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혁명’ 가로지르는 차별의 벽
  • 김회권 (judge003@sisapress.com)
  • 승인 2011.03.28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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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간 갈등으로 번진 바레인·예멘에서는 시위 유혈 진압 이어져…미국의 이중적 셈법 여실히 드러내

 

▲ 지난 3월17일 한 바레인 시아파 성직자가 이란 테헤란의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 앞에서 사우디와 바레인 정부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연합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정치적 격변을 가져온 민주화 운동은 여러 국가에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격렬한 형태로 표출되고 있는 곳이 리비아이다. 리비아의 경우는 반(反)정부 세력이 현대적 무기로 대응하면서 ‘내전’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고, 예멘과 바레인에서는 비무장 시위대를 향해 군이 발포하는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지난 3월18일 예멘의 수도 사나에서는 시위대 중 52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으로 일부 군 간부와 각료들은 알리 압둘라 살레 현 대통령에게서 등을 돌렸다. 33년 독재로 다져진 정치적 기반이 순식간에 약화된 셈이었다. 궁지에 몰린 살레는 21일 군 간부, 부족 지도자들과 만나 연내에 대통령에서 물러나기로 합의했다. 살레측 대변인은 올해 안 또는 내년 1월 의회 선거를 실시한 뒤 사임할 것이라고 밝혔다. 기존의 2013년 퇴진안에서 많이 양보한 것이었다. 하지만 시위대는 즉각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살레는 2005년에 물러나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어긴 전력이 있었다.

유혈 충돌은 끊이지 않았다. 22일에는 예멘 남동부 지역 무칼라에서 군대 간 충돌이 일어났다. 살레 현 대통령을 지지하는 친위대와 시위대를 지지하는 일부 군이 부딪치면서 두 명이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 외신에서는 ‘남예멘과 북예멘의 대결’ 혹은 ‘남북 전쟁의 위기’라고 표현했다.

‘수니파 대 시아파’ 대결로 보는 시각 많아져

▲ 시아파가 국민의 다수를 이루는 이라크 내 바그다드의 한 사원에서 기도하는 이슬람 신자들. ⓒEPA

대폭 양보한 제안이 시위대에 거부당하자 살레는 강경하게 돌아섰다. 23일, 예멘 의회는 30일간 유효한 ‘비상조치법’을 승인했다. 이번 비상조치법으로 정부는 보도를 검열할 수 있고 집회를 금지할 수 있으며, 별도의 법적 절차 없이 체포도 할 수 있게 되었다. AP통신은 야당과 무소속 의원이 불참한 가운데 표결이 이루어졌으며 찬성과 반대 수는 분명하지 않다고 전했다.

바레인은 예멘보다 한층 더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 예멘은 ‘독재 대 민주’라는 비교적 명확한 전선으로 갈라져 있는 반면, 바레인은 종교 간 대립에 주변국 개입 문제까지 얽혀버렸다.  

지난 2004년 요르단 국왕 압둘라 2세는 중동 지역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우려했다. 이란을 중심축으로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등 이른바 ‘시아파 초승달 지대’가 시아파 지배 체제로 묶일 경우 수니파 지배 체제 국가가 위험해진다는 주장이었다. 바레인에서는 소수의 수니파 왕조가 다수의 시아파를 지배하고 있다. 당시 소수파 지도자의 엄살로 치부되던 ‘시아파 초승달 지대’는 2006년 미국 외교위원회가 ‘발흥하는 시아파 초승달 지역 : 미국 정책이 의미하는 것’이라는 제목의 심포지엄을 개최하면서 공식적인 ‘근심’이 되었다.

중동의 정치 문제를 ‘수니파 대 시아파’의 프레임으로 보는 관점은 시간이 흐를수록 중요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런 대결의 프레임으로 중동 문제를 바라보게 될 경우 이곳의 갈등은 국경을 넘어서 다른 정체성을 가진 블록을 포함하게 되고 결국 충돌은 불가피해진다.

