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불이 된 아랍 혁명, 미국 외교 정책도 뒤흔든다
  • 한면택│워싱턴 통신원 ()
  • 승인 2011.03.07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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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세계의 대격변에 초기에는 당황해하던 오바마 행정부가 결국 그동안 손잡아온 집권 세력과 결별 수순을 밟고 있다. 중동에서 불어닥치는 거센 바람 앞에 선 미국의 선택은?

 

▲ 지난 3월2일 미국 해군 전함 키어사지 호가 이집트 이스말리아 지역의 수에즈 운하를 따라 운항하고 있다. ⓒAP연합

아랍 세계의 민주화 대지진에 슈퍼 파워 미국도 휘청거리고 있다. 튀니지와 이집트의 독재 정권이 붕괴된 데 이어 리비아를 비롯해 다음은 어느 정권이 될 것인지에 지구촌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미국은 이란 혁명, 소련 연방 해체, 동구권의 붕괴 등 격변을 겪으며 비교적 스마트하게 대응해 슈퍼 파워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번 아랍 세계의 대격변은 어느 날 갑자기, 동시에 봇물처럼 터져나와 미국의 대외 정책에도 빅뱅을 불러오고 있다.

미국은 아랍 세계에서 30~40년 동안 복잡한 딜레마에 빠져 파워를 유지하는 데 애를 먹어왔다. 수십 년 독재 정권이 무너진 튀니지와 이집트 그리고 도미노 현상을 일으키며 거세게 불길이 번진 리비아, 예멘, 바레인, 오만, 알제리, 모로코, 이란 등에서 한두 나라를 빼고는 미국의 막대한 국가 이익이 걸려 있는 곳이다.

하지만 미국은 안보 이익을 위해 독재 정권과 수십 년간 손을 잡아왔다가 이번에는 민주화 개혁 시위의 편에 서서 어제의 파트너들에게 비수를 겨누어야 하는 당혹스런 상황을 겪었다. 시민 혁명 18일 만에 무바라크 30년 철권통치를 종식시킨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맺고 중동 평화를 지켜온 파수꾼이자 테러 조직과 이란을 견제해주는 역할까지 맡아왔다.

예멘은 알카에다 테러 조직과 벌이고 있는 테러 전쟁의 최전선에 있는 나라이다. 통일 예멘 대통령으로는 21년, 북예멘 대통령까지 포함하면 33년째 장기 집권하고 있는 살레 예멘 대통령은 미국이 벌이는 ‘테러와의 전쟁’을 돕는 파트너이다. 바레인은 이슬람 수니파 왕가와 시아파 국민들이 분열되어 있는데 미국은 이곳에 제5함대 기지를 두고 있다.

이들 국가 뒤에는 최대 산유국으로서 온건 아랍의 맹주이자 미국의 버팀목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있다. 과연 알카에다가 타도 대상으로 삼고 테러를 시작한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정에게도 이번 불똥이 튈지에 미국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독재 정권 버리고 역사 편에 서겠다”

▲ 지난해 9월1일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을 방문한 무바라크 당시 이집트 대통령(왼쪽)과 대화하고 있다. ⓒAP연합

미국은 이번 아랍 세계의 대격변을 겪으며 수십 년간 손잡아온 독재 정권들을 버리고 역사의 편에 서겠다며 시민 혁명, 민주화 개혁을 전폭 지지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오바마 행정부는 튀니지발 민주화 개혁 바람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상당히 당황해하며 우왕좌왕했으나 변화의 물결에 따르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한 발짝 더 나아가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 원수에 대해서는 즉각 퇴진할 것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민주화 개혁 시위와 민주적 과도 정부를 세우려는 노력을 지지·지원하겠다고 선언했다.

리비아 카다피 정권과 미국은 사실상 별다른 이해관계나 교분을 갖고 있지 않다. 하루 1백80만 배럴의 석유를 생산하는 여덟 번째 산유국인 리비아로부터 미국은 단 한 방울의 기름도 들여오지 않는다. 리비아의 석유 생산 시설에 가장 많이 투자한 회사는 영국의 BP 사이고, 리비아가 생산해내는 석유의 85%는 유럽 국가들이 사들이고 있다.

아랍 세계에는 나라마다 수억 달러에서 10억 달러 이상의 군사 원조를 해마다 제공하고 있으나 리비아에는 그런 것도 없다. 단지 석유를 개발하기 위해 서방의 투자와 기술 지원을 절실히 원했던 카다피가 핵 등 대량살상무기를 포기하고 나섰기에 교류를 트기 시작한 것뿐이다. 그런데도 미국은 리비아 시위 사태가 터져나오자 처음에는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자국민들을 모두 철수시킨 다음부터는 경제 제재 카드는 물론 군사력까지 동원해 전 방위 압박을 가하고 있다.

