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차처럼 깊고 은은한 ‘인재의 향기’
  • 이춘삼│편집위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1.05.29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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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획 시리즈 / 한국의 신 인맥 지도 | 전남 고흥·보성

▲ 보성의 녹차 밭. ⓒ뉴스뱅크 크이미지

서재필 선생이 태어났으며 녹차 밭이 유명한 전라남도 보성과 프로레슬러 김일, 화가 천경자의 고향인 고흥은 인접한 군(郡)이다. 두 군을 통틀어 법조계와 정계에 의외로 많은 인물이 진출했고, 예술계와 체육계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들이 있다.

박상천 의원(민주당·고흥 보성)은 5선의 중진이다. 고향인 고흥을 발판으로 평민당 간판을 걸고 13대 국회에 진출한 이래 17대 한 차례를 빼고 연속 당선되었다. 그 과정에서 당 대변인, 국회 보건복지위원장-운영위원장, 원내총무, 당 대표를 두루 섭렵하고 법무부장관도 지냈다. 매사에 진지하고 성실하면서 날카로운 논리를 갖췄다는 평을 듣는다. ‘정치력’보다 ‘원칙’을 중시한다는 평도 결국 같은 맥락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가 대중에게 처음으로 그리고 크게 부각되었던 때는 당 대변인 시절이었다. 그가 평민당 대변인을 맡았을 때 카운터파트는 박희태 민정당 대변인(현 국회의장)이었다.

현직 국회의원 7명 배출

1980년대 이후 한국 정치사에서 명대변인으로 꼽힌 사람으로 봉두완·박희태·박상천·홍사덕·박지원·정동영 씨를 들 수 있다. 그중에서도 1990년대 초 박상천 대변인이 박희태 대변인과 벌인 맞대결은 볼만했다. 촌철살인의 비유 화법과 유머를 구사하는 박희태 대변인, 여기에 맞서 논리 정연한 이론 전개로 상대의 허점을 파고든 박상천 대변인. 정당 대변인 자리가 그때만큼 각광을 받은 적이 없었고, 두 사람이 TV 토론에 나서면 시청률이 올라갔다. “국회의원만 안 나오면 <국회방송>이 재미있다”라는 세간의 조소가 무색하리만큼 두 사람의 갑론을박에는 품격과 여유가 있었다.

이후 신한국당과 국민회의의 원내총무로서도 맞수의 지혜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두 사람은 1938년생 동갑, 서울대 법대 1957년 입학 동기, 13회 고등고시 사법과 동시 합격, 법무부장관을 지낸 검사 출신, 나란히 13대 국회 첫 진출이라는 흔치 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박상천 의원은 민주당 상임고문으로서 요즘도 ‘법안 제조기’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입법 활동에 열성적이다.

보성이 고향인 박주선 의원(민주당·광주 동구)은 박상천 의원에게는 광주고-서울대 법대-검찰의 직계 후배이다. 제16회 사법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한 그는 검사의 길로 들어선 후에도 평검사 시절을 요지인 서울지검에서 주로 보냈다. 고등검찰관으로 승진한 후에는 광주지검 해남지청장을 거쳐 대검 중수부와 서울지검 특수부에서 근무한 특수 수사통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밑에서 청와대 법무비서관을 지냈다.

그는 16대 총선에서 보성·화순 후보로 출마해 초선 의원의 길로 들어섰다. 새천년민주당 법률구조단장, 제1정책조정위원장, 기획조정위원장, 사무총장 직무대행을 지냈다. 이런 와중에 그는 세 차례의 옥사(獄事)를 치렀다. 1999년 옷로비 의혹 사건, 2000년 나라종금 사건, 2004년 현대건설 비자금 사건에 휩쓸려 ‘세 번 구속, 세 번 무죄’라는 사법 사상 초유의 기록을 세웠다. 사법시험 수석 합격, 특수부 검사, 청와대 법무비서관을 거친 엘리트 법조인 출신에게 6년간의 고초는 필설로 설명하기 힘든 것이었다.

옥중 출마를 했던 17대 총선에서 선거구가 급작스럽게 고흥·보성으로 변경되었다. 박상천 후보와는 후보 단일화를 비롯한 합리적인 방법을 모색할 수 있는 관계였지만, 그가 영어(囹圄)의 몸이었던 탓에 각자 후보 등록이 되었고 그 결과 열린우리당의 신중식 후보가 승리의 영광을 안았다.

