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의 환생’을 꿈꾸는 푸틴
  • 조홍래│편집위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0.12.27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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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TV 회견에서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력 구조 선언…반체제 인사 등 저항 세력에 탄압도 강화

 

▲ ⓒEPA

“레닌이 돌아왔다.” 요즘 러시아인들이 자주 내뱉는 한탄이다. 1989년 소련이 붕괴한 이후 20년간 서구식 자유를 맛보았던 러시아인들에게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의 최근 모습은 악몽으로 다가온다. 푸틴은 12월16일 4시간30분간 질의 응답 형식으로 이루어진 TV 회견을 통해 중앙집권적 권력 구조를 선언했다. 경찰이 소수 민족을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지적에 “극단주의는 중단되어야 한다. 경찰을 음해하는 행위는 용납하지 않겠다”라고 대답했다. 소수 민족의 불만을 극단주의로 규정하는 푸틴의 시각에 청취자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결국 핵심은 국가 권력을 강화하겠다는 말이다. 그는 국가는 다수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소수의 인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푸틴은 느닷없이 금융 사기 혐의로 1백50년 징역형을 받은 미국의 금융 재벌 버나드 메이도프의 예를 들면서 러시아의 석유 재벌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를 사법 처리한 조치를 정당화하고 미국식 자본주의를 비웃었다. 그는 “도둑은 감옥에 가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호도로코프스키는 2003년 탈세 혐의로 체포되어 8년 징역형을 받고 복역 중이며 곧 형기가 끝날 예정이나 그의 신병 처리에 대한 법원 판결을 며칠 앞두고 나온 푸틴의 발언을 감안할 때 그가 실제로 석방될지는 불확실하다. 러시아 최대 석유회사를 경영하면서 부를 축적한 그는 지지 세력을 모아 한때 푸틴의 정치적 경쟁자로 떠올랐다. 많은 사람은 그를 단죄한 것이 장기 집권을 노리는 푸틴의 음모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다.

권력욕 드러내며 ‘실질적 대통령’ 증명

푸틴은 이날 회견에서 자신만만하고 대담했다. 주로 경제 문제에 집중된 질문은 각본에 맞춘 듯 푸틴을 치켜세우는 찬사로 가득했다. 그는 수많은 질문에 메모를 보지 않고 대답했다. “성공의 비밀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그것은 비밀이다”라고 답변하는 식으로 시종 여유와 유머를 보였다. 푸틴은 3년 전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준 후 총리를 맡아 총리 이상의 역할을 해왔다. 실질적인 대통령이라는 것이 중평이다. 

메드베데프는 최근 경제 개혁안을 발표하고 부패와 정치적 유착을 청산하지 않으면 러시아가 정치·경제적으로 퇴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개혁안은 서방에서도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얼마 후 개혁안을 슬그머니 철회했다. 푸틴은 이 개혁안이 못마땅한 듯 메드베데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이 국가를 통치할 뿐만 아니라 그것도 “내 손으로 하고 있다”라고 자랑했다. 메드베데프를 무시하는 말투이다. 이날 회견장에 참석한 메드베데프의 존재는 러시아 정치의 미스터리로 비쳤다. 2012년에 누가 대통령에 출마할 것인가 하는 의문은 이날 두 사람의 어색한 동석 때문에 더욱 증폭되었다. 푸틴은 자신과 메드베데프가 다 잠자고 있을 때는 누가 나라를 통치하느냐는 질문에 “우리는 교대로 잔다”라고 답해 폭소를 자아냈다. 그러나 많은 관측자는 푸틴의 속셈을 읽을 수 있었다.

푸틴은 즉흥적 답변을 통해 속내를 드러냈고, 그 어조는 많은 사람을 경악시킬 정도로 단호하고 직설적이었다. 한 청중이 최근 시골 마을에서 일어난 범죄 두목과 지방 관청 간의 유착 관계에 대해 질문했다. “모든 정부 시스템이 망가진 사례이다”라고 푸틴은 대답했다. 그러면서 2004년에 주지사 직선제를 폐지한 자신의 조치를 옹호했다. 직선제를 그냥 두면 검은돈이 선거에 영향을 주고, 결국 정치를 부패시킨다는 것이 푸틴의 설명이다. 발언의 핵심은 강력한 중앙 정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통령 후보로 유력시되는 세 명의 야당 정치인에 대해 질문을 받은 푸틴은, 문제의 세 사람은 러시아를 1990년대로 되돌리려는 썩은 정치인들이라고 말했다.

