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보다 진한 가족의 재발견
  • 조현주·김세희 기자 ()
  • 승인 2011.02.07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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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거노인·장애인·탈북 청소년 공동체 등 새로운 스위트홈 등장…서로 의지하며 자립 기반 다져

 

▲ 전북 김제시 황산면의 수의제 경로당은 건물 입구에 ‘한울타리 행복의 집’이라는 작은 푯말이 걸려 있다. 이곳은 독거노인이 24시간 동고동락하는 ‘그룹 홈’이다. ⓒ시사저널 유장훈

‘가족의 분화’는 새로운 형태의 신가족들을 탄생시키고 있다. 혈연으로 연결된 가족도 있지만 핏줄과는 전혀 관련이 없이 맺어진 가족 형태도 있다. 이것은 ‘가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과거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제 혈연 가족을 중심으로 한 효(孝) 문화보다는 이웃에 방점을 찍은 우(友) 문화에 주목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이다. 

전북 김제시 황산면 진흥리 남양마을에는 독거노인들을 위한 ‘그룹 홈’ 수의제가 있다. 지난 2006년에 문을 열었고, 독거노인 그룹 홈으로서는 전국 최초이다. 이곳은 김제시가 65세 이상의 홀몸 노인들을 위해 마련한 살림집이다. 처음에는 황산면 진흥리에 거주하는 19명의 독거노인이 함께 살고 있었다. 이 가운데 두 명이 사망하고 세 명은 요양원으로 옮겨 현재는 14명의 할머니가 ‘수의제’에서 생활하고 있다.

수의제의 회장직을 맡고 있는 황무자 할머니(77)는 “내가 여기에서는 막내야. 같이 밥 해먹고 자고 함께 목욕도 하고 여기 있는 할머니들이 다 언니들이제”라며 웃음보를 터뜨렸다. 수의제의 최고령자인 서정학 할머니(96)와는 거의 스무 살 차이가 난다. 황할머니는 수의제에서 언니뿐만 아니라 엄마까지 얻은 셈이다.    

1월19일 수의제에 찾아갔을 때, 점심 식사를 마치고 휴식하고 있던 할머니들은 한 차례 고스톱 판을 벌이고 있었다. 10원짜리 동전을 나누어 가지고 고스톱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할머니들 사이에서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패를 주도하던 한 할머니는 “아따 오늘 홍재(횡재) 만났네”라고 너스레를 떨며 웃는다. 9남매를 두고 있는 정갑례 할머니(78)는 “자식들이 함께 살자고 했었지만 답답한 아파트 생활이 감옥이나 다름없다. 전에는 평생 살아온 곳에서 혼자 지내려니 적적했는데 요즘은 할머니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하루가 훌쩍 지나간다”라고 말했다. 

노인 고독사 대안 제시하는 ‘체험 홈’
 

▲ 서울 용산구 청파동에 있는 장애우 자립 공동체. 이곳에는 장애로 인해 가족과 헤어진 장애우들이 모여 살고 있다.왼쪽부터 고병재·박동수·장현수 씨. ⓒ시사저널 임준선

김제시가 시도하는 홀몸 노인들의 ‘생활 공동체’는 노인 고독사 문제의 대안이 될 수 있다. 현재 김제시의 ‘체험 홈’ 제도는 시행된 지 5년 만에 90여 곳이 넘어설 정도로 늘어났고, 1천여 명의 노인이 체험 홈에서 가족처럼 지내고 있다.  

남양마을 노인회의 이규선 할아버지(72)는 “수의제는 낮에는 할아버지들도 와서 쉬다 가는 경로당, 밤에는 할머니들이 자는 살림집으로 활용되고 있다. 1백52m²(46평 규모)의 건물에 14명의 할머니가 생활하는데도 1년 지원금은 3백만원 정도이다. 모든 체험 홈에는 거주하는 노인의 숫자나 규모와 상관없이 지원금이 똑같이 지급되는데 이 부분은 꼭 보완되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뇌성마비 1급 장애인인 박동수씨(35)는 약 2년 전에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 같은 뇌성마비 장애인이자 동갑내기인 고병재씨(35)와 이유진씨(26)이다. 고씨는 아홉 살이 되던 때에 가족에게 버림받았다. 그 후 늘 외롭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왔다. 이런 박씨에게 새로운 가족인 고씨와 이씨는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들이다.

