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 지칠 때까지 물고 늘어진다?
  • 조득진 기자 (chodj21@sisapress.com)
  • 승인 2011.05.29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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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생명, 사망한 피보험자 유족에게 보험금 지급 미루다 ‘망신살’…최근 7억 걸린 소송에서 패소

▲ 최근 보험금 지급 미루기 행태를 보여 물의를 빚은 교보생명 본사. ⓒ시사저널 윤성호

“피고 교보생명보험은 원고 박 모씨가 청구한 보험금 7억5천2백95만2천원을 지급하라. 이 원금에 대해 2010년 8월27일부터 2011년 5월12일까지 연 5% 이율, 그 다음 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 연 20%의 이율을 적용한다.”

지난 5월19일 오전 서울중앙지방법원 동관 457호 법정에서 열린 재판에서 민사10부는 교보생명보험을 상대로 보험금을 청구한 박 아무개씨에게 승소 판정을 내렸다. 이날 패소를 예상했는지 교보생명보험측에서는 변호인은 물론이고 회사 관계자도 법정에 나타나지 않았다.

승소 소식을 들은 원고 박 아무개씨의 첫마디는 “징허다”였다. 박씨는 <시사저널>과의 전화 통화에서 “무엇보다 재판이 끝난 것이 후련하다. 돌아가신 분을 놓고 내가 무엇 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에 그동안 포기하고 싶었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재판에서 억울하게 지고 나면 더 참담할 것 같았다. 보험회사는 매일 아침 6시면 꼬박꼬박 출근하는 사람을 알코올 중독자로 몰아갔다. 남편만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라고 울먹이며 말했다. 

보험금을 두고 진행된 박씨와 교보생명의 지루한 싸움은 2009년 12월 남편 김 아무개씨가 사망한 이후 유품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보험증권을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 전남 영광군의 한 환경업체에 다니던 남편 김씨는 2008년 9월27일(토) 퇴근 후 동료와 술을 마신 뒤 귀가하다가 집 현관에서 넘어져 머리를 다쳤다. 인근 병원 응급실로 갔으며 이후 천두술에 의한 경막하 수종(뇌에 물이 차는 현상) 제거술을 받았다. 김씨는 이 사고의 후유증으로 부축을 받아야만 겨우 보행이 가능하고, 대·소변 장애는 물론 혼자서는 음식을 섭취하기도 힘든 지경이 되었다. 이후 2009년 12월 지주막하 출혈(뇌출혈과 비슷한 증상)로 사망했다. 

사망한 김씨는 1998년 10월, 보험 기간 및 납입 기간이 각 10년인 상해보험에 가입했다. 그가 가입한 ‘한농연 회원 단체보장보험’ 약관을 보면 토요일 또는 공휴일인 경우 재해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1~2급의 장애를 입게 되면 매월 7백50만원씩을 10년간 지급하고, 재해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사망하면 일시금으로 7천5백만원을 수령하도록 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장해보험금 9억원과 사망보험금 7천5백만원 등 모두 9억7천5백만원을 받아야 하지만, 유족측은 중간이자를 공제하는 호프만 방식 계산법에 따라 7억5천2백95만2천원을 청구했다.

논란은 ‘재해’ 여부였다. 고인은 사고 11개월 후인 2009년 9월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장기요양등급 1등급을 받았다. 10월에는 전라남도 영광군수가 발행한 뇌병변, 지체장애 1등급 진단을 받았다. 유족측은 사망 원인 또한 재해로 인한 후유증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교보생명에서는 “재해로 인한 사망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보험금 지급을 거부했다. 보험회사가 보험금 지급 여부를 판단하는 의료기관의 장해진단서가 사망 이후 발부되어 효력이 없으며, 평소 술을 즐겨 마시던 고인의 생활 습관이 불러온 질병이 원인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장애 정도 또한 한시적으로 일어난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1년 반 동안 지루한 공방이 계속되었다. 교보생명은 “장해 자체가 아니다”라는 주장과 함께 ‘재해일로부터 1백80일 이내에 그 재해로 인하여 사망한 경우에는 재해 사망 보험금을 지급한다’라는 약관 내용을 들어 사망 시점이 이 기간을 넘었기 때문에 보험금을 지급할 의무가 없다고 버텼다. 결국 박씨는 지난해 7월 소송을 제기했다. 이후 한 차례 선고 공판을 연기하는 등 양측은 첨예하게 대립했다. 소송 과정에서 교보생명은 고인이 수술을 받았던 광주 시내 한 대형 병원의 진료 자료를 삼성서울병원에 보내 감정 촉탁을 진행했지만 별다른 반박 자료를 확보하지 못했다.

