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밀착’으로 몸 낮춘 로맨틱 코미디의 부활
  • 최광희│영화 저널리스트 ()
  • 승인 2010.11.29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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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릴러 일색이었던 한국 영화계에 신선한 트렌드로 자리 잡아

 

▲ ⓒ 싸이더스FNH 제공

 한국형 로맨틱 코미디가 부활했다. 지난 추석 시즌에 개봉해 2백7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시라노; 연애조작단>을 필두로 로맨틱 코미디 영화들이 잇따라 개봉하고 있다. <불량남녀>(11월4일 개봉), <이층의 악당>(11월25일 개봉), <쩨쩨한 로맨스>(12월2일 개봉), <김종욱 찾기>(12월9일 개봉) 등이 로맨스와 웃음을 무기로 늦가을 극장가를 공략 중이다. 최근 2~3년 사이 한국 영화계에는 스릴러 쏠림 현상이 두드러졌다. 반면, 로맨틱 코미디는 한물간 장르로 여겨진 것이 사실이다. <시라노; 연애조작단>을 제작한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가 “로맨틱 코미디라는 이유 때문에 투자받기가 힘들었다”라고 귀띔했을 정도이다.

이런 사정 때문인지 잇따르는 로맨틱 코미디들은 이전과는 다른 흥행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단순히 남녀 간에 벌어지는 ‘티격태격 아옹다옹’의 로맨틱한 상황을 보여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의 피부에 와 닿기가 쉬운 ‘생활 밀착형’ 설정을 담고 있다. 주인공들이 넉넉한 환경이 아니라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드라마의 현실적 개연성을 높이는 요소로 작용한다.

임창정과 엄지원이 호흡을 맞춘 <불량남녀>는 제목 그대로 신용불량 상태인 남녀가 만나 원수처럼 다투다가 사랑에 빠지게 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싸우다가 정분 난다’는 로맨틱 코미디의 전형성은 그대로 따라가되, 남자 주인공을 허구한 날 빚 독촉에 시달리는 형사로, 여자 주인공을 역시 빚더미에 시달리다가 금융회사의 채권 추심팀 직원으로 일하게 된 인물로 설정했다. 그야말로 ‘톰과 제리’의 관계인 두 사람은, 서로에게 으르렁대다가 시나브로 연민의 정을 키우게 된다.

카드 결제일과 융자 상환일의 무게에 일상적으로 시달리는 현대인들의 정서를 반영한 가운데 로맨틱 코미디 특유의 재미를 뽑아내려는 설정이다. 다만 이 설정이 상투성에 매몰되어 흥행 면에서는 부진했다.

<달콤, 살벌한 연인>(2006년)의 손재곤 감독이 연출한 <이층의 악당>은 이제는 중견 배우가 된 한석규와 김혜수를 앞세워, 역시 생활형 로맨틱 코미디를 선보인다. 여주인공 연주(김혜수)는 남편과 사별하고 유산으로 남겨진 이층집에서 홀로 중학생 딸을 키우는 30대 중반의 싱글맘이다. 이 집의 이층에 소설가를 사칭한 문화재 밀매업자 창인(한석규)이 셋방살이를 시작한다. 속셈은 연주의 전 남편이 집 안 어딘가에 숨겨 놓은 엄청난 보물을 찾겠다는 것.

로맨스보다 생활 속 애환에 더 천착해

영화는 음모를 숨긴 남자와 외로움과 우울증 끝에 이 남자를 가슴에 품게 된 여자 사이의 서스펜스 넘치는 로맨스를 펼쳐 놓는다. 남자의 정체를 의심하게 된 여자와 들킬까 봐 노심초사하는 남자의 해프닝이 웃음을 뽑아내는 전략이다. ‘티격태격 아옹다옹’이라는 로맨틱 코미디 공식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되, 보증금과 임대 기간을 놓고 입씨름을 하는 등 생활 밀착형 대사와 설정으로 상투성을 솜씨 좋게 피해간다. 이 과정에서 남녀 주인공과 이 집의 딸까지, 등장인물들이 마치 하나의 가족이 되어 있는 듯한 모습으로 변모하는데, 경제 공동체이기도 하고 유일한 화풀이 공간으로서의 ‘가족’의 현실적 단면을 슬쩍 얹으며 아이러니한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낸다.

이같은 생활 밀착형 로맨틱 코미디의 전조는, 올 상반기에 개봉했던 <내 깡패 같은 애인>에서부터 목격되었다. 20대 여성 실업자와 불량배를 동병상련의 처지로 설정한 이 작품은, 이 시대의 관객들이 느끼는 생활 속의 애환에 더 구체적이고도 생생하게 다가가는 것이 한국형 로맨틱 코미디의 새 트렌드가 될 것임을 미리 암시한 셈이다. 지금은 그 트렌드가 대세가 되었다.  


 “여의도는 뻔해요. 국회 다니는 사람, 아니면 방송국, 아니면 주식쟁이들이죠”라는 대사는 제목의 의미를 설명한다. 대한민국의 자본을 떠받치는 상징 조직 업무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마천루에 밀집한 채 서로가 서로를 착취하며 불야성을 이루는 곳이 바로 여의도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지폐가 불타는 모습과 함께, 대방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자기 가족을 그려 소개한다. 아빠는 펀드 매니저, 엄마는 아파트 최고 미인이란다. 아이는 중산층 가족의 이상향에 대해 말하고 있다. 경제력 있는 남편과 아름답고 현숙한 아내, 그리고 그런 부모를 자랑스러워하는 아들. 그러나 이후 영화가 보여주는 이들의 삶은 그러한 이상을 정면으로 배반한다. 남편은 사채 빚과 해고 위기에 시달리고, 아내는 성매매를 하다가 남편에게 들킨다. 이때 남편의 옛 친구가 찾아오고, 의문의 살인 사건들이 일어난다. 

<여의도>는 ‘심리 스릴러’로 소개되고 있지만, 사실은 ‘사회극’이다. ‘심리 스릴러’라 하기에는 형식이 너무 뻔해서, 누구라도 그 단순함을 비웃을 수 있다. 영화 자체도 반전이나 스릴러 형식에 그다지 무게를 두고 있지 않다. 옛 친구는 첫 등장이나 차림새부터 판타지적이고, 비밀은 쉽게 밝혀진다. 클라이맥스에 해당되는 마지막 살인은 아무런 판타지의 외피 없이, 백주에 회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남편에 의해 직접 자행된다.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가족이 놓인 참혹한 현실이다.

외환위기 직후 영화 <베사메무초>는 경제난으로 붕괴 위기에 몰린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후 수년간 “아빠 힘내세요~”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외환위기 극복이 선언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뿌리내린 신자유주의 체제는 평범한 이들에게 점점 더 많은 경제적 공포를 안길 뿐이고, 아빠들은 ‘슈퍼맨의 비애’를 짊어진 채 “누가 나를 미치게 하는가”를 외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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