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 우리는 왜 악녀에 더 빠져들까
  • 정덕현│대중문화평론가 ()
  • 승인 2011.04.11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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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드라마의 주요 캐릭터로 ‘미실’형 여인들 급부상

 

▲ SBS ⓒSBS 제공

여성의 적은 여성이다? 이 닳고 닳은 드라마 작법에서 대치하는 여성은 선과 악으로 그려지기 마련이었다. 그토록 반복적으로 그려진 고부간의 갈등에서 시어머니는 악이고 며느리는 선이라는 식이다. 현대극 속 직장 내 여성의 대결 구도나 사극 속 계급의 차이를 보이는 여성의 대결 구도에서도 마찬가지다. 한편은 넘어서야 할 악이고 주인공은 늘 선이다. 이른바 권선징악의 고전적인 스토리 주제가 남긴 잔재이겠지만, 여기에는 여성은 늘 선의 입장, 즉 착해야 인정받고 성공할 수 있다는 암묵적인 뉘앙스가 깔려 있다.

물론 신데렐라로 대변되는, 남성이 구원자가 되고 여성은 수동적인 존재로 서 있던 과거의 스토리 구조는 현대에 와서 상당 부분 바뀌었다. 즉, 여성의 사회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워킹우먼의 좀 더 능동적인 삶(남성의 시선에 포획된 존재가 아닌)이 더 주목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의 성장 스토리를 담은 <대장금> 같은 퓨전 사극은 공전의 히트를 쳤다. 물론 장금이는 과거 여성과는 달리 능동적인 구석이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선함’을 강요받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여성=성공=선’의 구도가 깨진 것은 <선덕여왕>에서부터였다. 미실(고현정)이라는 캐릭터의 등장은 ‘여성=성공’이라는 구도가 반드시 ‘선’일 필요는 없다는 새로운 등식을 만들어냈다. 미실은 이 사극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덕만(이요원)을 압도했다. 신분과 여성이라는 차별을 뛰어넘어 한 나라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지도자가 된 미실이라는 존재는 그동안의 여성 캐릭터와는 달리 자기 욕망을 끝까지 밀어붙여 실현시킨 여성으로 부각되었다. <하얀 거탑>의 장준혁 신드롬이 각광받았던 것처럼, 남성의 욕망 추구는 그것이 정의는 아닐지라도 심지어 아련한 페이소스까지 만들어내는 시대에, 왜 여성은 여전히 자기 욕망 추구를 버리거나 숨겨야 할 어떤 것으로 치부해야 할까. 미실은 바로 이 지점을 과감하게 깨버린 ‘여자 장준혁’이었다.

최근 들어 이처럼 자기 욕망에 충실한 ‘여자 장준혁’이 드라마 곳곳에서 눈에 띄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른바 ‘악녀 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지금은 독한 여성이 자기 욕망을 향해 질주한다. <짝패>의 막순(윤유선)은 자신을 겁탈해 아이까지 갖게 한 양반집 주인을 찾아가 그 임종을 함께해준다. 물론 선한 의도는 없다. 유산 때문이다. 죽음에 임박한 사내를 종용해 막순은 5만냥의 유산을 받아낸다. 막순이 자기 욕망을 드러내는 반면, 그 주변 인물인 남성들은 막순에게 휘둘리는 존재이다. 그 죽은 양반의 아들로 둔갑한 착한 천둥(천정명)은 막순의 쇼에 괴로워하고, 자신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순박한 쇠돌(정인기)에게 막순이 한몫을 떼어주려 하지만 그는 “그런 것 필요 없다. 너만 바라볼 수 있게 해달라”라고 말한다. 그동안의 드라마가 보여주었던 남녀 상황의 역전이다.

좌절된 욕망을 투사할 악역이 필요해

▲ MBC ⓒMBC 제공

<마이더스>의 유인혜(김희애) 대표는 이 드라마의 극성을 만들어내는 인물이다. 유인혜 대표는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속으로는 욕망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악녀이다. 김도현(장혁)을 끌어들여 자신이 원하는 한영은행을 인수·합병하게 만든 후, 쓸모가 없어지자 가차 없이 버리는 인물이다. 이 치열한 머니 게임의 틈바구니에 끼여 있는 김도현이 심지어 상대적으로 약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반면 이 드라마의 주제 의식이자 착한 캐릭터인 이정연(이민정)은 너무 존재감이 약하다. 욕망이 거세된 느낌마저 주기 때문에 공감대에서도 멀어져 있다. 즉, 유인혜 대표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이정연은 여전히 신데렐라 캐릭터에 머물러 있다. 그녀는 갑자기 만난 사채업계의 큰손 우금지 여사(김지영)에 의해 천거된 인물이다.

