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민생 현안에만 몰두하라
  • 고원/서울과학기술대학 교수 ()
  • 승인 2011.02.21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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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난 구제역 물가고 등 서민의 고통은 여느 떄와 달라…정쟁 그만두고 민심에 온기 돌게 해야

얼마 전 무슨 일로 부동산중개업소에 들러 전세난의 현장을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전세 구하기는 언론에서 떠드는 것보다 훨씬 심각해서 말 그대로 생존 전쟁이었다. 전세 가격은 무려 93주째 상승을 계속했다. 그 결과로 서민용 전세 가격이 수천만 원씩 폭등했다. 그런데도 전세 물건 자체가 없다. 집주인들은 전세를 월세로 돌리고 있는데, 세입자들은 기본적으로 그 월세를 감당할 구조가 안 되어 있다. 예를 들어 8천만원짜리였던 전셋집이 보증금 2천만원에 월세 60만원 혹은 3천만원에 월세 50만원 식으로 전환되고 있다. 8천만원짜리 전셋집에 살려는 사람이 월세 50만~60만원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그런데도 이렇게 논리적으로 성립이 안 되는 사회 현상들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이 겪는 민생의 고통은 전세금 문제만이 아니다. 지난달 생산자물가지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6.2% 올라 2008년 11월 이후 2년2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 가운데 채소는 47.2%, 과일이 74.8% 급등했고, 축산물도 구제역 여파로 15.2%나 올랐다. 물가 급등은 고소득층보다 저소득층에게 훨씬 더 큰 타격을 주고 있다. 주가 상승으로 고소득층은 상대적으로 체감 경기가 양호하지만, 생활 물가와 전세금 급등의 직격탄을 맞은 저소득층은 고통이 더 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금의 민생고는 여느 때의 그것과는 달리 전조가 불안하고 수상하다. 마치 거대한 폭발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이다. 국제노동기구(ILO)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실질임금상승률은 2000~05년 4.4%, 2006년 3.4%, 2007년 -1.8%, 2008년 -1.5%, 2009년 -3.3%로 주요 국가들 가운데 실질 임금 하락 속도가 가장 빠른 나라로 나타났다. 개인들의 부채 구조 역시 위험 수준에 급속히 다가가고 있다. 지난해 말까지 가계가 금융회사에서 빌려 쓴 금융 부채는 9백조원을 돌파했다. 금융 위기가 본격화한 2008년 이후 1백60조원이 늘어났다. 연 20%대의 고금리를 물어야 하는 카드론이 2005년 8조원에서 지난해 9월 말까지 24조9천억원으로 5년 만에 세 배 이상 불어났다는 사실은 가계 부채가 임계점에 차올라왔음을 암시한다. 그래서 삼성경제연구소, 한국금융연구원 등 유수의 연구소들이 가계 부채가 시한폭탄이 되었다고 하나같이 입을 모은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전·월세 폭등, 고물가, 구제역까지 한꺼번에 강타했으니 국민들은 거의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질 만한 것이다. 소득은 줄고 물가는 오르니 막다른 골목에 몰려 탈출구가 없어 서민들은 하늘만 쳐다보면서 극도의 절망과 분노를 씹고 있는 것이다.

▲ 윤증현 기획재정부장관(가운데)이 지난 1월13일 정부 과천청사에서 열린 ‘서민 물가 안정을 위한 종합 대책 합동 브리핑’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의 존재 이유를 의심케 하고만 있어

이렇게 가난한 서민들이 엄동설한에 살 집을 구하기 위해 아우성치며 거리를 떠돌고 있고 고물가에 시름이 깊어가는데도, 지금까지 정부와 정치권은 뒷짐만 진 채 천하태평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해 5월 대국민 라디오 연설에서 집값과 물가 그리고 고용 안정을 3대 민생 과제로 해 서민 경제 살리기에 전력을 기울이겠다는 의지를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대통령의 연설은 빈말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물가 불안은 이미 오래전부터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여왔고, 언론들도 이를 계속 경고해왔다. 그럼에도 이 정부가 집값과 물가 안정을 위해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사실 이명박 정부는 물가 관리 정책에 처음부터 무관심했다. 사실상 수출 대기업 중심의 환율·금리 정책으로 물가가 마음대로 날뛰게 방치했다.

