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은 말없이 그렸고, 이병철은 표정이 풍부했다”
  • 정리·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1.05.15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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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사진가 김한용씨의 인물 사진과 함께 듣는 ‘그때 그 사람들’ / “신상옥 감독과 배우 최은희는 단골 모델”
▲ 피난 시절 부산에서 찍은 화가 이중섭

‘한국 광고 사진의 대부’로 불리는 원로 사진가 김한용씨(88세·<시사저널> 제1122호 참조)는 인물 사진도 많이 찍었다. 보도사진 기자로 출발했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고, 늘 카메라를 품고 다녔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했다. 한국전쟁 뒤 한강 백사장에서 에어쇼를 참관하던 이승만 대통령이나 제1회 국전 개막전에 등장한 경직된 표정의 이승만 대통령 사진, 기업인 이병철 삼성 창업주나 박태준 포철 명예회장, 윤보선이나 김영삼, 김두한 같은 정치인부터 화가, 소설가, 무용가, 영화감독, 정치 깡패까지 다양한 계층의 인물이 그의 카메라 앞에 섰다.

그는 “눈빛이 그 사람의 성격을 나타낸다. 깡패라면 눈빛이 매섭고 예술인은 부드럽고 정치인은 상대를 압도하는 그런 것이 눈에 보여야 한다. 또 그런 특징이 있는 사람이 생명이 길다. 그렇게 보이도록 도와주는 것이 사진가의 역할이지만 찍히는 사람도 노력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서가에 꽂힌 책 한 권을 꺼내 내밀었다. “카쉬라는 유명한 인물 사진가이다. 이 사람은 사진관 카메라맨이다. 이 사람 사진을 보고 나도 최대한 노력해보자고 다짐했다. 하나라도 건질까 해서 무척 많이  찍었다. 이루려고 노력을 했는데 이루었는지는 모르겠다”라고 그는 덧붙였다.

피란지 부산의 이중섭과 한묵

▲ 김영삼 전 대통령.

한국 현대화단의 거목으로 꼽히는 이중섭과 한묵, 김영수는 모두 젊은 날의 모습을 김한용의 카메라에 남겼다. 그중 이중섭과 신사실파 활동을 함께한 김영수 화백은 올해 90세로 프랑스에서 귀국해 올해부터 한국 활동을 펼치고 있다. 추상주의 회화의 대가인 한묵 화백은 올해 98세로 여전히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다. 한묵은 불우하게 세상을 떠난 이중섭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를 지내주기도 했다.
 
“이중섭은 참 말이 없었다. 1951년인가, 52년인가, 내가 부산일보에서 일할 때였다. 부산 광복동의 다방에 가면 이중섭이 늘 혼자 나와 있었다. 보면 혼자서 담배곽 은박지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찻값도 없는지 그냥 앉아 있는 듯싶었다. 그때는 필름값이 비쌌기 때문에 유명한 사람만 찍었는데 이중섭은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방 앞에서 포즈 좀 취해달라고 했더니 그가 기꺼이 응해주었다. 신문 보도용으로 찍은 사진이 아니라 그냥 내가 찍고 싶어서 찍은 사진이다.

▲ 임화수 정치 깡패·영화인.

한묵은 나처럼 이북에서 넘어온 사람이다. 부산 국제극장에 <콩쥐팥쥐>라는 연극을 취재하러 갔는데 그가 무대미술 담당이었다. 거기서 알게 되어 가끔 만나서 차도 마시고 그랬다. 한묵의 사진 역시 내가 찍고 싶어서 찍은 사진이었다.”  

정치 깡패 임화수

1950년대 그가 찍은 인물 사진 중 가장 돋보이는 사진 가운데 하나는 정치 깡패 임화수의 사진이다. 굵게 옹이가 잡힌 임화수의 손과 치아에 덧씌운 금속 크라운, 삼각꼴의 눈은 이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유감없이 전해준다.

“신상옥 감독이 영화 <청년 이승만>의 총감독을 맡았기에 내가 스틸을 찍게 되었다. 대한민국 일류 영화배우들이 모두 무료로 출연했던 영화이다. 그때는 미리 찍은 영화 스틸을 지방 배급업자에게 보여주고 선금을 받아 제작비를 조달했다. 그때 임화수의 사무실이던 반공청년단 사무실이 충무로3가 스타다방 2층에 있었다. 내가 영화 스틸을 가져다주면 임화수가 아주 좋아하면서 문 앞까지 나와서 인사를 했다. 나같이 빼빼 마른 사람에게 인사하니 밑에서 일하던 ‘어깨’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때 통상 영화 스틸비가 편당 20만원이었는데 임화수가 촬영비만 70만원을 주었다.

나중에 임화수가 신상옥 감독을 야단치기도 했다. 스틸은 나오는데 왜 영화는 안 나오느냐면서 다그쳤다. 영화는 1960년 3월인가 국제극장(현 광화문 감리회관 자리)에 걸렸는데 4·19 혁명이 나면서 1주일도 상영을 하지 못하고 내려졌다. 지방 장사도 못했다.”

명동의 예술가들 

▲ 1960년대 초반 반도호텔 사장실에서 포즈를 취한 이병철 삼성 창업주.

