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비공 닮은 극단의 야심가 ‘광기’의 끝?
  • 김회권 (judge003@sisapress.com)
  • 승인 2011.02.28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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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면초가에 몰린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의 정치 행로 나세르의 아랍민족주의 추종…반미·친미 오가며 42년 집권

 모든 것은 흥망성쇠의 사이클을 거친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무소불위의 권력도 언젠가는 그 힘이 다해 소멸하기 마련이다. 무아마르 카다피(Gaddafi) 리비아 국가원수(69)가 지닌 힘도 예외가 아니다.

카다피는 1942년 카다프족 유목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은 이집트의 가말 압둘 나세르 전 대통령이었다. 나세르는 아랍민족주의를 설파하며 1952년 이집트 혁명을 성공시킨 인물이다. 그는 당시의 아랍 젊은이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었고 ‘정치적 아이돌’이었다. 1959년 나세르의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를 봉쇄하자 영국·프랑스·이스라엘 연합군이 이집트를 침공해 ‘제2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이때 청년 카다피도 반(反)이스라엘 시위대에 참가한 전력이 있다.

육군 대위였던 28세에 쿠데타로 왕정 전복

▲ 지난 2월23일 리비아인이 말레이시아 주재 리비아 대사관 앞에 붙여놓은 ‘카다피 현상 수배’ 포스터. ⓒAFP연합

 이탈리아의 식민 지배를 받던 리비아는 1951년 독립한 뒤 아랍연맹과 국제연합에 잇달아 가입하는 등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등장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유전 개발은 서구 세력의 개입을 가져왔는데 아랍민족주의를 따르던 청년층에서는 왕정의 이러한 친(親)서방 정책을 비판하는 분위기가 적지 않았다.

 1963년 대학을 졸업한 뒤 군사학교에 입학한 카다피도 여기에 속했다. 카다피는 나세르를 본받아 청년 장교들을 중심으로 ‘자유장교단’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그리고 1969년 9월1일, 청년 장교들은 국왕 이드리스 1세가 신병 치료차 터키에서 요양하던 틈을 타 쿠데타를 일으켰고 수도 트리폴리에 무혈 입성했다. 국왕 대신 등장한 인물은 당시 28세에 불과했던 카다피 육군 대위였다. 왕정은 폐지되었고, 이때부터 현대 리비아가 시작되었다.

 청년 카다피는 대중 앞에 나설 때 ‘혁명의 아이콘’인 체 게바라처럼 군복을 입고 모자와 짙은 선글라스를 썼다. 집권 직후 혁명위원회 의장이 된 그는 사회주의식 국가 재편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자국 내 외국 세력을 몰아내겠다며 미국과 영국의 군사기지를 철거했다. 1970년에는 과거 리비아를 식민화했던 이탈리아 국민들을 모두 추방했고 재산을 몰수했다. 자본의 국유화도 시행하며 리비아 경제의 젖줄이던 석유회사를 모두 국유화시켰다.

‘아프리카연합’ 창설도 주도

 1970년 9월, 나세르가 사망했고 아랍의 구심점이 사라졌다. 카다피는 그 빈자리를 자신이 채우고자 했다. 1972년 리비아-시리아-이집트를 묶어 연합 형태의 공화국을 만들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1974년에는 튀니지에 국가 간 합병을 제의하기도 했다. 리비아와 친밀했던 이집트가 1979년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고 이집트 내 팔레스타인인들을 억압하자 그는 이집트를 비난하며 ‘반미’ ‘반이스라엘’ 깃발을 본격적으로 내걸었다. ‘반미’나 ‘반이스라엘’을 표방한 단체들은 카다피의 지원을 받으며 중무장했다.

 당시 미국은 이런 카다피를 관망했다. 그는 반미주의자였지만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아군도 아니지만 적군도 아니라는 인식이었다. 카다피와 미국의 이러한 관계는 보수적인 도널드 레이건 정부가 들어서자 일촉즉발로 치달았다.

 1979년 이란에서 일어난 이슬람 혁명은 리비아의 앞날에도 영향을 주었다.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벌어지자 미국은 사담 후세인이 이끄는 이라크를 지원했다. 반면 카다피는 시아파 국가인 이란을 지원했다. 리비아에서는 수니파가 인구의 70%를 차지하지만 카다피를 비롯한 군부는 시아파 신자이다. 이에 심기가 뒤틀린 레이건 정권은 리비아 정부의 전복 가능성까지 타진하기에 이른다.

