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특수’가 부활했다
  • 최광희│영화 저널리스트 ()
  • 승인 2011.04.04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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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스완> <킹스 스피치> 등 흥행 돌풍…한국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관객 몰이도 화제

극장가에서 3월은 전형적인 비수기이다. 그런데 올 3월에는 최근의 흥행 트렌드와는 거리가 멀었던 작품이 흥행에서 선전하는 기현상을 보였다. 무엇보다 아카데미상 수상작의 흥행이 눈에 띈다. 10년 전쯤만 해도 아카데미에서 상을 받았다는 이유로 기본적인 흥행은 보장받을 수 있었다면, 최근 들어서는 아카데미 특수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수상작이 흥행과 큰 인연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지난 2008년 작품상 수상작이었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감독상 수상작인 <데어 윌 비 블러드> 모두 국내에서는 별반 흥행 재미를 보지 못했다. 지난해 주요 수상작인 <허트 로커>나 <크레이지 하트> <블라인드 사이드> 같은 작품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두 소규모 상영관에서 적은 수의 관객을 만나는 데 그쳤다.


‘아카데미상 수상’은 흥행 필패 등식 깨져

그런데 올해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나탈리 포트만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대런 아르노프스키 감독의 <블랙 스완>은 개봉 한 달째인 지난 주말까지 1백5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전통적인 극장가 비수기에 이 정도 관객을 불러 모았다는 것은 꽤 흥행한 축에 속한다.

<블랙 스완>은 뉴욕의 촉망받는 발레리나가 <백조의 호수>의 주연 자리를 맡으면서 겪게 되는 심리적인 방황을 사이코 스릴러적인 호흡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아카데미 시상식이 있기 전인 2월24일 개봉한 영화는, 2월28일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린 직후인 개봉 2주차부터 관객들이 개봉 때보다 더 많이 몰리는 현상을 보였다.

스펙터클함보다는 잔잔한 감동에 관객 몰려 

올해 아카데미에서 최고상인 작품상을 비롯해 네 개 부문을 석권한 <킹스 스피치>도 흥행이 잘되고 있다. <블랙 스완>의 흥행세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기존 아카데미 수상작과 비교해보았을 때는 꽤나 대중적인 공감대를 얻으며 흥행에서 순항하고 있다. 개봉 첫 주말에는 1억 달러 이상의 제작비가 투입된 할리우드 SF 블록버스터 <월드 인베이전>에 밀려 2위로 출발했지만 개봉 2주차로 접어들어서는 <월드 인베이전>을 제치고 박스오피스 1위로 치고 올라가며 기세를 올렸다. 누계 관객 수는 50만명을 넘어섰다. 비교적 잔잔한 호흡의 휴먼 드라마인 <킹스 스피치>가 컴퓨터 그래픽을 활용한 액션이나 볼거리가 많았던 <월드 인베이전>을 제쳤다는 것은, 그만큼 최근 관객이 스펙터클한 오락 영화보다는 잔잔한 성찰과 감동이 담긴 영화를 선호하고 있다는 방증으로 보인다. 영화 <킹스 스피치>는 1930년대에 영국 왕위에 오른 조지 6세의 말더듬증 극복기를 극화한 작품이다. 인간 승리의 드라마 속에서 베토벤 등의 클래식 음악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왕실을 배경으로 우아하고도 감동적인 휴먼 드라마로 탄생되었다는 평가이다.

한편, 3월에는 한국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흥행 돌풍도 충무로 안팎에 화제를 모았다. 이 영화는 이순재·송재호·김수미·윤소정 등의 중견급 배우가 주연을 맡은, 일종의 실버 멜로물이다. 2월17일에 개봉해 박스오피스 1위에는 한 번도 오르지 못했지만 한 달이 넘게 중·상위권을 유지하면서 꾸준하게 관객 몰이를 이어가고 있다. 제작사인 그대사엔터테인먼트에 따르면, 3월30일까지 누계 관객 1백30만명을 넘어섰다. 손익 분기점(70만명)의 두 배 가까운 흥행 몰이를 한 셈이다. 이 회사의 명수미 마케팅 실장은 “처음에는 20대 관객들을 주요 타깃으로 했는데, 그들이 부모 세대에게 적극 추천하면서 중·장년층 위주로 입소문이 확산된 것이 흥행 롱런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2009년 흥행 돌풍을 일으켰던 다큐멘터리 <워낭소리>에 이어 중·장년층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는 흥행 시장을 재확인했다는 점에서 충무로 안팎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삶에도 위기는 온다. 여기, 뉴욕의 상류층 커플 조안나(키이라 나이틀리)와 마이클(샘 워싱턴) 또한 그렇다. 남들의 눈에는 더 없이 완벽한 이 3년차 부부는 서로의 곁을 비운 어느 날 밤, 모두가 부러워했던 현재를 뒤흔들 수도 있는 유혹에 직면한다. 함께 출장을 간 직장 동료 로라(에바 멘데스)에게 끌리는 마이클, 그리고 우연히 만난 옛사랑 알렉스(기욤 까네)로 인해 흔들리는 조안나. 이상적으로 보였던 결혼은 그렇게 위기를 맞는다. 어쩌면 애초에 예정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자고로 지나치게 안정된 관계는 불안을 부르는 법 아니던가. 영화 <라스트 나잇>의 이야기이다.

익숙한 설정이라고? 그렇다. 불륜은 동서고금이 사랑해 마지않는 소재이다. 심지어 부부가 맞바람에 나서는 지경이니, 이쯤 되면 그 흔한 아침 드라마가 연상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남자는 충동적이고 여자는 이성적이라는 구도 또한 전형적이다. 각자의 순간을 교차시켜 보여줌으로써 긴장을 고조시켜나가는 편집 방식 또한 새롭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완전히 익숙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다른 점도 물론 있다.

우선, 불륜을 다루고 있음에도 이른바 격정적인 베드신이 하나도 없다. 영화는 배우의 벗은 몸 대신 캐릭터의 흔들리는 내면을 전면에 내세운다. 하룻밤 ‘사고’의 일탈적 흥분 대신 영상을 채우는 것은 각 인물들이 느끼는 혼란과 불안이다. 네 명의 배우는 잘 조율된 연기로 얽히고설킨 네 사람의 감정을 보여주며, 특히 혼란 그 자체인 듯 눈망울을 굴리는 키이라 나이틀리의 연기는 쏠쏠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적당히 들고나는 음악은 영화적 감수성을 끌어올리고 있으며, 기교적이지 않지만 충분히 화려한 촬영과 편집도 이야기에 힘을 보탠다.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탐색과 유혹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전, 일상적으로 나누는 대화와 가벼운 스킨십만으로도 긴장감을 조성해내는 감독 마시 태지딘의 솜씨이다. 시선의 교차나 스치는 손끝에서 성적 긴장을 끌어내는 세밀한 손길은 관계의 균열과 불안한 행복이라는 영화의 본질을 좀 더 효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제5회 로마영화제 개막작, 제35회 토론토영화제 폐막작에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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