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함께 ‘도발’도 세습
  • 김지영 (young@sisapress.com)
  • 승인 2010.11.29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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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승계 과정 때마다 대형 사건 터뜨려…간첩 침투·테러에서 선제 공격으로 양상 변화

 

▲ 북한 김정일(가운데) 국방위원장이 후계자인 김정은(왼쪽 두 번째)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과 함께 자강도 희천발전소 건설장을 현지 지도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이 지난 11월4일 보도한 사진이다. ⓒ연합뉴스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다시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북한의 권력 이양기마다 한반도에는 전운이 짙게 감돌았다. 북한의 대남 무력 도발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는 모두 이때였다. 김일성 주석이 장남 김정일을 자신의 후계자로 처음 ‘낙점’한 1964년과, 후계자로 ‘내정’한 1974년 그리고 후계자로 ‘공식 확정’한 1980년을 전후해서 어김없이 북한의 대대적인 대남 도발이 벌어졌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김일성 주석의 차기 후계자로 ‘조심스럽게’ 점쳐지기 시작한 시점은 1964년 4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지도원을 맡으면서였다. 이후 ‘유력한 후계자’로 부상한 것은 1969년 9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선전선동부 부부장에 오르면서였다. 그 직전인 1968년 한 해는 한국전쟁 이후 북한의 대남 도발이 최고조에 달했던 때였다. 북한의 무장 공작원 31명이 청와대 기습을 목표로 서울에 침투한 사건이 발생했다. 1968년 1월21일 밤 10시께, 서울 세검정에서 청와대로 가는 도중 발각되어 31명 가운데 28명이 사살되었고 2명이 행방불명되었다. 당시 생포된 한 사람은 현재 목회 활동을 하는 김신조 목사이다. 이 ‘1·21 사태’가 터진 지 불과 이틀 뒤인 1월23일에는 미 해군의 정보 수집 보조함 ‘푸에블로호’가 동해의 공해상에서 북한 초계정에 의해 나포되었고, 그해 12월23일이 되어서야 승무원 83명 전원이 석방되었다. 그해 대남 도발의 정점은 10월30일부터 11월2일까지 무장 공작원 1백30여 명이 울진과 삼척으로 침투한 ‘울진·삼척 지구 무장 공비 침투 사건’이었다. 군·경 소탕 작전으로 1백10명이 사살되고, 일곱 명이 생포되었다. 우리 군과 민간인도 70여 명이나 사망하는 등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김정일 후계자 확정 후 KAL기 폭파 등 자행

▲ 1983년 10월 북한의 버마 아웅산 테러로 인해 무너진 건물의 잔해. ⓒ연합뉴스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로 ‘내정’된 것은 1974년 2월 노동당 정치위원회 위원에 오르면서부터였다. 그해 8·15 경축식장에서 경축사를 낭독하던 박정희 대통령을 일본 조총련의 지령을 받은 재일 교포 문세광이 저격했으나 불발에 그쳤고, 육영수 여사가 머리에 총상을 입고 운명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해 11월에는 ‘제1 땅굴’이 발견되었다. 1976년 8월에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미루나무 가지 치기를 하던 노무자들의 작업을 감독·경비하던 미군 장교 2명이 북한 경비병들에게 피살된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북한과 미국은 일촉즉발의 전면전 직전까지 갔다.

김정일이 후계자로 ‘공식 확정’된 것은 1980년 10월 노동당 비서와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에 올랐을 때였다. 이때부터 김정일이 ‘실질적으로’ 대남 전략을 진두지휘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은 김일성의 무장 공작원 침투 전술 대신 ‘테러 전술’을 채택했다. 김정일이 후계자로 전면에 등장한 지 3년째 되던 해인 1983년 10월 ‘아웅산 묘지 테러 사건’을 일으켰다. 버마(현 미얀마)를 방문 중이던 당시 전두환 대통령과 정부 요인들의 암살을 목적으로 아웅산 국립묘지 묘소 천장에 북한 공작원이 원격 조정 폭탄을 설치했고, 이것이 폭발하면서 현장에서 서석준 부총리를 포함한 정부 요인 17명이 사망했다. 우리 정부는 당시 이 사건을 “김정일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라고 발표했다. 그해 12월에는 북한 무장 간첩선이 부산 다대포 앞바다로 침투하려다 격침된 사건까지 발생했다. 1987년 11월29일에는 ‘대한항공(KAL)기 폭파 사건’이 있었다. KAL기가 아부다비를 떠나 서울로 오던 중 버마 근해 안다만 해역 상공에서 폭파되어 탑승자 1백15명이 전원 사망했다. 당시 정부는 “김정일의 지령을 받은 김승일(70세)과 김현희(26세)의 소행이다”라고 발표했다. 

“연평도 포격, 김정일이 아들에게 준 선물”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서독이 동독을 흡수·통일하는 한편,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도미노처럼 붕괴되는 장면을 지켜본 북한 수뇌부도 상당한 위기의식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1990년 9월 열린 ‘제1차 남북 총리급 회담’에 적극적이었고, 1991년 12월에는 ‘남북 화해 불가침 교류 협력에 관한 기본 합의서’를 채택했다. ‘겉으로는’ 한반도에 해빙 무드가 조성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북한은 그런 와중에도 핵무기 개발에 돌입했다. 김정일 위원장은 1992년 ‘원수’ 칭호를 받았고, 1993년 4월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올랐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특별 사찰 요구에 반발한 북한이 핵확산방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면서 ‘제1차 북핵 위기’가 초래된 시점도 1993년 3월이었다. 김위원장은 이듬해 7월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명실상부한 북한의 최고 권력자로 등극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북한군 장교 출신인 최주활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은 “김정일이 공식적으로 떠오른 1970~80년대에 벌어진 대남 도발 사태는 당시 군부에서도 사태가 벌어진 이후에나 알 수 있었다. 나중에 그러한 것들(대남 도발)은 모두 김정일의 업적이 되었다. 이번 연평도 사태도 결국은 김정은의 치적 쌓기용이며, 당과 군 수뇌부에서 몸값을 올리기 위한 전략으로 보인다”라고 분석했다.

김정일 위원장에서 김정은 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으로 이어지는 현재 권력 이양기의 대남 도발은 양상이 또 다르다. 지금은 침투나 테러 같은 간접 도발보다는 직접적인 선제 공격으로 국제 사회의 이목을 바로 집중시키는 한편, 남한 사회의 공포감과 혼란을 더욱 조장하는 효과를 노리고 있다. 지난 3월26일 발생한 ‘천안함 사태’와 이번의 연평도 포격 사건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지난해 11월10일 서해 북방 한계선 부근인 대청도 인근에서 한국 해군과 북한 해군 간에 일어난 ‘서해교전’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를 김정은식의 새로운 도발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는 분석도 나온다. 도발 방식이 테러나 침투에서 직접적인 선제 타격으로 바뀐 것은 지금 시대 흐름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김동현 존스홉킨스 대학 연구교수는 “일각에서는 김정은이 포 사격에 정통하다는 점을 들어 이번 도발을 김정은의 작품으로 보는 측면도 있으나, 이번 연평도 포격은 김정은의 독단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 아직도 북한 사회에서 김정일의 권력은 절대적이고, 그의 명령 없이는 군부가 움직일 수 없다. 하지만 결국 그 공은 고스란히 김정은에게 돌아갈 것이다. 즉,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일종의 선물인 셈이다”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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