정치와 권력에 대한 푸틴의 생각은, 가명의 스파이로 미국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동료의 이름을 누설한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러시아 정보 기관은 첩보원이 국익을 위해 한 행동에 대해서는 절대로 책임을 묻지 않지만 배신자는 용서하지 않는다고 푸틴은 말했다. 옛 소련의 비밀경찰인 KGB 출신인 푸틴은 이렇게 덧붙였다. “친구와 동료를 배신한 인간들과 함께 살 수는 없다. 그들의 자손들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가? 돼지 같은 인간들.”

이날 회견을 지켜본 러시아인들은 러시아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종착역에 접근하고 있다는 충격을 받았다. 강력한 국가와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향하는 푸틴의 야망은 마침 반체제 인사들과 소수 민족의 저항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는 것과 때를 같이해 그 얼굴을 드러냈다. 이를 뒷받침하는 정황들은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푸틴의 강압적 통치를 비판하던 일단의 학자들이 체포되었다. 국제적 과학 협력을 추진하던 단체들은 철퇴를 맞았다. 야당과 반체제 인사들의 전화와 이메일에 대한 검열도 강화되었다. 탄압이 가중되는 것과 비례해 푸틴의 권력 장악은 단단해졌다.

‘관리형 민주주의’ 적합하다며 과거로 회귀

▲ 지난 11월19일 러시아 상트페테르스부르크에서 열린 독립국가연합(CIS) 정상회담에 참석한 푸틴 총리. ⓒEPA

요즘 러시아에서는 지난 70년 동안 모두를 질식시켰던 잔혹한 경찰국가 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다. 어두운 과거로의 회귀 음모가 시작되지 않았나 하는 불안이 팽배하다. 사법 제도와 언론을 아무리 탄압한들 설마 소련 시대로 복귀하겠느냐는 전망에 희망을 거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낙관적 전망보다는 체념적 불안이 더 깊은 것이 문제이다. 러시아에는 서구식 민주주의보다는 ‘관리형 민주주의’(managed democracy)가 더 적합하다는 푸틴의 방침이 불안을 부채질한다.

정부의 고위직은 갈수록 군과 정보 기관 출신으로 채워지고 있다. 최근에 임명된 고관들은 냉전 시대의 사고 방식에 길들여진 사람들이다. 이들은 취임하자마자 본색을 드러냈다. 남부 시베리아의 한 대학 교수는 방사선으로부터 인공위성을 보호하는 기술 계약을 중국 회사와 체결했다는 이유로 반역죄로 기소되었다. 기술적 결함으로 잠수함이 좌초한 사건을 서방 스파이의 음모로 몰아갔다. 핵 폐기물을 바다에 버리는 러시아 함대를 취재한 일본 TV 방송에 협조한 종군기자도 대역죄로 처벌되었다. 러시아 과학원은 모든 연구 보고서를 발간하기 전에 사전 검열을 받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KGB의 후신인 연방보안서비스는 1995년부터 모든 웹사이트에 정보기관의 접속이 가능하게 하는 장치를 설정하도록 명령했다. 미국 정부는 러시아 관리들과 접촉하는 모든 외교관들에게 도청에 유의하라고 당부했다. 푸틴은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 이 연방보안서비스 국장을 역임했다.

푸틴은 보리스 옐친의 뒤를 이어 2000년 대통령에 취임했다. 2008년에는 8년의 임기를 마치고 3기 연임을 금지하는 헌법 조항에 따라 메드베데프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고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2012년에는 개정 헌법에 따라 다시 대통령에 출마할 수 있고 당선은 당연시되고 있다. 최근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전문에 의하면 미국은 소련 이후의 크렘린과 그 지도자 모습을 개략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 전문에 따르면 푸틴은 절대 권력에 집착하는 성격의 소유자이다. 푸틴은 그러나 개방된 러시아에 흐르는 민주주의와 자유의 물결을 두려워하고 있다. 또한 비틀거리는 경제와 가끔 자신의 명령도 거부하는 관료주의 그리고 고질화된 부패도 골칫거리이다. 혁명을 했다가 70년 만에 망한 레닌을 닮으려는 푸틴의 욕망은 숫한 아이러니와 모순을 안고 있다. 푸틴의 야심을 ‘불가사의’로 표현한 미국 외교 전문의 분석이 그래서 더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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