 1986년 미국은 ‘엘도라도 작전’이라고 이름 붙인 리비아 공습을 감행했다. 리비아 트리폴리에 쏟아부은 포탄만 60t이었다. 1백1명의 사망자 명단에는 카다피의 입양 딸 한나도 들어 있었다. 카다피는 입양한 아들 밀라드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리비아는 보복에 나섰다. 1988년 스코틀랜드 상공에서 미국 팬암 항공기를 폭파시켰고(사망자 2백70명), 1989년 프랑스 UTA기를 아프리카 니제르 상공에서 폭파시켰다(사망자 1백70명). 미국은 리비아에 테러 국가 딱지를 붙였고 이때부터 대리비아 경제 제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미국과 리비아의 관계는 1990년대 말부터 급격히 회복되었다. 카다피는 팬암기 테러 사건의 용의자 두 명을 내주었고 미국은 리비아에 대한 제재를 사실상 풀어주었다. 2003년 사담 후세인 정권의 몰락을 지켜본 카다피는 스스로 대량살상무기 개발 계획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하며, 북한도 이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리비아는 석유를 내보내야 했고 미국은 석유를 받아들여야 했다.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이때부터 카다피는 아랍에 대한 관심을 접었다. 대신 아프리카 사회의 일원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2000년 7월 서아프리카 토고에서 열린 아프리카 통일 기구(OAU) 정상회의는 마치 아프리카로 귀환한 카다피에 대한 환영회와 같았다. 카다피 자신도 5천km에 걸쳐 니제르, 부르키나파소, 가나에 들러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이에 고무된 카다피는 유럽연합(EU)을 모델로 하는 ‘아프리카연합(AU)’ 창설을 주장했고 그의 주장대로 2001년 5월, AU는 정식으로 출범했다.

 9·11 테러에도 조의를 표하고 2003년 유럽인 관광객 14명이 알제리에서 납치되었을 때는 카다피 재단이 납치범에게 5백만 유로의 몸값을 부담하며 석방을 성공시키는 등 서방과의 관계 개선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과거 두 번의 비행기 테러 사건에 대해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 배상금도 지불했다.

 유럽은 지중해 건너 산유국인 리비아의 복귀를 환영했다. 2004년 3월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가 리비아를 방문해 카다피를 만났다. 2006년에는 미국이 리비아와의 외교 관계를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2007년),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2008년) 등이 잇따라 ‘산유국’ 리비아를 방문해 카다피를 만났다.

 카다피를 설명할 때 보통 ‘광기’나 ‘기행’이라는 단어를 앞세우지만 42년 장기 집권에는 정치력이 뒤따라야 한다. 이번 리비아의 반정부 시위는 동부 지방에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는 벵가지 지역을 비롯한 동쪽 리비아인들의 불만에서 비롯된다. 지리적으로 리비아의 중심축은 서쪽의 트리폴리와 동부의 벵가지로 양분된다. 카다피의 혁명에서는 트리폴리가 중심이었고, 그 덕분에 이곳은 리비아 오일 머니의 수혜지가 되었다. 트리폴리에 빌딩과 호텔이 속속 들어서는 동안 벵가지는 상대적으로 뒤처졌고 낙후되었다. 이번 동부 지방의 반정부 시위가 폭발적이었던 데는 상대적 빈부 격차와 이로 인한 동부 지역 부족의 불만이 꼽힌다. 하지만 카다피는 트리폴리를 중심으로 펼쳐진 3분의 2가량의 리비아인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3분의 1가량의 불만을 잠재워 왔다. 필요할 때는 미국과 이스라엘 등 외부의 적을 이용해 내부를 결속했다.

아들 세 형제, 유혈 진압 개입 의혹

 이번 리비아 사태에서는 카다피의 아들들도 주목받고 있다. 카다피는 7남1녀의 자식을 두었는데 리비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단체인 ‘카다피 재단’을 운영하고 있는 차남 사이프 알 이슬람 카다피가 ‘포스트 카다피’로 유력했다. 국가안보보좌관을 맡고 있는 4남 무아타심 카다피와 카다피 정권의 핵심 사단인 카미스 여단 사령관을 맡고 있는 6남 카미스 카다피 역시 후계를 노리는 라이벌로 꼽혔다. 이들 세 형제는 이번 유혈 진압에 깊이 개입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하지만 현재 리비아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으로 변하고 있다. 아들이 아닌 아버지 대에서 절대 권력은 붕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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