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땅 되살린 ‘큰 사랑’의 합창
  • 구수환│KBS PD·영화 <울지마 톤즈> 감독 ()
  • 승인 2011.01.10 20:1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울지마 톤즈> 구수환 감독이 수단 현지에서 돌아본 ‘진정한 성자, 이태석의 리더십’

고 이태석 신부, 지난해 9월9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가르쳐준 사람이 스크린을 통해 관객들과 만났다.

추석 명절 특수를 노린 대형 상업영화들이 속속 개봉한 상황에서 크게 주목받지도 못했고, 다큐영화가 성공한 사례도 드물어 흥행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한 사람만이라도 영화 속 주인공의 삶을 통해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뿐이었다. 그러나 개봉 첫날부터 좌석 점유율이 80%를 넘으며 쟁쟁한 상업영화들을 제치고 1위를 기록했다.

▲ 생전의 이태석 신부와 브라스밴드부 팀원이 손을 흔들며 웃고 있다. ⓒ사진제공 수단어린이장학회


영화 <울지마 톤즈>는 지난 12월 중순 영화계에서는 이례적으로 재개봉했다. 관객도 천주교 신자가 많았던 1차 개봉 때와는 달리 학생, 일반인이 대부분이다. 여기에 정부 부처, 지방자치단체, 기업의 단체 관람이 가세하면서 때아닌 열풍이 불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관객 30만명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영화평론가들은 다큐영화 30만명은 상업영화 3백만명과 맞먹는 숫자라고 말한다. 상영하는 극장 수가 상업영화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고 상영 횟수도 하루 1~2회, 그것도 아침 시간에 배치하는 등 열악한 조건에서 일구어낸 성과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신부가 살아 있을 때 그를 만난 적이 없다. 선종 소식을 접하고 자료를 찾는 과정에서 알게 되었다. 사실 주인공이 생존해 있지 않은 경우, 그것을 다큐멘터리 아이템으로 선택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이태석 신부는 김수환 추기경처럼 많이 알려진 분도 아니었고, 미디어와의 인터뷰도 거의 없어서 제작을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확보한 영상 자료와 가족, 지인들의 인터뷰를 검토해본 결과 그것만으로도 60분물의 다큐멘터리는 충분히 제작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섰다.

그렇지만 필자는 이태석 신부가 남긴 흔적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져 수백 명이 사망하는 등 상황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수단은 북(北)수단과 남(南)수단이 벌인 20여 년간의 내전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2005년 평화협정을 맺어 가까스로 총성은 멈추었지만, 내전이 끝나고 회수하지 못한 총 때문에 치안은 여전히 불안하다. 서울을 떠나 2박3일 만에 톤즈에 도착했다. 마을에는 변변한 건물 하나 없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다. 간이 상점이 있지만 물건을 사는 사람은 없다. 공동 펌프를 세워 지하수를 식수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너무나 지저분했다. 한낮의 기온은 50℃를 오르내렸다. 수도꼭지를 돌리면 뜨거운 물이 나왔다. 샤워를 하고 싶었지만 35℃나 되는 물 온도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밤만 되면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한다. 말라리아 때문이다. 수단의 말라리아모기는 가장 무서운 모기로 알려져 있다. 주민들의 사망 원인 1위도 말라리아이다. 살인적인 더위에 숙소는 찜통이나 다름없지만, 모기에 물리지 않기 위해 모기장을 치고 이불까지 덮고 자야 한다. 침대 바닥은 땀으로 흥건했다. 결국 새벽까지 뜬눈으로 지새웠다. 이태석 신부는 이런 곳에서 8년을 지냈다. 기가 막힐 뿐이었다.   

세상의 가장 가난한 곳을 찾아 떠난 의사

▲ 이태석 신부의 투병 시절 사진을 든 톤즈의 아이들이 슬픔에 젖어 있다. ⓒ사진제공 수단어린이장학회

이태석 신부는 톤즈의 유일한 의사였다. 그가 오기 전까지 사람들은 치료 한 번 받지 못한 채 죽어갔다. 의사가 왔다는 소문이 나자 병원에서 100㎞가 떨어진 곳에서도 걸어서 찾아왔다. 많을 때는 하루에 3백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환자도 다양했다. 내과, 외과, 산부인과, 피부과 등 종합병원 수준이었다. 그 가운데는 총상을 입은 군인들도 있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혼자서 감당했다.

그 와중에도 틈만 나면 찾아가는 곳이 있었다. 톤즈에서 차로 40분 거리에 있는 라이촉 마을이다. 그곳에는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살고 있다. 모두가 먹고살기 어려운 현실에서 누가 그들을 돌봐주겠는가. 그런데 그곳에 유일하게 찾아오는 사람이 있었다. 이태석 신부이다.

