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 조 철 (2001jch@sisapress.com)
  • 승인 2010.11.29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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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나 전쟁에 대비한 선제적 행위의 정당성에 대한 고찰

 

▲ 선제 공격 - 양날의 칼 / 앨런 더쇼비츠 지음 / 바이북스 펴냄 / 428쪽│2만2천원

연평도 주민들의 피난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들만 ‘제2 한국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국지전이라고 말하지만, 온 국민은 한때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그렇지 않아도 쫓기며 살아가는 한국인들이 이번 사태로 포격에 대한 불안까지 느끼며 살아야 하는 형국이다. 어떤 이는 왜 계속 당하고만 사느냐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오래전에 국방부장관이 ‘선제 타격’을 천명했던 터라 왜 실천을 하지 않느냐며 ‘국뻥부장관’이라고 비난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왜 선제 타격을 하지 못했을까? 우리 군이 무능해서일까? 아니면 너무 신중해서일까? 최근 출간된 <선제공격>이 이를 ‘해명’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9·11 테러와 영국 지하철 테러, 미국의 대이라크 전쟁과 이란·북한의 핵무기 개발 등 오늘날 국제 사회는 수많은 테러와 전쟁의 위협 속에 노출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들을 이해관계 없이 따질 수 있는 공신력 있는 국제 기구나 국제법적 논의는 거의 없다. 그래서 <선제공격>의 저자는 테러나 전쟁에서 선제적인 행위들에 대한 구체적이고 정량화된 국제법 제정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테러 용의자에 대한 구금이나 추방, 위험인물에 대한 표적 살해, 생화학 테러를 대비한 예방 접종, 자국을 위협하는 적국에 대한 선제 공격, 긴박하지는 않지만 잠재적 위협을 가하는 적국에 대한 예방적 전쟁 등을 실행하는 데 국제 사회의 충분한 논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논의를 하는 데 어떠한 정량적 계산이 필요한지를 언급했다. 적국, 또는 테러 용의자에 대한 정보의 신뢰도, 위험의 가능성과 임박성, 예상되는 위해의 정도와 그 위해 대상에 대해 예방적 행위를 가했을 때 발생하는 희생이나 결과 등을 수치로 계량화해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전세계가 공유할 수 있는 선제적 행위들의 정당성을 만드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2002년에 개봉된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범죄가 일어나기 전 범죄를 예측해 범죄자를 처단하는 가상의 최첨단 치안 시스템 프리크라임을 선보여 화제가 되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2054년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이다. ‘정량적 계산’도 잘 되지 않는 지금,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정당 방위’처럼 국가 간에도 자국에 위해가 된다면 선제 공격이나 예방적 전쟁을 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이 문제가 단순히 옳고 그름의 이분법적 구분으로 판가름할 문제는 아니라고 말했다.

세계 각국의 이해관계가 서로 첨예하게 대립되는 상황에서는 선제 공격의 잘잘못에 대해 결국 강대국들이 ‘객관적이고 공평한’ 평가를 내릴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실제로 연평도 사태에서 미국의 입장과 중국의 태도가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을 보면 우려는 현실로 다가온다. 만일 선제 타격을 했거나, 북한의 도발에 따른 북한 해안포 기지에 대한 정밀 타격을 가했다면 지금보다 더한 국제적 논쟁을 불러일으켰을지도 모른다.

결국 ‘선제 타격’을 하고 싶어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것이 처절한 현실인 것이다. 당하고만 살 수는 없는데, 선제 타격도 이렇게 어려운 것이다. 전쟁주의자가 아닌 이상 전면전을 부를 수도 있는 실제 선제 공격이나 예방적 전쟁을 쉽게 거론할 수는 없다는 데에서, 이 책은 다소 평화주의적이다. 

 

ⓒ문학동네 제공

잊힐 뻔했다. 다른 여성 작가들이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고 바쁘게 독자들과 소통하고 있을 때, 은희경 작가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물론 조용히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알고 있었겠지만, 은작가의 작품을 기다리는 독자들은 조금 어리둥절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새 장편소설이 나온 것이 5년 만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이었어요.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여덟 시간을 울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뒤 우연히 〈소년을 위로해줘〉라는 노래를 듣게 됐지요. 듣고 있는 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한 삼십 분쯤은 내내 가슴이 아팠던 것 같아요. 그리고 우체국 가는 길에, 왜 그때 그렇게 오래 울었는지 다시 또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소설로 써보고 싶어졌어요.”
그 노래가 작가를 위로한 것이리라. 위로를 받은 작가는 5년 동안 소설 <소년을 위로해줘>(문학동네 펴냄) 쓰기에 매달렸던 것이다. 작가는 “사실 나는 위로를 잘 믿지 않는다. 어설픈 위안은 삶을 계속 오해하게 만들고 결국은 우리를 부조리한 오답에 적응하게 만든다. 그 생각은 변함없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하게 되었다. 시간은 흘러가고 우리는 거기에 실려간다. 삶이란 오직, 살아가는 것이다. 사랑이란 것이 생겨나고 변형되고 식고 다시 덥혀지며 엄청나게 큰 것이 아니듯이 위로도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러니 잠깐씩 짧은 위로와 조우하며 생을 스쳐 지나가자고 말이다”라고 삶에서 얻는 위로에 대해 이야기했다.
절대로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는 타인과 세상을 작가의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또 하나의 몸짓이 이 작품인 셈이다. 작가는 “위로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고 결국은 혼자인 우리는, 결국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타인을, 그래서 결국은 자신까지를 위로하고 오직,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라고 부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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