새로운 가족이 생기기 전까지 박씨는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장애를 안고 태어난 것부터 시작해 어린 시절 아버지의 끊임없는 구타, 또 어머니로부터 버림받게 되기까지 박씨는 수많은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결국 그는 아홉 살이 되던 무렵에 한 장애인 시설에 버려지게 되었다. 그를 장애인 시설에 버린 사람은 그의 숙모였다. 박씨 어머니의 부탁을 받은 숙모가 혼자서 움직일 수 없는 박씨를 장애인 시설 문 앞 땅바닥에 버려두고 떠난 것이다. 그 후 박씨는 가족들과 만날 수 없었다.  

시설에 들어간 첫날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내는 바람에 자신의 이름조차 말하지 못했다. 그 이후로 ‘변학봉’이라는 원래 이름을 버리고 ‘박동수’라는 이름으로 살아왔다. 33세가 되기 전까지 박씨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한겨울에 창문이 고장 나서 찬바람이 그대로 들어오는 곳에서 이불만 덮고 잠을 청해야 했다. 또 10년이 넘도록 한 번도 외출을 하지 못했다. 박씨는 “장애인 시설들을 전전하는 동안 인간의 삶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인권이 유린될 때가 많았다”라고 말했다.

박씨는 2년 전부터 시설을 나와 ‘자립 생활’을 위한 체험을 하고 있다. 그는 중증장애인독립생활연대(독립연대)에서 운영하는 장애인 자립 생활 ‘체험 홈’에 입주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체험홈에서 함께 지내고 있는 박씨와 고씨는 원래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두 사람은 서울 노원구에 있는 뇌성마비 종합복지회관 학교에 다니면서 친분을 쌓았다. 박씨는 고씨의 권유로 그와 함게 독립연대에서 운영하는 체험 홈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1월18일 박씨와 고씨 그리고 이씨가 함께 모여 살고 있는 서울 용산구 청파동의 한 가정집에 찾아갔을 때 이들은 저녁 식사를 하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세 명 모두 손발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이들 옆에는 식사를 돕는 도우미가 있었다.

독립연대에서 파견된 도우미 장현수씨(58)는 “세 사람 모두 중증 장애를 앓고 있지만 독립생활에 대한 욕구가 강하다. 박씨와 이씨의 경우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버림을 받고 시설에서 외로운 생활을 해서 그런지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 한다. 고씨는 부모님과 함께 생활해왔는데 농사일을 하시는 부모님께서는 고씨를 24시간 돌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곳에서는 세 사람이 서로 부족한 부분을 도우며 살고 있다”라고 말했다.

심각한 언어 장애를 겪고 있는 박씨와의 대화는 주변의 도움 없이는 어려울 정도였다. 이날 인터뷰는 박씨에 비해 말을 유창하게 하는 고씨가 박씨가 하는 말을 듣고 기자에게 전달해주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2년간을 함께 생활하면서 두 사람의 사이가 얼마나 돈독해졌는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고씨는 “우리는 이미 가족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체험 홈 생활 기간이 2년으로 한정되어 있어서 고민이 많다. 2월이면 이 집에서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나 역시 독립생활을 해야 할 때이고 언제까지 부모님의 도움을 받고 살 수는 없다. 우리가 서로 도움을 주며 사는 것이 좋았는데 요즘은 앞으로 어떻게 하면 함께 살 수 있을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라고 말했다.   

▲ 1월19일 안양에 위치한 새터민 청소년 생활 공동체 ‘우리 집’에서 음악 활동을 함께 하는 학생들. ⓒ시사저널 임준선

탈북자인 나영이(16)는 4년 전 한국 땅을 밟았다. “친엄마를 만나러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를 거쳐 한국까지 왔어요. 잠깐이면 될 줄 알았는데 벌써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어요. 가지 말라고 붙잡던 아빠한테 아무 말도 없이 나온 것이 정말 후회돼요.” 나영이는 북에서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 새엄마와 함께 단란하게 살았다. 하지만 나영이는 친엄마를 만나기 위해 탈북을 결심했다. 친엄마는 나영이가 태어난 지 1년 후 집을 나갔고, 그동안 소식이 닿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열 살이 되던 해, 나영이는 친엄마가 보냈다는 낯선 아저씨를 따라 험한 여정을 시작했다. “엄마가 그리웠고,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다”라는 나영이는 1년여에 걸친 우여곡절 끝에 한국 땅에서 엄마를 만났다. “엄마를 만나기는 했는데 엄마는 나보다 겨우 2년 먼저 한국에 왔고, 그래서 혼자 생활하기에도 힘들어 보였어요. 일도 힘든 것 같고.” 엄마를 만났지만, 나영이는 다시 엄마와 떨어져 살아야만 했다. 학교를 옮기기도 두세 번, 어느 날 나영이는 탈북 청소년 지원 시설 ‘우리 집’에 초대받았다.