시아파의 종교적 권위는 경계를 뛰어넘는다. 2002년 바레인의 시아파가 마나마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습격한 이후 벽에 남은 것은 헤즈볼라 깃발이었다. 이란 지도자 호메이니의 포스터는 레바논 남부 지역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압둘라 2세의 근심은 2011년 바레인에서 현실이 되고 있다. 외신들은 바레인의 민주화 시위를 ‘수니파 대 시아파’의 프레임으로 바라본다. 바레인의 시아파가 소수 지배 세력인 수니파에 반기를 들며 왕정 타도를 외치자 3월14일 수니파 맹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하는 ‘걸프협력회의(GCC)’ 연합군이 바레인에 들어갔다. 1천명의 사우디 군인과 5백명의 아랍에미리트연합(UAE) 경찰은 바레인 수도 마나마의 주요 거점과 수도 외곽의 시아파 주민 거주 구역에서 기관총을 손에 든 채 경계 태세에 돌입했다.

시아파 맹주인 이란은 이에 강력히 반발하며 바레인 주재 대사를 소환했다. 로이터통신은 시아파인 누리 알말리키 이라크 총리가 “(수니파 국가들의 바레인 개입은) 종파 갈등을 부추긴다”라며 비판했다고 보도했다. 이라크 의회는 더 나아가 바레인의 반정부 시위대에 약 5백만 달러를 지원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바레인은 주변국 군대 개입으로 상황 더 복잡

외국군이 들어온 직후인 3월16일 바레인 수도 마나마에서는 유혈 사태가 일어나 반정부 시위대 10여 명이 사망했다. 수니파는 점점 강경책을 취하기 시작했다. 바레인 정부는 야당 지도자들과 인권운동가 등 반대 세력의 주축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18일에는 그동안 반정부 운동의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던 진주 광장의 기념비(높이 90m)를 철거하고 주위에 탱크를 배치해 시위를 막는 데 전력투구했다. 구급 병원도 정부의 치안부대가 점령해 부상을 입은 시위대가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1일에는 쿠웨이트 해군의 군함 여러 척이 바레인에 입항했다고 바레인 국영 통신이 전했다. 쿠웨이트군의 입항은 바레인의 치안 유지를 위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로써 바레인에 파견된 외국군은 사우디아라비아, UAE에 이어 쿠웨이트까지 3개국으로 늘었다. 시아파 시위대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22일 가두 시위를 벌였다. “칼리파 왕실에 죽음을” “사우디 미군은 철수하라”라며 분노의 목소리를 격하게 내뿜었다.

현재 리비아 문제는 1990년 걸프 위기, 2003년 이라크 전쟁보다 한층 복잡하게 얽혀 있다. 주변 정황을 볼 때 더 이상 리비아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무력에서 앞서는 카다피 정부의 공격 때문에 반정부 진영은 국제 사회에 도움을 요청했고 군사적 개입이 진행되었다. 리비아 내전에 군사 개입이 이루어지면서 탄압이 심해지고 있는 바레인과 예멘에도 비슷한 개입을 요구하는 국제 여론이 일어날 수 있다. 중동 지역의 민주화 요구 그리고 ‘민중 대 정권’의 대립 구도를 군사적 개입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된 전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바레인에는 미군의 대규모 해군 기지가 있고, 예멘은 알카에다 소탕에 협력하며 테러와의 전쟁에 동참했던 국가이다.

윌리엄 번즈 미국 국무부 차관은 지난 3월17일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일어난 민중 봉기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해당 지역의 다른 국가에게 매우 중요한 사례이며 민주화 지원은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의 가장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이다.” ‘민주화 지원’이 미국 중동 외교를 지탱하는 큰 원칙이라고 밝힌 셈이다.

반면 아랍연맹(AL)의 일원인 바레인 왕실이 연합군의 리비아 군사 개입에 대해 ‘공습 지지’를 표명하고 나서자 각종 추측이 제기되고 있다. 매년 13억 달러의 군사적 지원을 받는 이집트마저 묵묵부답인 상황에서 ‘소국’ 바레인이 총대를 맨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바레인 내부에서는 “(공습의 지지를 원하는) 미국과 (바레인 개입을 용인하라는) 걸프 국가들 사이에서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라는 강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미국의 선택은 이랬다. 튀니지와 이집트의 시위대는 옹호했고 리비아 시위대와는 전쟁을 함께하고 있다. 하지만 예멘과 바레인에서는 시위대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는 정부와 손을 꽉 잡고 있다. 민주화를 열망하는 예멘과 바레인의 흐름은 오히려 미국의 이중적 셈법만을 부각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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