한국전쟁 직후 명동 예술극장 옆 골목의 선술집 ‘동방문화싸롱’은 가난한 문화계 인사들의 아지트였다. 모두가 하루에 한 번쯤은, 적어도 며칠에 한 번쯤은 이곳에 들렀기에 원고 섭외와 회식이 모두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동방문화싸롱의 사장이 <동방뉴스>라는 주간지를 만들었다. 거기 사진기자와 친해서 자주 놀러갔다. 가면 소설가 이봉구·김광주, 시인 박인환·조병화, 수필가 조경희 등이 늘 있었다. 다 주당이었다. 거기서 모여서 원고도 교환하고 작업을 논의했다. 그때 커피 한 잔에 50원, 막걸리가 유리컵 한 잔에 50원. 대부분은 커피 대신 막걸리를 마셨다. 그것이 명동의 1950년대 풍경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이 명동 주당들을 1960년대 오비맥주 신문 광고에 단체로 등장시키기도 했다.”

안익태 

▲ 포스코 공장 완공을 앞두고 있던 1974년의 박태준.

“1955년 5월5일 어린이날에 창경원(현 창경궁)에서 코리안판타지라는 연주회가 열렸다. 사람들이 무척 많이 왔다. 그날 보도사진을 찍기 위해 안익태를 따라다녔는데 창경원에서 받은 꽃다발을 계속 갖고 다니더라. 창경원 행사 끝나고 시공관(현 세종문화회관) 행사에 갔는데 가져간 꽃다발을 행사 관계자에게 주면서 꽃다발 수여식을 하라고 하더라. 애국가를 작곡한 분이 그러는 것을 보니까 기분이 좀 이상했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

김한용씨는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사진도 찍었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제일모직과 제일제당의 회사 팸플릿에 들어가는 사진이었다고 한다. 촬영 장소는 반도호텔 사장 집무실. 반도호텔은 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이다. 그때 삼성물산은 사장 사무실을 반도호텔에 두고 있었고 반도호텔 건너편에 삼성빌딩을 짓고 이사한 때가 1966년 2월이다. 1960년대 초반에 촬영한 것이다.

“이병철 사장의 반도호텔 집무실로 조명 기기를 싣고 혼자 갔다. 오른쪽이 이사장실이었고 복판에 비서실이 있고, 왼쪽에 제일모직 사장실이 있었다. 비서가 빨리 찍고 책상에 있는 것은 절대로 건드리면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하더라. 그렇게 해서는 사진이 안 나오는데. 그래서 이사장이 오고 난 뒤에 사장의 양해를 구해서 배경을 마음에 들 때까지 다 바꿔놓았다. 비서가 사장한테 너무 아부하는 기분이 들어서 더 천천히, 후회 없이 사진을 많이 찍었다. 컬러도 찍고 흑백도 찍고. 비서들이 까다롭게 굴었지만 이사장은 친절했다. 표정도 풍부하고.” 

신상옥과 최은희

“신상옥 감독은 키도 크고 멋졌다. 행동파이다. 영화에 미친 사람으로 굉장히 열의가 있는 사람이다. 제작비를 아끼거나 그런 것 없이 과감히 투자하고 시시한 영화는 안 만들었다. 신감독의 부인인 최은희씨는 달력 모델뿐만 아니라 광고 모델로도 많이 찍었다. 최씨는 대표적인 한국 여자이다. 어디를 가든 뜨개질을 하고 조용했다. 덕수궁에 배우 이민자와 최은희를 데리고 가서 사진을 찍는데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자 이민자는 ‘내 사진 못 찍게 하라’고 생난리를 쳤다. 반면 최은희는 그 사람들에게 포즈를 취해주기도 했다. 신감독의 두 번째 부인인 배우 오수미 사진도 많이 찍었다.”

박태준

김한용은 일제 치하에서 어린 시절 만주로 유랑을 떠났고 20대 초반에 징병되어 소련-만주 국경지대에 배치된 경험을 갖고 있다.

“내가 1970년에 일본 오사카 엑스포에 다녀왔다. 오사카 공항 주변에 어마어마한 공장이 많았다. 그걸 보면서 ‘야, 일본 참 대단한 나라구나’라는 감탄도 나왔지만 일본에서 물건을 하나도 안 사고 귀국했다. 일본이 잘사는 것이 미웠다.

그러다 1973년인가, 포항에 가서 보름간 포스코 공장 전경을 찍었다. 그때 포스코는 일부 가동하고 계속 공사 중이었다. 공장 현관 입구에 ‘우리 손으로 만든 철’이라고 바위에 써놓은 글을 보니 마음이 아주 좋았다. 굉장히 좋았다. 그래서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1974년인가 박태준 포스코 사장을 스튜디오에 불러 사진을 찍었다. 박사장이 스튜디오에 들어오면서 ‘내가 이마가 좀 못생겼으니 이마를 좀 잘 해달라’라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평소 하던 대로 큰소리로 ‘선생님’ 하고 소리를 크게 질렀다. ‘선생님은 이마가 잘생겨서 오늘이 있습니다. 그 이마가 없으면 오늘이 없어요’ 하고 소리를 쳤더니 비서가 놀라더라. 박사장도 ‘그렇습니까?’ 하고 되묻더라. 지금 생각하면 너무 크게 소리를 치지 않았나 싶다. 내가 왜정 때 군대 생활을 해서 말하는 것도 딱딱하고, 처음 듣는 사람은 이상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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