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덴 만의 승리’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 경남 밀양·부산│안성모 기자 (asm@sisapress.com)
  • 승인 2011.02.07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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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날인 2월3일 의식을 차린 석해균 선장. 인공호흡기에 이어 호흡관이 완전히 제거된 뒤 석선장이 눈을 떠 주위를 살피고 있다.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되었다가 돌아온 석해균 삼호주얼리호 선장. 그는 대한민국을 지켜낸 또 다른 전사이자 영웅이었다. 그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도 기지를 발휘해 효과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선원과 배의 안전을 끝까지 책임졌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주경야독으로 스스로를 꾸준히 발전시켜온 노력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투철한 희생의 리더십으로 ‘아덴 만 여명’ 작전을 성공시키는 데 기여한 석선장의 드라마틱한 인생 스토리와 리더십의 원천을 들여다보았다.


영웅은 늘 우리 곁에 있다. 맨손으로 총알을 잡거나 건물 사이를 날아다니는 영화 속 슈퍼 히어로만이 영웅은 아니다. 특별한 재능을 타고나 초능력을 발휘하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을 희생하면서 맡은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이들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진정한 영웅이라 할 수 있다.

석해균 삼호주얼리호 선장. 우리가 그를 ‘아덴 만의 영웅’으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악명 높은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된 급박한 상황에서도 그는 일부러 배를 지그재그로 몰고 엔진오일에 물을 섞어 기관을 고장 내 속도를 늦추는 등 침착하면서도 효과적으로 대응해 배와 선원의 안전을 끝까지 책임졌다. 해적들의 총칼 앞에서도 지혜롭게 대처해 선장으로서 임무를 완수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석선장은 뼈가 부스러지는 폭행을 당하고 목숨을 위협하는 총상을 입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석해균 선장이) 없었더라면 아마 (해적 소굴로) 끌려갔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1953년 2월, 경남 밀양시 무안면 마흘리 백운마을에서 3남2녀의 장남으로 태어난 석해균 선장의 지난 삶은 어려운 환경을 딛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 위한 노력의 연속이었다. 가난을 등에 업고 살았던 1960년대. 차도 다니지 않는 산골 마을에서 한 시간은 걸어야 갈 수 있는 학교에 다녔지만,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에 그는 늘 감사했다. 성적도 우수했다. 한 동네에서 자란 고향 선배 석현덕씨는 “어릴 때부터 똑똑했다. 어렵게 학교를 다녔지만 공부를 잘했다. 착하고 나무랄 데 없는 모범생이었다”라고 기억했다.

그런 만큼 대학에 들어가 더 큰 배움의 기회를 갖고 싶었다. 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아버지가 읍내에 나가서 막노동을 하고, 어머니가 산나물을 캐다 팔아 생계를 이어가던 어려운 시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5남매의 장남인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많지 않았다.

경남 밀양에 있는 밀양실업고를 졸업한 지 한 달 만에 그는 부사관으로 해군에 입대했다. 대학 진학의 꿈을 접어야 했지만 낙담하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꿈을 키워나갔다. 고교 동창인 석희봉씨는 “또래 친구들보다 일찍 군대에 갔다. 대학 진학이 어려우니까 지원해서 간 것이다. 입대하기 전에 ‘이름이 해균이라서 해군에 간다’라며 웃던 모습이 기억 난다”라고 말했다.

5년간의 군 생활 중 2년은 진해 해군작전사령부 예하 부대에서 근무하고 3년은 군함을 탔다. 이때부터 바다와 인연을 맺었다. 부사관으로 복무하던 1975년 부인 최진희씨와 결혼해 가정을 꾸렸고, 슬하에 2남1녀를 두었다.

석선장은 전역 후인 1977년부터 본격적으로 배를 탔다. 당시 그는 갑판원 신분이었다. 해양대학교나 해사고등학교를 나오지 않아 가장 밑바닥 생활부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은 ‘뱃사람’의 열정은 매 시기마다 그를 한 단계씩 도약시켰다.

“항상 공부하며 배를 목숨처럼 아꼈다”

▲ 지난 2007년 3월9일 케미컬 운반선 스톨트스와지호 인도식에 참가한 석해균 선장. ⓒ대아해운 제공

석선장은 자신이 세운 계획을 하나하나 현실로 일구어나갔다. 승선 경력 5년이 지나야 기회가 주어지는 3등 항해사 자격증을 배를 탄 지 정확히 5년 뒤인 1982년 8월에 땄다. 이어 1984년 6월에 2급 항해사, 1988년 7월에 1급 항해사 자격증을 잇달아 취득한 그는 1995년 6월 마침내 선장이 되는 꿈을 이루었다. 대우해운 소속 1만9천t급 유조선 오션페랄호였다.

갑판원으로 시작해서 대형 선박의 선장이 되기는 쉽지 않다. 채효석 한국해양수산연수원 경영지원팀장은 “해양대나 해사고를 나오지 않고서 이 정도 큰 배의 선장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면허 없이 처음 배를 타서 1급 자격증을 따는 것 자체가 상당히 어렵다”라고 설명했다. 

이것은 석선장이 평생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공부한 노력의 결과이다. 선원이 된 후 그는 말 그대로 주경야독하는 생활을 해왔다. 어머니 손양자씨는 “집에 올 때마다 늘 큰 가방을 두 개씩은 들고 온다. 그 속에 다 책이 들어 있다. 배 타는 공부하려고 가지고 다니는 책이었다”라고 말했다. 둘째 아들 현수씨는 “아버지는 항상 공부하며 배를 목숨처럼 아꼈다”라고 말했다.