최근 ‘여자 장준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캐릭터는 <로열 패밀리>의 김인숙(염정아)이다. 그녀에게 쏟아지는 찬사는 ‘예쁘다’거나 ‘착하다’는 것이 아니다. 섬뜩하다. 인간이 아니다. 악녀보다 더한 괴물이다. 이런 찬사(?)를 받는 김인숙은 우리가 늘 드라마에서 보아오던 그런 주인공의 이미지가 아니다. 그녀는 독하고, 때로는 악하며, 때로는 서늘할 정도로 사람의 뒤통수를 친다. 김인숙이 괴물처럼 여겨지는 이유는 단지 극 중에 그녀를 ‘괴물’로 지칭하는 대사가 등장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캐릭터가 가진 내면과 외면의 완벽한 대조이다. JK그룹 정가원 사람들에게 늘 구박받는 전형적인 며느리인 그녀는 남편을 잃고 자식마저 잃을 위기에 처한 비련의 여인처럼 보이지만 그 속내는 무서울 정도로 냉철한 면이 있다. 구박받으며 살아온 세월 내내 사실은 철저히 준비를 해 온 것이다. 와신상담이라는 말을 실천해 온 그녀이다. 그래서 그 완벽한 가련형 얼굴의 연기가 더 무시무시하게 다가온다.

시어머니인 공회장(김영애) 앞에서는 한없이 여린 모습으로 눈물을 흘리지만, 뒤돌아서면 입꼬리가 올라가며 악마 같은 조소를 날린다.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녀는 자신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초상류층 집안 사람들의 무릎을 꿇리려 한다. 그저 한가롭게 자원봉사를 해 온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것을 통해 정·관계에 엄청난 인맥을 준비해 온 것처럼, 그녀의 겉모습이 사실은 연기였다는 것이 드러날 때 그 지독함에 몸서리를 치게 된다.

참고 견디며 착하게 살아가는 캐릭터를 비현실적으로 여겨

▲ MBC ⓒMBC 제공

하지만 이 요동치는 내면의 욕망을 숨기고 무표정한 얼굴로 감정을 억누르는 괴물의 면모를 가진 김인숙에 공감하게 되는 것은 더 살벌한 얼굴을 가지고 있는 정가원 때문이다. 대중에게는 막연한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그 재벌가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딸로 구성된 가족의 얼굴을 갖고 있지만, 사실은 비정한 경쟁이 벌어지는 사업의 현장이다. 시어머니인 공회장은 끝없이 자식과 며느리를 비즈니스의 경쟁 속으로 밀어넣고 그 승자와 패자에게 상벌을 내린다. 거기에서 어떤 결과를 내야 인간으로 대접받는 곳이 바로 정가원이다. 그 ‘로열 패밀리’의 세계 속에서 심지어 K로 불리는 김인숙은 인간이 아니다. 부정의 부정이다. 인간이 아닌 자들이 인간이 아니라고 부르는 그 대상은 인간이라는 긍정이다.

비련의 며느리 캐릭터가 심지어 괴물 같은 사업가로 변신하는 과정은 보는 이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정가원이 집안이면서 기업이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며느리의 시집살이 복수극 버전이면서, 회사에서의 직장 여성 성공기가 된다. 김인숙은 따라서 일터와 가족 속에서 현대 여성의 욕망을 대변하는 캐릭터이다. 그녀가 왜 괴물이 되었는가 하는 점은 여성이 살아남기 위해 심지어 괴물이 되어야 하는 현대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면서, 연민이자 공감이다.

선한 인물의 선한 이야기에 대중들은 더 이상 관심을 갖지 못하게 된 것일까. 아무리 힘들어도 참고 견디며 착하게 살아가는 캐릭터를 대중은 비현실적으로 여긴다. 왜 그럴까. 핵심은 ‘욕망’이다. 욕망 추구가 윤리나 정의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는 얘기는 그만큼 욕망이 좌절되는 현실을 말해주기도 한다. 드라마를 통해서나마 비록 탈선한다고 하더라도 그 욕망의 질주를 해보고 싶은 욕구. 무언가를 얻기 위해 바락바락 소리 지르고 심지어 속내를 숨긴 채 10여 년을 칼을 갈고 욕망을 쟁취하기 위해서 누군가를 서슴지 않고 밟고 올라서는 그 악녀는 지금 대중을 매료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 풍경에서 엿보이는 것은 현실에서 겪고 있는 여성들(로 대변되는 약자들)의 좌절된 욕망이다. 착하게 모든 것을 감내하고 견디는 삶이 더 이상 현실적인 보상이나 혜택으로 돌아오지 않는 현실. 그 누가 이들 악녀에 매료되는 대중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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