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방궁’으로 썼다는 용산의 ‘제2 총독 관저’
  • 이순우┃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sisa@sisapress.com)
  • 승인 2010.12.06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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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만 전해지는 일제의 ‘불가사의한 건축물’

일제 강점기의 총독 관저(總督官邸)라는 곳은 식민 통치 권력의 정점에 섰던 조선 총독이 집무를 보고 살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던 공간이다. 조선총독부관제에 따르면 ‘조선을 관할하는 것’이 조선 총독의 존재 이유였으므로, 그의 통치하에서 벌어진 조선인에 대한 수탈과 탄압은 전적으로 그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 1930년 정문에서 촬영한 용산 총독 관저. ⓒ이순우┃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그렇다면 이러한 식민 지배의 본거지였던 총독 관저가 있던 자리는 과연 어디였을까? 이에 관한 연혁을 정리하면, 최초의 총독 관저는 남산 왜성대(南山 倭城臺)에 인접한 곳에 있었다. 원래 이곳은 1885년 이래로 일본공사관(지금의 서울 중구 예장동 2-1번지)이었다가 이른바 ‘을사조약’의 여파로 1906년 2월 이후 ‘통감 관저’로 바뀐 공간이었다. 특히 이곳은 한일병합조약의 체결이 강요된 ‘경술국치의 현장’으로도 잘 알려진 장소이다.

일제에 의한 식민 통치가 개시된 1910년부터는 이곳이 다시 ‘총독 관저’로 전환되었고, 한참 후인 1939년 9월22일에 경복궁 뒤편 경무대(景武臺) 총독 관저가 신축되는 것과 더불어 그곳으로 옮겨질 때까지 그 기능이 그대로 이어졌다.

그런데 이 두 장소 말고도 지금의 서울 용산역과 국립중앙박물관의 중간쯤에 또 하나의 총독 관저가 있었다. 지금의 용산 미군 기지 안에 포함된 이곳은 일제 때의 지번(地番)으로는 ‘한강통 11-43번지’에 해당하는 위치이다. 이 건물은 1908년에 착공해 그 이듬해에 완성되었고, 1945년 광복 당시의 시점까지 그대로 존재했다. 요컨대 일제 강점기 내내 서울에는 두 군데의 총독 관저가 있었던 셈이다.

▲ 1915년에 촬영한 용산 총독 관저. ⓒ이순우┃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후지무라 토쿠이치(藤村德一)가 정리한 <거류민지석물어>(1927)라는 책에는 이 건물의 건립 내력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세간에 용산의 아방궁(阿房宮)이라고 불리는 것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씨가 일찍이 러일전쟁 직후 한국주차군사령관으로 경성에 재임 중에 러일 전역비의 잉여금 50만원을 들여 군사령관 관저로 하고자 건설했던 것임에도, 당사자인 하세가와 씨는 물론이고 아직 그 누구도 이곳에 거처를 정한 바가 없는 불가사의한 건축물이다.”

후지무라는 너무 웅장·화려하게 설계된 탓에 전등료만 한 달에 4백여 원이 들 만큼 막대한 유지비가 드는 이곳을 예산 낭비의 대표적 사례로 지목하면서, 심지어 이곳을 불충관(不忠館)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혹평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하세가와는 러일전쟁 직후 한국주차군사령관으로 부임해 1908년까지 재임하면서 국권 피탈의 주역으로 나섰고, 1916년에는 제2대 조선 총독으로 다시 조선에 건너와 무단 통치를 펼친 것으로 악명을 떨쳤던 인물이다.

여기에서 보듯이 당초 일본군 사령관의 관저로 지어진 이 건물은 느닷없이 통감 관저로 바뀌기에 이른다. 대한매일신보 1910년 3월16일자에 수록된 기사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작년 12월에 필역된 용산 일군 사령관의 숙사는 기지가 6백여 평이오 그 집 짓는 부비가 오십만원에 달하였는데, 그 집 제도가 극히 굉장하므로 이 집을 통감의 관사로 쓰고 일본군 사령관의 숙사는 다시 짓기로 지금 의론하는 중이라더라.’