선장으로서 이끈 19척을 비롯해 그가 지난 35년간 승선한 선박은 모두 33척에 이른다. 주로 대형 유조선과 케미컬(화학물질) 운반선이다. 삼호주얼리호도 1만1천t급 케미컬 운반선이다. 위험 물질을 운반하는 만큼 일은 더 고되고 전문 지식도 익혀야 하지만 일반 화물선보다 40% 정도 보수가 더 많다.

석선장은 이처럼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번 돈으로 노부모를 모시고, 네 동생을 공부시킨 집안의 기둥이다. 8년 전에는 부산 시내에 3층짜리 건물을 구입했다. 두 아들도 장성했고, 딸은 몇 해 전 결혼을 했다. 형편이 많이 나아지자 가족들이 ‘배를 그만 타라’라고 권유했지만 그는 바다를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부산 해운업계에서 석선장은 워낙 말수가 적고 큰소리를 내지 않아 조용했지만 일에서만큼은 누구보다 책임감이 강한 바다 사나이로 통했다. 업계 사람들은 특히 이번에 그가 보여준 활약은 가장 이상적인 선장의 모습이라고 입을 모았다.

4년 전 석선장이 일했던 정양해운 관계자는 “선주의 재산과 선원의 생명을 지키겠다는 생각은 선장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위기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결심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석선장은 사명감이 강했다. 자신이 피해를 입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를 무릅쓰고 배를 지켜낸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상황 판단과 대처 능력은 물론 운항 실력 또한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해적들은 총칼로 위협하며 배를 소말리아 연안으로 이동시키라고 윽박질렀다. 한국 선원만 따로 모아놓고 감시하는 치밀함도 보였다. 만약 이들의 강요에 따랐다면 ‘아덴 만 여명’ 작전은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석선장은 배의 속도를 늦췄다. 해적들이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배를 지그재그로 몰았다. 엔진오일에 물을 섞어 기관을 고장 내는 방식으로 몇 차례 배를 멈추게도 했다. 평상시 14노트 속도로 항해하던 삼호주얼리호는 납치된 후 6노트 정도로 느리게 운항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군이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최대한 시간을 번 것이다.     

희생 감수하는 부드러운 리더십 돋보여

▲ 1월31일 오후 오만 무스카트 항에 입항한 삼호주얼리호. 탄환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연합뉴스

대형 선박의 선장 출신인 임봉학 대아해운 전무는 “해적의 본거지로 끌려가면 더 이상 선장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지게 된다. 그래서 바다에 있을 때 판단을 내려야 한다. 망망대해 한가운데 있으면 배가 어디로 이동하는지 일반 해적들은 잘 모른다. 여기에 착안해 기지를 발휘한 것이 돋보인다”라고 밝혔다.

외부에 피랍 상황을 알려 우리 군이 작전을 수행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도 뛰어난 능력으로 평가받고 잇다. 석선장은 해적의 명령에 따라 영어로 회사와 통화하면서 중간 중간에 우리말을 섞어 내부 정보를 전달했다. 임전무는 “선장은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평소 자기 나름의 시뮬레이션을 한다. 선박 보안 훈련도 정기적으로 갖는다. 하지만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감시 상황에서 정보를 외부로 알리기는 대단히 어렵다”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능력은 수많은 경험을 통해 체득된다고 말한다. 학습형 리더십이 아니라 체험형 리더십이라는 것이다. 또한 ‘선상의 대통령’인 선장으로서 그는 카리스마형 리더십이 아닌 자기 희생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온 국민이 ‘평범한 영웅’ 석선장이 하루 빨리 병상에서 일어나기를 바라는 이유이다. 김영내 두광해운 대표는 “2등 항해사 시절 석선장님과 함께 배를 탔다. 당시 1등 항해사로 진급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셔서 특히 기억에 남는다. 선장이라고 해서 독하게 다그치는 분이 아니었다. 늘 조용히 선원들을 다독이고 보살펴주었다. 빨리 몸이 완쾌되셔서 후배들에게 더 많은 경험을 가르쳐주셨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일터에서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그는 모범 가장이었다. 부인 최진희씨가 “좋은 아버지, 좋은 남편이었다”라고 말한 것은 그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 소말리아 근해에서 해적에 의해 납치되었다 구출된 삼호주얼리호 석해균 선장의 부모인 석록식(왼쪽)·손양자 씨. ⓒ시사저널 유장훈

석해균 선장의 노부모는 큰아들을 대견해하면서 한편으로는 늘 미안함을 지니고 살았다. 공부를 잘하던 아들이 대학을 포기하고, 돈을 벌러 망망대해에 나가 힘든 일을 하는 것이 안쓰러웠다. 부모들은 해적에게 납치되어 크게 다쳤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뜬눈으로 밤을 새고 있다.

석선장이 고국으로 돌아오기 하루 전인 지난 1월28일 그의 밀양 고향집을 찾았다. 아버지 석록식씨(83)는 “돈이 없어 공부를 더 시키지 못했다”라며 40년이 더 지난 일을 아직도 가슴속에 묻어두고 있었다. 석씨는 “논 두 마지기가 전부였는데 얘들 가방은 모두 다섯 개였다. 고등학교까지 보낼 수밖에 없었다”라며 안타까워했다.

납치 소식은 TV를 보고서야 알았다. 석씨는 “걱정할까 봐 얘들이 안 알려주었다. 배를 탄 후 아직까지 사고 난 일이 없었다. 이번이 처음이다. 시키는 대로 했으면 아무 탈 없었을 텐데…”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손양자씨(79)는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위험한 일만 했다. 집에는 1년에 한두 번 올까말까 했다. 그래도 최근 몇 년 간은 자주 온 편이었다”라고 전했다. 손씨는 “자꾸 염증이 생긴다는데…”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제 바라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 아들이 다시 건강을 되찾는 일이다. 노부모는 “제발 좀 치료를 잘 해주면 고맙겠다”라고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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