안산시 상록구에 있는 ‘우리 집’은 나영이와 같은 탈북 청소년들이 모여 공동체 생활을 하는 곳이다. 저마다 다른 사연을 안고 모인 아이들은 이곳에서 살을 맞대며 가족과 떨어지면서 입었던 상처들을 치유해나가고 있다. 가끔 다투기도 하지만, 되돌아갈 수 없는 고향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아픔을 함께할 수 있기에 이들에게 ‘우리 집’은 한국 땅에서 만난 또 하나의 ‘가족’이었다.

“우리는 가족이에요.” ‘우리 집’의 맏언니 이옥경씨(23)가 말했다. 한국에 온 지 8년이 다 되어가는 옥경씨는 어린 나이에 동생과 함께 머나먼 길을 돌아 한국으로 들어왔다. 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한국 생활에 완벽히 적응한 듯한 그는 이제 낯설어서 힘들어 하는 아이들을 보듬어줄 수 있는 ‘우리 집’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옥경씨의 고향은 개성이고, 아버지는 의사였다. 하지만 그가 중학생일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함경북도에 있는 친척 집에 오가던 중 어머니와도 연락이 끊겨버렸다. 친척 집에 살며 어머니의 연락을 기다린 것이 2~3년, 옥경씨는 탈북을 결심했다. 깜깜한 밤 내몽골의 황량한 사막길을 동생을 업고 걸었다.

잡혀갈까 봐 숨죽이며 기차와 차를 갈아타기를 여러 차례, 자매는 무사히 한국에 들어왔다. 그리고 어느새 옥경씨는 대학생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 단국대학교 간호학과에 합격한 그는 “아버지처럼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도 간호사가 된다고 생각하니 너무 좋다”라며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인터뷰 내내 분위기를 즐겁게 만들어준 성남이(16)는 ‘우리 집’의 터줏대감이다. 나이는 어리지만 한국에 온 지 벌써 8년이 되었다. 말투나 행동에서 탈북 청소년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어렸을 때의 기억이 별로 없다는 성남이는 “힘들었죠”라는 한마디로 그동안의 생활을 정리했다. 모질고 아픈 시간이었다.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부모님은 성남이를 고아원으로 보냈다. “북에서는 엄마들이 힘들면 보통 (아이들을) 고아원으로 보낸다. 그런데 거기에서 나를 아들이라고 착각한 아주머니를 만났다”라며 잠시 생각에 젖었다. 

낯선 땅에서 희망 찾는 ‘우리 집’

성남이는 그 아주머니의 손에 이끌려 서울 어딘가로 오게 되었다. 하지만 그 아주머니는 성남이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성남이는 하나원(탈북자 정착 지원 시설)에서 지내다가 ‘우리 집’으로 오게 되었다. 친부모가 보고 싶지는 않을까. 성남이는 “기억도 잘 나지 않고, 연락할 방법이 없다”라며 씁쓸해했다. 여느 아이들처럼 장난기 많은 개구쟁이 소년 성남이는 부모님 얘기가 나오자 표정이 사뭇 덤덤해졌다. 성남이의 얼굴 곳곳에 있는 흉터들이 그동안의 어려움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현재 ‘우리 집’에는 마석훈 원장의 지도 아래 초·중·고등학생 11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아이들은 한 달에 한 번 용돈을 받아 생활하고, ‘우리 집’은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가족의 울타리는 정해져 있지 않다. 누군가는 자립을 해서 떠나고, 또 누군가가 새로운 가족으로 들어온다. 하지만 ‘우리 집’은 그 자체로 ‘가족’이다. 낯선 한국에서 서로의 아픔을 나누고 달래며, 함께 웃고 즐기는 그런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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