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 깊어진 ‘바람 앞의 왕실’들
  • 조홍래 편집위원·김회권 기자 (khg@sisapress.com)
  • 승인 2011.02.28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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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레인에서 ‘왕정 철폐’ 목소리 높아지면서 사우디·요르단·모로코 왕가도 ‘불안한 나날’

 

▲ 지난 2월20일, 바레인의 수도 마나마의 펄 광장에 모인 반정부 시위대가 ‘개혁’을 요구하며 깃발을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중동의 민주화 바람이 독재 국가들을 거쳐 마침내 이 지역의 왕정 체제도 위협하고 있다. 중동의 왕정 국가들은 그동안 정치적 안정을 누리며 중동 평화에 기여해왔기 때문에 이 체제가 흔들릴 경우 상당한 파장이 예상된다. 당장 불똥이 떨어진 곳은 수세기 또는 수십 년째 왕정 체제가 지속되는 모로코, 요르단, 바레인, 사우디아라비아 4개국이다.

 왕정 국가들의 소요로만 볼 때 모로코가 가장 격렬하고 요르단은 온건하지만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은 편이다. 중동을 석권하고 있는 민주화 운동은 페르시아의 섬나라 바레인에까지 도달했다. 이미 바레인에서는 격렬한 시위가 일어나 시위대 중 최소한 여덟 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당했다. 가장 최근인 2월22일 시위에서는 충돌은 없었지만 시위대 수만 명이 거리로 나와 국기를 흔들며 광장을 뒤덮었다.

 이웃한 사우디아라비아(이하 사우디)의 근심은 깊어지고 있다. 사우디의 왕실 지도자들은 요즘 갈수록 고립되는 상황이 두렵다. 이미 이집트 무바라크 정부가 무너졌을 때부터 사우디 내부에서는 경고의 목소리가 나왔다. 무바라크가 사임한 직후 사우디의 최고 울라마(이슬람 법학자) 중 한 사람은 “사우디 정부가 이 상태를 방치할 경우 튀니지와 이집트 같은 것이 사우디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라고 언급했다.

바레인, 왕세자가 협상 테이블 전면에 나서

▲ 지난해 5월11일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에서 열린 걸프협력회의(GCC)에 모인 수뇌부들의 모습. ⓒAP연합

 사우디 왕가의 이목이 집중된 곳은 바레인이다. 바레인은 알 칼리파 가문을 정점으로 소수의 수니파가 국민 70%에 달하는 다수의 시아파를 통치하고 있다. 바레인 왕실의 중추는 하마드 빈 이사 알 칼리파 국왕과 살만 빈 하마드 알 할리파 왕세자인데 이 두 사람은 비교적 합리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반면 미국과 유럽에서는 국왕의 삼촌이자 치안을 담당하는 셰이크 칼리파 전 총리를 잔혹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칼리파 총리는 파키스탄과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등지의 수니파 이민자를 고용해서 만든 치안부대를 이끌고 있는데 이들이 시위대와 충돌하면서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했다.

 2월19일, 살만 왕세자가 전면에 등장했다. 지난 사망자 발생 사건에 대해 TV 연설을 통해 사과했고 광장에서 치안부대를 철수하며 반정부 운동 진영과 협의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바레인의 권력자도 이집트처럼 국민의 반정부 운동에 대해 전례 없는 양보를 시작했다. 왕가의 사과가 있었지만 바레인의 반정부 운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광장에는 여전히 왕정 반대를 외치는 시위대가 자리 잡고 있다. 이집트 무바라크 대통령 역시 반정부 시위대에 양보할 뜻을 밝혔지만 결국 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바레인과 사우디는 모두 왕정 국가이며 절친한 동맹국이다. 사우디는 오일 머니를 바탕으로 부국이 되었지만 바레인은 작은 유전밖에 없어서 그렇지 못했다. 대신 바레인은 사우디의 오일 머니를 굴리는 국제금융센터 역할을 수행하며 긴밀히 협력해왔다. 사우디 왕가의 처지에서 이웃 바레인의 왕정이 붕괴하는 것은 그 긴밀함을 따져봤을 때도 절대로 피해야만 할 사태 전개이다.

 사우디는 종교·정치적으로 중동 왕정 체제의 기본 축이며 흔들리지 않는 국제 기능을 담당하는 곳이다. 튀니지에서 축출당한 벤 알리 전 대통령 일가가 망명지로 선택한 곳도 사우디였다. 사우디의 위상을 고려해볼 때 민주화 열기가 이곳까지 확산될 경우 중동의 지정학적 판도, 나아가 세계의 판도가 요동칠 수밖에 없다.