정부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서민들이 정부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전세금 폭등을 93주씩이나 방치했다는 것, 물가 폭등이 예견되었음에도 전혀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것은 정부가 있어야 할 이유를 의심케 할 수밖에 없는 사유이다. 경제 살리기를 공약으로 일약 대통령이 된 그가 국민들을 길거리로 내몰았다고 느끼게 되는 순간, 국민들이 배신과 분노로 치를 떨게 될 것이라는 점은 불문가지이다.

물론 지난 1월13일 물가 대책의 일환으로 전·월세 주거비 안정 방안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세난을 가져온 가장 직접적 원인인 저금리 기조와 부동산 경기 부양을 위한 분양가 상한제 폐지, DTI 규제 완화 및 시한 연장 검토, 소형 평형 건설의 의무 비율 대폭 축소, 임대주택 건설 의무 비율 전면 폐지 등을 반성하는 차원의 정책 제시는 전혀 없었다. 고작해야 조금 싼 이자로 전세 자금을 빌려주겠다는 대책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정부의 문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정치권의 문제 또한 만만치 않다. 민의를 수렴하고 그것을 정부 정책에 전달해 반영케 하는 것이 정치권의 임무라고 했을 때, 정치권은 직무 유기를 저질러온 것이나 진배없었다. 지난해 말 여당의 예산안 날치기에 따른 국회 마비 상태 때문에 전세난, 고물가, 구제역 파동으로 민심이 거의 공황 상태로 치닫기까지 휴업 상태를 지속해 온 것이다.

다행히 얼마 전 여야가 국회를 정상화하기로 합의함으로써 휴업 상태에 일단락을 내기는 했다. 그러나 정부와 여당이 날치기로 민생 공백을 초래한 사태에 대해서 진지하게 반성하고, 앞으로의 재발 방지를 위한 진심 어린 노력을 기울일 의지가 있는지 진정성을 엿보기는 여전히 어려운 것 같다. 청와대와 여당은 날치기로 국회가 유린된 사태에 대해 아직도 잘한 일로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가 2월 임시국회를 서민·민생 국회로 열자고 제안했다. 그럼에도 지금 한나라당 내부를 들여다보면 민생과 상관없는 개헌 문제로 티격태격하는 데에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는 것 역시 진정성을 의심받게 하는 요소이다. 개헌 문제가 지금 시점에서 중요한 현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어느 여론조사 기관이 지난 2월8일 실시한 조사 결과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조사에 따르면 ‘지금 개헌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의견은 35.1%에 그쳤고, ‘개헌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시기적으로 지금은 부적절하다’는 25.6%, ‘개헌이 전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개헌 이야기는 무의미하다’는 의견은 20.9%로 나온 것이다.

또 여야 영수회담이 소소한 문제로 무산된 것도 정쟁에 대한 미련을 과감히 떨쳐버리지 못한 것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청와대는 회담 무산에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에서는 어디까지나 청와대와 여당이 과감하게 대승적 양보를 하는 것이 옳다. 이번 민생 문제는 서민들의 아우성이 너무 크고 위험한 만큼 국정에 일차적 책임을 지고 있는 현 정권과 여당이 통 크게 결단하고 양보하는 것이 순리인 것이다. 그것을 국민이 원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더 그런 것이다. 물론 야당에 대해서도 탓할 바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것을 따지기에는 상황이 녹록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정부와 정치권은 국회 개원을 계기로 적어도 이번 회기만큼은 오로지 민생 현안에 몰두하기 바란다. 그러면 국민들의 마음에 온기가 돌고 희망의 젖줄이 공급되어, 국민들이 정치권에 기꺼이 박수를 보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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