이와 아울러 통감 관저를 용산으로 이전할 때 남산 왜성대에 있는 통감부까지도 함께 옮길 것을 검토했으나 이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이곳의 위치가 서울 시내와는 동떨어졌으므로 업무상 불편이 크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 때문인지 통감 관저로 전환된 이후에도 이곳이 집무나 거처를 위한 공간으로 사용된 흔적은 아예 찾아볼 수 없다.

천황의 ‘이궁’으로 쓰려 했다는 기록도

▲ 제2대 조선 총독을 지낸 하세가와 요시미치. ⓒ이순우┃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그저 드문드문 보이는 것은 이곳에서 벌어진 연회와 접대에 관한 기록들이다. 가령 1910년 7월 테라우치 통감이 부임했을 때 축하 피로연이 벌어진 장소가 바로 용산 관저였다. 그리고 경술국치 이후로는 천장절 축하연이나 만찬회 따위가 개최되었고, 그때마다 창덕궁 이왕으로 격하된 순종 황제가 몸소 이곳까지 행차했다는 기록도 자주 눈에 띈다.

또한 이곳 용산 총독 관저는 우리나라를 찾은 일본 황족이나 서양의 귀빈들을 위한 숙소와 연회 장소로도 간혹 사용된 적이 있었다. 평상시에는 거의 비어 있는 공간이다 보니, 그때마다 대대적으로 건물을 수리하고 조경 공사를 했다는 내용의 신문 기사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1926년 10월 신혼여행 길에 오른 스웨덴의 구스타프 황태자 부처가 조선에 들렀을 때 그를 위한 대대적인 환영 연회가 벌어진 것도 이곳이었다. 구스타프 황태자는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경주에 들러 고분 발굴에 직접 참여했고, 이 일로 인해 금관이 출토된 해당 고분에는 ‘서봉총(瑞鳳塚)’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제법 알려진 사실이다.

용산 총독 관저는 이처럼 시설과 규모가 번듯하나 지나치게 화려하고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덩치가 큰 탓에 오히려 처치 곤란한 신세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의 감독이었던 토쿠토미 소호(德富蘇峰) 같은 이가 한때 이곳을 일본 천황의 이궁(離宮)으로 사용하는 것이 최상이라고 설파한 대목은 이러한 형편을 타개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매일신보 1935년 7월11일자에 수록된 기사에 따르면, 그 무렵의 용산 총독 관저가 새삼스럽게 새로운 총독 관저의 후보지로 거론된 사실이 엿보인다. ‘왜성대에 있는 총독 관저는 연유가 있는 건물이나… 관저 신축은 재정 긴축을 부르짖고 있는 이때이므로 할 수 없다는 의론으로 현재는 거리적으로 불편한 것과 경비 관계로 공식 연회 이외는 사용치 않고 내버려두는 용산 관저의 일부를 개조하자 하여 명년도에 6만~7만원으로써 일부 개조를 하고 별동으로 일본식으로 증축하여 신관저로 사용하기로 되어 예산을 요구하려고 준비 중이다.’

하지만 이 계획 역시 실현되지 않았고 그 대신에 선택된 것이 지금의 청와대 자리인 경무대 총독 관저였다. 아마도 용산 관저가 너무 외진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기존 건물의 운영에 적지 않은 비용이 수반된다는 점이 고려된 결정이 아닌가 여겨진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제7대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1936년 가을 이후 해마다 80세 이상의 장수 노인(長壽 老人)을 전국에서 초대해 성대한 경로 잔치를 벌였다는 사실이다. 국민 정신 작흥과 경로 사상 고취를 명분으로 내세운 이 행사가 꼬박꼬박 개최된 공간이 바로 용산 총독 관저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건물은 언제까지 남아 있었던 것일까? 1960년대에 촬영된 항공 사진 자료에는 이미 그 자리에 용산 기지 내 미군 병원 시설이 들어선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저 한국전쟁 시기에 파괴된 것이 아닌가 짐작할 뿐 아무도 이 유령의 집과 같은 용산 ‘아방궁’의 최후를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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