 동부 벵가지 지역이 반정부 시위대의 중심이 되고 있는 리비아처럼 사우디 역시 우려되는 곳은 동부 지방이다. 사우디 석유의 90%는 동부 지방에 매장되어 있는데 이곳에 거주하는 대다수는 시아파 주민이다. 사우디는 수니파 종주국으로 국민 2천5백만명 가운데 시아파가 약 3백만명으로 소수이다. 하지만 동부 지방에 거주하는 약 3백50만명 중 대다수가 시아파로 추정되기 때문에 동부와 인접한 바레인이 시아파 정권으로 바뀔 경우 사우디 정부도 동부 지방에 대해서 더 이상 안심할 수 없게 된다.

 동부의 시아파는 수니파인 정부가 자신들을 푸대접한다고 생각한다. 사우디의 수니파 보수주의자들은 시아파의 믿음이 이교적이라고 생각하고 채용 등 각종 기회에서 차별을 두었다. 오일 머니의 재분배에서도 박탈감이 컸다. 시아파는, 석유는 동부에서 뽑아내고 있지만 그 혜택은 동부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런 문제점을 인식한 현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국왕은 지난 2005년 즉위한 이후 여성을 차관에 임명하고 이슬람 율법 기구인 파타(Fatwa)에 온건한 학자들을 배치하는 등 개혁적인 정책을 시도했다. 하지만 여러 가지 개혁 조치에도 ‘전통’과 ‘종교’의 굴레를 벗어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압둘라 국왕의 5년은 밉지 않더라도 더욱 긴 세월 동안 차별을 준 왕정은 동부 시아파 국민들에게 반감의 대상이다. 사우디의 정치범들 중 상당수가 동부의 시아파 출신인 데는 이런 사연이 있다.

사우디, 동부 지역 시아파 민심 잡기에 달려

▲ 중동의 왕정 국가들,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사우디아라비아 국왕, 하마드 빈 알 칼리파 바레인 국왕(위로 부터) ⓒEPA연합,ⓒAP연합

 압둘라 왕이 즉위한 이후 동부 지방에서 온 시아파 대표단이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기 위해 국왕을 방문했을 때 이들이 맨 처음으로 요구했던 것이 ‘정치범 석방’이었다. 그들은 국왕을 만나기 열흘 전에 이미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전달했다. 그 서신에는 정치범 석방 외에도 △국정에서 좀 더 비중 있는 역할을 맡겨줄 것 △정부가 강제 이주시킨 시아파를 복귀시켜줄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겼다고 한다. 이처럼 동부 지방과 사우디 왕정의 갈등은 뿌리가 깊다.

 사우디 관리들은 무바라크 퇴진 후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다. 왕자인 압델 아지즈 내무장관은 최근 저명 인사와 기자들을 리야드로 불러 “사우디는 작금의 사태와 무관하다”라며 자신감을 피력했다. 그는 그 이유로 사우디가 종교적 율법에 의해 통치되고 국민들이 이런 통치 방식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모임에 참석한 인사의 전언에 의하면 아지즈 왕자는 “사우디를 이집트나 튀니지에 비교하지 마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다수 참석자는 아지즈 왕자가 불안을 애써 감추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분석가들은 바레인 사태의 파급 효과를 우려하면서도 유사한 상황이 사우디에서 재연될 가능성에는 반신반의하는 눈치이다. 사우디와 바레인은 독재, 부패, 그리고 고등 교육을 받은 젊은 엘리트층이 많다는 점에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우디 국민들은 석유 자산과 변화를 꺼리는 종교적 문화에 많이 순치된 편이어서 당장 왕정 타도를 요구할 분위기는 아니다.

 바레인 왕정의 붕괴를 원하지 않는 사우디의 입장도 이 나라의 왕정 안정에 도움을 준다. 사우디 왕정이 바레인 왕정을 돕기 위한 파병을 쿠웨이트 등 다른 걸프 산유 국가(GCC)와 함께 검토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사우디 보안군이 바레인 거리에 배치되었다는 목격담도 블로그나 트위터를 통해서 나오고 있다. 사우디는 이미 1990년대 바레인 시아파의 반정부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을 때, 바레인에 치안부대를 파견한 바 있다. 사우디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바레인과 인접한 사우디 동부 지역 수장은 바레인의 시아파 종교 지도자들에게 강경 진압을 독려하기도 했다. 