박씨는 “보험사 직원이 와서 7천5백만원에 합의를 보자고 제안했지만 대꾸도 하지 않았다. 소송을 하자 다양한 방법의 압박이 여러 곳에서 진행되었다. 이런 일들이 그냥 일어났겠는가”라고 주장했다. 박씨는 “보험금을 청구하려고 사망 신고를 하기 전에 남편의 인감 증명을 뗐는데 그것과 관련해 경찰이 읍사무소에까지 와서 조사를 벌여 읍사무소 직원들이 고통을 겪었다”라고 말했다. 

2009년에는 지급 미루다 ‘압류’ 집행되기도

선고 공판을 불과 사흘 앞두고는 고인이 입원 치료했던 병원에 대해 압수수색이 진행되었다. 지난 5월16일 전남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소속 형사가 고인의 진료 기록 일체를 압수해 간 것이다. 병원 관계자는 “수색영장을 언뜻 보기는 했으나 사본은 받지 못했고, 수색 이유 또한 고지받지 못했다”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담당 형사는 “수사가 진행 중인 사건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을 말하기는 힘들다”라는 반응이다. 고인이 치료를 받았던 병원에 고인의 사촌 처제가 근무하고 있어 ‘보험 사기’로 의심하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박씨의 변호인은 “보험회사가 선고 전에 합의를 보려고 원고를 압박했던 정황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라고 주장했다.

이번 법원 판결에 따르면 교보생명은 원고가 청구한 7억5천2백95만2천원 외에도 이자 2천9백60만원을 지급해야 한다. 이번 사례처럼 교보생명이 소송을 통해 보험금 지급을 미루다 결국 거액의 보험금 지급 판정을 받은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지난 2009년 12월에는 포항지방법원의 선고에도 보험금 지급을 미루다 서울 종로 교보생명 본사의 노트북 4백대와 데스크탑 컴퓨터 1천100대(모니터와 본체)에 대해 압류가 집행되기도 했다. 당시에도 교보생명은 장애 등급 1급인 보험금 청구자에 대해 “장해로 인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보험회사 본사에 대해 압류가 집행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당시 교보생명 법무지원팀에서는 “법인의 경우 1차 판결에 따라 보험금을 지급하고 향후 항소심에서 뒤집어졌을 경우 환수할 수 있지만 개인의 경우에는 돌려받기가 사실상 어렵다. 현재 항소를 진행 중이기 때문에 압류를 집행하는 것은 무리하다”라고 항변했다. 하지만 2010년 6월 항소심인 대구고등법원도 보험금 청구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2007년부터 3년 넘게 재판을 통해 보험금 지급을 질질 끌어오던 교보생명은 결국 원금 4억7천5백만원에 지연 이자를 더해 6억원이 넘는 보험금을 지급해야 했다.

한편 이번 박씨 소송 건에 대해 교보생명은 “항소 여부는 판결문이 나오면 결정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교보생명 관계자는 “이 소송 건의 경우 의료기관의 장애 등급 판정에 대한 의문이 존재하는 등 보험금 지급 판단의 근거가 부족해 지급을 하지 않고 있던 것이다. 보험 가입자의 심정이야 이해하지만 보험금 지급 여부 판단이 필요할 때 이에 대해 심사를 하는 것은 보험사의 역할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제대로 된 심사와 보장이야말로 다른 가입자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박은주 보험소비자연맹 상담실장은 “금감원이 생명보험사에 대해 소송 자제를 주문했지만 가입자를 상대로 한 보험사의 소송은 꾸준하다. 상대적으로 약자인 소비자로서는 심사와 소송을 거치면서 심적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박실장은 “특히 보험금이 고액일수록 보험사는 더욱 집요하게 주변을 파고 다닌다. 생활고, 오랜 소송, 주변 시선 등으로 소비자가 지치기를 바라는 것 같다”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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