미국은 카다피 리비아 정권에 대해서는 무바라크 30년 독재 정권의 퇴진으로 끝난 이집트 사태 때와는 또 다른 전략을 쓰고 있다. 3백만 달러의 미국 내 자산을 동결했고, 군사 옵션까지 꺼내들었다.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호와 순양함, 구축함, 미 해병대 병력을 동원하고 있다. 통신 교란 작전으로  카다피의 군사 명령 체계를 무력화시키고 폭격도 감행할 수 있다는 군사 조치로 압박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포스트 독재 정권 이후의 지도층과 어떤 관계를 구축하고 있느냐에 따라 대응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는 관측을 낳고 있다. 미국은 이집트에서 무바라크 대체 세력을 쉽게 찾을 수 있었고, 그 세력이 반미 과격주의는 아니기 때문에 확실하게 무바라크 퇴진 카드를 쓸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이집트에서는 군부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며 두 전직 대통령들도 군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군부 지도자들을 잡으면 이집트의 민주화 개혁도 성공시키고 미국의 이익도 어느 정도 지킬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과 마이크 멀린 합참의장은 무바라크로부터 권력을 넘겨받은 이집트 최고 군사평의회의 두 핵심 인물인 탄타위 국방장관, 에난 육군참모총장과 돈독한 관계를 구축해온 것으로 미국 언론들은 전했다. 미국은 한 해에 13억 달러의 군사 원조를 해왔기 때문에 이집트 군부 지도자들과의 비교적 안정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개혁 세력에 기술·재정적 지원 방침 밝혀

미국이 이번에 새로 선보인 대외 전략 가운데 하나는, 장기 집권하고 있고 시민 혁명의 불길에 휩싸일 조짐을 보이는 파트너 정권들에게 선제 조치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미국은 “자국민들의 민주화 개혁 목소리를 경청하고 개혁을 선도하라”라고 주문하고, 그 물결을 거부하거나 저항하면 무바라크 같은 운명을 맞게 될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 미국은 이런 경고가 아랍 세계의 중심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먹혀들어 조용한 개혁이 이루어지는 동시에 미국의 맹방도 건재하게 유지하는 계기를 만들려 시도하고 있다.

민주화 시위의 다음 타깃이 사우디아라비아가 될 수 있다고 보는 전문가들도 있으나 미국 관리들은 다르게 관측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압둘라 국왕은 최근 신병 치료를 서둘러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4백억 리알(3백60억 달러) 규모의 대형 경기 부양책을 내놓았다. 주택 건설, 창업 지원, 공무원 임금 인상 등을 담은 이 경기 부양책은 부익부 빈익빈에 불만을 가진 자국민들의 분노가 터져나오기 전에 선제 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였다. 미국은 압둘라 국왕이 6년 전부터 추구해 온 각종 개혁 조치에 좀 더 속도를 내서 불만과 불안 요소를 미리 제거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처럼 이번 아랍의 대격변을 계기로 미국의 대외 정책에도 빅뱅이 일어나고 있다. 미국은 우선 인터넷 시대, 소셜 미디어 시기에 걸맞은 민주화 개혁을 지원하는 작전을 펼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어떠한 독재 정권이나 폭압 정권, 폐쇄 정권들도 인터넷, 소셜 미디어를 동원한 민주화 개혁 시위에는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은 앞으로 미국은 각국의 국민들이 트위터, 유튜브 등 소셜 미디어를 이용해 독재에 항거하고 민주화 개혁을 달성할 수 있도록 기술·재정적으로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독재 정권이 자국민들에게 인터넷망을 봉쇄한다면 미국이 돈과 기술을 들여 이를 뚫어줌으로써 민주화 바람을 일으키게 도와주겠다는 뜻이다.

미국은 이어 안보 이익 때문에 독재 정권 편에 서기보다는 민주주의 종주국으로서 민주화 개혁, 역사의 편에 서겠다는 입장을 다짐하고 나섰다. 미국은 민주 정권이 반미 또는 과격주의만 아니라면 진정한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미국은 그런 민주 정권과 협력하면 수십억 달러의 원조를 하며 독재와 인권 탄압까지 눈감아주어야 했던  과거의 딜레마를 겪지 않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또, 미국은 민주화 개혁 이후 반미·과격주의자들이 대체 세력으로 등장하는 일만큼은 반드시 막겠다는 의지는 유지하고 있다. 1979년 이란 혁명으로 이슬람근본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란은 현재 미국의 최대 골칫거리 정권이 되어 있는데 그런 과오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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