 사우디와 바레인 국민의 계파 갈등이 대규모 반정 시위를 어렵게 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이란이 부추기는 계파 갈등을 반정 시위로 분출하면 이란의 음모에 말려든다는 점을 사우디 국민들이 알고 있다는 말이다. 사우디의 일부 반정 단체들은 오는 3월11일 대규모 시위를 하자고 호소하고 있으나 다수의 군중이 모일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워싱턴에 있는 걸프문제연구소의 알리 알 아메드 소장은 “사우디 국민들은 압둘라 왕이 더 나은 정치를 할 것으로 여전히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라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하지만 이미 변화의 싹은 텄다. 사우디 동부 지역 거주민들은 주말을 이용해 바레인을 자주 오가는 편이다. 사우디는 종교적으로 엄격하기 때문에 음주 등이 금지되어 있다. 그래서 자유도가 높은 바레인으로 건너가는 시아파가 적지 않다. 교류가 잦은 만큼 바레인의 정치적 고조는 사우디에도 영향을 미친다. 최근 로이터 통신은 사우디 시아파 관계자의 말을 빌려 “2월17일 바레인에 가까운 동부 카티프에서 소규모 시위가 있었다”라고 보도했다. 2월20일에도 시아파 세력은 정부에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는 침묵 시위를 했다. 절대 군주국인 사우디에서 보기 드문 연쇄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

 사우디의 수도 리야드는 고민에 빠졌다. 한 외교관은 “사우디는 요르단, 이라크, 바레인 등의 사태로 온통 고민거리에 포위된 형국이다”라고 지도자들의 심경을 전했다. 익명을 원하는 이 외교관은 “사우디가 이란을 견제하는 미국의 최강 동맹인 점을 상기한다면 사우디의 절박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귀띔했다.

 사우디는 미국의 행보가 염려스럽다. 오바마 행정부가 중동의 역학 관계를 고려하는 것보다 중동의 개혁 열풍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선회한 것도 불안을 증폭시킨다. 변화에 대한 지지가 초래할 결과에 대해 아무런 보장도 하지 않고 있는 미국의 태도에도 불만이다. 사우디는 이집트의 무바라크가 권좌에 잔류하거나 최소한 ‘명예로운 퇴진’을 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고 사우디의 불안은 더욱 심화되었다. 압둘라 국왕이 무바라크가 사임하기 수주 전 오바마 대통령과 두 차례 전화 통화를 하고 자신의 입장을 전달했으나 마지막 통화는 의견 충돌로 끝났다고 사우디 관리들은 말했다.

미국·이스라엘의 이해관계도 걸려 있어

▲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왼쪽)과 사바 알 아마드 알자비르 알 사바 쿠웨이트 국왕(오른쪽) , 셰이크 하마드 빈 칼리파 알 타니 카타르 국왕, 카부스 빈 사이드 오만 국왕 (위로부터) ⓒEPA

 사우디와 바레인 왕정에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에 대한 예측은 현재 엇갈리고 있다. 그럼에도 사우디는 바레인을 바라보는 미국의 태도를 주시하고 있다. 미국이 바레인 왕정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다면 사우디는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으며, 1945년부터 지속된 사우디와 미국의 관계는 종말을 고할지도 모른다. 시카고 국제문제연구소의 사우디 전문가 라첼 브론슨은 “사우디는 공산주의든 이란의 패권이든 늘 무언가에 포위된 공포 속에서 살아왔다. 바레인 사태가 분수령이 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중동의 왕정 체제가 약해질수록 불안감이 증폭되는 또 다른 한 축은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은 그동안 이집트 및 요르단과 평화조약을 체결했고, 친미 왕정 국가들과는 우호 관계를 유지해왔다. 자신들과 가장 친밀한 맹주였던 이집트의 무바라크를 ‘상실’한 좌절감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다른 왕정 국가들까지 흔들린다면 고립무원의 황야에 버려지는 상태가 된다. 미국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지탱할 계획이지만, 무바라크를 용도 폐기하는 미국을 보는 심정은 착잡할 수밖에 없다.

 사우디의 변화는 미국이 바라는 그림이 될 수 없다. 만약 사우디가 변혁을 겪어 원유 90%가 시아파의 영향권 내에 놓이게 된다면 중동의 3대 산유국인 사우디, 이라크, 이란의 주요 유전이 모두 반미 성향이 강한 시아파의 영향력, 이른바 ‘시아 벨트’ 아래 있게 된다. 그럴 경우 이란, 이라크, 사우디 사이에 끼어 있는 주요 산유국 쿠웨이트도 마냥 안심할 수는 없다. 크리스토퍼 데이비슨 영국 더럼 대학 중동정치학 교수는 “일찌감치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등장한 상인 계층이 왕정을 견제하며 의회민주주의가 다져진 쿠웨이트에서는 시민 혁명이 발생할 가능성이 적다”라고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FP)>를 통해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최근 쿠웨이트에서 무국적자 취급을 당하는 베두인(유목민)들이 국왕을 향해 시민권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다 30여 명이 부상을 당하는 일이 벌어지는 등 미묘한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아랍의 민주화 시위가 세계사적 분기점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반독재를 넘어 중동 왕정의 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반면 그렇게 될 경우 미국의 대중동 정책은 뿌리부터 흔들리게 된다. 유전과 패권 모두를 잃을 개연성도 생긴다. 미국이 아랍 민중들의 민주화 열망에 어떤 잣대를 들이댈지, 그리고 그 잣대가 왕정 국가를 만족시킬지 실망시킬지는 좀 더 두고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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