결과보다 손흥민에 대한 관심이 훨씬 더 컸다. 국내 팬들의 관심은 이보다 더 뜨거웠다.

손흥민이라는 이름은 지난해 11월 나이지리아에서 열린 FIFA(국제축구연맹) 17세 이하 월드컵 때부터 축구 팬들에게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손흥민은 이 대회에서 한국이 치른 다섯 경기에서 세 골을 넣었다. 3-1로 이긴 조별 리그 F조 우루과이 전에서 결승 골, 2-0으로 완승한 알제리 전에서 추가 골을 터뜨렸다. 1-3으로 패배해 4강 진출에는 실ㅍㅐ했지만 나이지리아와 치른 8강전에서는 0-1로 뒤진 전반 40분께 25m 중거리 슛으로 동점 골을 넣었다. 이 골은 대회에서 나온 인상적인 골 순위 5위에 올랐다.

이 대회에서 한국이 8강에 오른 것은 1987년 캐나다 대회 이후 22년 만이다. 캐나다 대회 8강 멤버는 신태용, 노정윤, 서정원 등으로 한국 축구사에 이름을 남길 만한 선수들이다. 손흥민은 이들 선배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대회 직후 함부르크 유소년 팀에 입단했고, 2010~11시즌 개막을 앞두고 펼쳐진 프리 시즌 경기에서 아홉 골을 몰아넣는 놀라운 활약을 펼쳤다.

30년의 시간 차이와 성장 속도의 차이

▲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하던 당시의 차범근 선수. ⓒ대한매일

손흥민이 이같은 압축 성장 과정을 밟을 수 있는 것은 시대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잠시 시계바늘을 30여 년 전으로 돌려보자. 1978년 12월 국내 스포츠계는 차범근의 서독 분데스리가 진출 소식으로 떠들썩했다. 1962년 백인천이 일본 프로야구 도에이 플라이즈에 입단한 이후 가장 크게 화제를 모은 뉴스였다. 그때 차범근의 나이는 이미 20대 중반에 접어든 스물다섯 살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시절이었다.

차범근은 경신고에 다니던 1971년 청소년 대표로 선발되어 일본에서 열린 제13회 아시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 출전했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이스라엘에게 0-1로 져 준우승했다. 이때 이스라엘은 AFC(아시아축구연맹) 회원국이었다. 아시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는 1959년 AFC 회장인 말레이시아의 압둘 라만 총리가 주창해 창설된 아시아 지역의 유일한 청소년대회였지만 유럽 쪽 스카우트 관계자에게는 관심 없는 대회였다. 차범근은 고려대 1학년 때인 1972년 제14회 대회(태국)에 출전했으나 또다시 이스라엘에게 0-1로 져 준우승에 그쳤다.

청소년 수준을 넘어서는 뛰어난 기량을 갖고 있었던 차범근은 대회 직후 곧바로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어 그해 5월 방콕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안컵에 이세연, 김호, 이회택 등 선배와 함께 출전했다. 19세 때였다. 이 대회 크메르(캄보디아)전에서 4-1로 이길 때 박수덕, 이회택에 이어 3번째 골을 넣어 A매치 첫 골을 기록했다. 같은 해 7월 콸라룸푸르에서 열린 제16회 메르데카배국제축구대회 결승에서는 하프라인부터 단독 질주해 2-1로 우승을 확정하는 결승골을 터뜨렸다. 

1976년 제6회 박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 말레이시아 전에서는 후반 7분을 남겨놓을 때까지 1-4로 뒤지던 경기를 남은 시간 동안 세 골을 몰아쳐 4-4 무승부로 만드는 등 탈(脫)아시아 수준의 경기력을 보였으나 차범근의 활동 무대는 아시안컵, 메르데카배대회, 킹스컵, 박대통령배대회 등 아시아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다.

손흥민이 지난해 출전한 FIFA 17세 이하 월드컵은 제1회 대회(중국)가 1985년에 열렸고, 20세 이하 선수들이 참가하는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요즘의 FIFA U-20 월드컵)는 1977년에 제1회 대회(튀니지)가 펼쳐졌다. 아시아 지역 선수가 축구의 본고장으로서 오래전부터 수준 높은 프로축구가 성행하고 있던 유럽 무대로 나아갈 기회를 잡기가 매우 어려운 여건이었다.

그러나 차범근은 1978년 5월 도쿄에서 벌어진 재팬컵 등 유럽 쪽 관계자에게 자신의 기량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몇 번 되지 않는 기회를 살렸고 그해 12월 분데스리가 다름슈타트와 가계약을 맺고 한국 축구 선수로는 처음으로 유럽의 그라운드를 누볐다.

차범근은 이후 공군 복무 잔여 기간을 마친 뒤 1979년 6월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했다. 1983년에는 당시 기준으로 분데스리가 최고액 이적료인 1백35만 마르크에 레버쿠젠으로 이적했고, 1989년 은퇴할 때까지 리가 통산 98골을 기록하며 최고의 외국인 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1986년에는 33세의 나이로 처음이자 마지막인 멕시코월드컵에서 뛰었ㄷㅏ. 이때 차범근의 월드컵 대표팀 합류를 반대하는 의견이 적지 않았던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학원 스포츠 vs 비학원 스포츠

시계바늘을 다시 원위치로 돌려보자. 차범근은 중·고교와 대학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학원 스포츠 출신이다. 청소년 대표와 국가대표로 이어지는 이른바 엘리트 코스를 빠른 속도로 이수했다. 

반면 손흥민은 성장 과정이 특이하다. 종목을 막론하고 국내 스포츠의 큰 줄기인 학원 스포츠를 거치며 성장하지 않았다. 축구 선수 출신인 아버지의 개인 지도를 받으며 트래핑·드리블·슈팅 등 기본기를 닦았고 요즘도 여전히 아버지와 1 대 1 축구 수업을 한다. 손흥민의 최종 학력은 동북고 1학년 중퇴이다. 운동선수의 경우 타고난 재능을 어떻게 살려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본보기를 손흥민은 제시하고 있다. 

손흥민의 발전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내년 1월 카타르 도하에서 열리는 2011년 아시안컵을 앞두고 국가대표 후보 선수들을 눈여겨보고 있는 조광래 감독은 11월 분데스리가 일정에 맞추어 독일로 갈 예정이다. 손흥민 또래로 역시 축구 팬의 주목을 받고 있는 네덜란드 리그 아약스의 석현준은 지난해 9월 이란 전 때 국가대표팀에 한 차례 소집되었다. 손흥민은 이때 발가락 골절 부상으로 조감독의 부름을 받지 못했다.

일부에서는 유소년 또는 청소년 시절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다가 이후 기량이 정체되어 평범한 선수가 된 사례를 들며 손흥민에 대한 지나친 평가와 기대를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그같은 사례는 나이를 속이고 활동한 경우가 상당수이다. 손흥민으ㄴ ‘현재 수준의 발전 속도라면’ 그리고 ‘한국이 지역 예선을 통과한다면’이라는 두 가지 전제 조건이 붙기는 하지만, 스물두 살의 어린 나이에 월드컵 무대를 밟을 수 있다. 자기 관리를 잘하고 부상 등 돌발 변수가 없으면 서너 차례 월드컵에 나설 수도 있다. 열여덟 살 소년의 유쾌한 도전은 쭉 이어진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