그는 외부와 단절된 채로 살아가고 있는 한센인들을 위해 현지어를 배웠다. 정확한 치료는 물론,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치료약을 줄 때는 복용 방법을 꼼꼼히 알려주었다. 그런 자상한 신부에게 한센인들은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대화 상대가 생긴 것이다.

한센인에 대한 그의 헌신은 정말 지극했다. 한센인들은 피부가 약해 쉽게 상처가 나는데, 이것이 악화되면 손과 발을 잘라내야 한다. 이신부는 맨발로 다니는 한센인을 위해 한 사람 한 사람의 발을 종이에 대고 그렸다. 신발을 만들어 신기기로 한 것이다. 이처럼 한센인을 지극 정성으로 보살폈지만 이신부는 오히려 조그마한 것에 감사할 줄 아는 한센인에게 많은 것을 배운다며 고마워했다.

신부가 떠난 후 마을은 다시 10년 전으로 돌아갔다. 치료약은 물론 찾아오는 사람도 없다. 필자는 그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고자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다. 이신부의 사진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한 한센인에게 사진을 쥐어주자 그녀는 여러 차례 사진에 입맞춤을 하며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이렇게 토해냈다.

“쫄리 신부님 때문에 너무 슬퍼요. 밤에 잠에서 깨면 울고 싶어져요. 신부님을 생각하며 울고 기도하다가 다시 잠들어요. 너무 슬퍼요. 신부님처럼 우리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아요. 밤에도 낮에도 신부님이 생각날 때마다 눈물이 나와요.”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는 절규처럼 다가왔다.

암 투병 중에도 수단의 아이들 걱정뿐 

내전 당시 수단은 죽음의 땅이었다. 아이들은 전쟁터로 내몰렸다. 그곳에서 남을 죽여야 내가 산다는 생존의 법칙을 배웠다. 이태석 신부는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총성 없는 전쟁을 시작했다. 학교를 지어 새로운 세상을 보도록 한 것이다. 집이 멀어 학교를 다닐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해 기숙사를 지어 밤에도 공부를 할 수 있게 불까지 밝혀주었다.

이신부의 판단은 적중했다. 초가집에서 50명으로 시작한 학교는 8년 만에 1천5백여 명 규모의 정규 학교가 되었고, 아이들은 미래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톤즈 아이들에 대한 이신부의 사랑은 각별했다. 대표적인 것이 남수단 최초로 창단한 35인조 브라스밴드이다. 전쟁으로 상처받은 아이들에게 자신감을 찾아주기 위해서였다. 악기는 한국에 있는 지인의 도움으로 마련했고, 악기 연주는 혼자 배워 가르쳤다.

▲ 이태석 신부가 톤즈 아이들에게 피리를 가르치고 있다. ⓒ사진제공 수단어린이장학회

이신부는 단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향상되었다. 남수단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에도 초청받았다. 대통령은 아이들의 연주를 보고 미국에서 온 밴드인 줄 알았다며 놀라워했다. 아이들의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고, 모두가 자신감이 넘쳤다. 내전으로 모든 것이 파괴된 수단에서 그것은 분명 기적이었다.

필자는 아이들에게 이신부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기로 하고, 암 투병 당시의 모습과 장례식 장면을 준비했다. 1년6개월 만의 만남, 아이들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시신 운구 행렬이 보이자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아이들의 얼굴에는 검은 눈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비디오 시청이 끝나자 자신들을 지켜준 분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다며 한자리에 모였다. 피리 연주가 시작되었다. 이신부가 고향을 생각하며 자주 부르던 <사랑해>라는 곡이었다. 아이들은 한국말로 노래도 불렀다. 노래 가사의 의미를 알고 있느냐고 묻자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태석 신부는 암 투병 중에도 마지막까지 수단 아이들을 걱정하며 그들을 위해 하루하루를 살았다. 사람들이 눈물로 그를 기억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자식이 아프면 같이 아파하고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는 헌신적으로 자신을 내던질 수 있는 지극한 사랑, 이것이 이태석의 사랑이다.

▲ 주민들을 치료하고 있는 이태석 신부 ⓒ사진제공 수단어린이장학회

영화 <울지마 톤즈>는 강력한 고발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이 영화를 통해 이기심 가득한 우리의 삶이 얼마나 부끄러운지를 말하고 싶었고, 사회 지도층 인사들에게 사랑과 헌신의 진정한 의미를 보여주고 싶었다.

이태석 신부가 세상에 알려진 후 많은 사람이 그를 이야기한다. 교육계, 의료계, 정부 기관에서도 이신부의 정신을 받들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혹자는 그것을 ‘이태석 신드롬’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필자는 이태석 신부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이태석 리더십’으로 정리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면서도 그들 위에 군림하거나 생색을 내지 않았다. 항상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이야기를 들으려 했으며,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찾아 해결해주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오히려 그들에게 많은 것을 배운다며 겸손해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