제4회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했던 박주선 의원은 18대 총선에서 광주 동구로 지역구를 옮겨 88.7%의 압도적인 득표로 재기에 성공한 끝에 2008년 7월부터 민주당 최고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강기정 의원(민주당·광주 북구 갑)은 학생운동이 최고조에 이르던 1980년대 중반 전남대 삼민투위원장으로 활동하다 3년7개월의 옥고를 치른 뒤 10여 년의 재야 민주화운동을 거쳐 정치에 입문한 광주 지역의 대표적 386세대였다. 김민석·허인회·원희룡·신희룡 씨 등과 모임을 함께했다. 16대 총선과 2002년 보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잇달아 고배를 마신 데 이어 세 번째(17대) 도전에서 마침내 승리를 거머쥐었다. 더구나 자타가 공인하는 ‘거물’인 현역의 김상현 의원을 이긴 것이다. 18대 국회에서는 정세균 민주당 대표 시절 비서실장을 지냈고, 현재 국토해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선동 의원(민주노동당·순천)은 서갑원 의원의 의원직 상실로 인해 치러진 지난 4·27 재·보궐 선거에서 당선된 초선 의원이다. 민주당의 안방이라고 할 수 있는 호남에서 민노당이 처음으로 국회의원을 낸 것은 야권 후보 단일화 덕분이었다. 김후보와 경쟁했던 무소속 후보들은 사실상 민주당 소속이라고 할 수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냈거나 장관·국회의원을 지낸 인사들이 ‘민주당의 순천 무공천’에 반발해 모두 무소속으로 나섰던 것이다. 고흥 출신인 김의원은 순천고를 졸업하고 고려대 물리학과 3학년 재학 때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을 벌이다 제적되었다. 민노당 사무총장을 지냈다.

주승용 의원(민주당·여수 을)은 출생지는 고흥이지만 본적은 여수이다. 광주일고와 성균관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개인 사업을 하다가 전남도의회에 발을 디뎠다. 여천군수와 여수시장을 지낸 후 17대 의원으로 처음 금배지를 달았다. 18대 국회 들어 민주당 정책위원회 수석부의장을 맡고 있다.

이종구 의원(한나라당·서울 강남 갑)을 언급하기에 앞서 그의 부친인 고 이중재 의원을 먼저 소개할 필요가 있다. 이중재 전 의원은 평생을 야당에서 보내며 1970~80년대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정치인이다. 보성에서 출생해 보성고를 졸업하고 고려대 경제학과 재학 당시 좌파 운동을 주도했던 이론가로 ‘우파의 이철승, 좌파의 이중재’로 불리기도 했다. 일찌감치 6대 국회에 민중당 의원으로 첫 당선된 후 6선을 기록한 그는 정책 전문가가 드물던 과거 우리 정치권에서 재경통(財經通)으로 인정받았다.

‘바른말 하는 정치인’ ‘냉철한 판단력의 소유자’ ‘논리적인 설득의 달인’으로 통했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정치 활동이 금지되기도 했으며 1988년 야당통합추진위원장으로 김영삼·김대중 두 진영의 단일화를 추진하다 무산되자 약속대로 정치를 그만두었다. 1996년 민주당 의원으로 정계에 복귀했고 신한국당과 합당하면서 한나라당에서 마지막 정치 생활을 했다.

이용훈 대법원장 등 법조계 인물도 즐비

이중재 의원의 장남인 이종구 의원은 공직 생활 28년을 경제부처에서 근무한 ‘금융정책통’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 정치인으로 변신한 데 대해 “노대통령의 경제 정책과 잘 안 맞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17대에 이어 2선 의원이다.

정양석 의원(한나라당·서울 강북 갑)은 보성 출신으로 광주에서 살레시오중·고와 전남대 문리대를 졸업했다. 이후 민정당 중앙사무처에 공채 당원으로 들어간 드문 경우에 속한다. 한나라당 의원국장, 기획조정국장을 지내면서 총선, 지방선거(서울시장), 대선 등 여러 과정에서 뒷바라지에 몸을 아끼지 않은 공으로 서울 강북구 갑에서 공천을 받아 18대 의원 배지를 달았다. 당 대표 비서실장을 맡고 있다.

송영길 인천시장(민주당)은 지난해 5월 제5회 지방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에서 광역자치단체장으로 화려한 변신에 성공했다. 연세대 경영학과 재학 시절 학보인 연세춘추 기자와 총학생회장을 지냈다. 인천에서 공장 노동자 생활을 경험하느라 졸업이 늦었고 졸업 후에는 노조 활동에도 관여했다. 31세의 비교적 늦은 나이에 사법시험에 합격해 변호사를 개업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에 가입하고 개인택시 사업조합, 근로자 모임, 복지회관, 월남참전전우회 등 형편이 넉넉지 못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힘썼다. 그러다 마침내 2000년 5월 인천 계양구에서 16대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새천년민주당). 17·18대를 합쳐 3선 의원을 하며 의원 임기 중 시장 선거에 나서기까지 열린우리당 사무총장, 통합민주당 최고위원, 민주당 최고위원 등의 중책을 경험했다.

법조계에서는 보성 출신의 이용훈 대법원장이 대표적이고 김현웅 춘천지검장(고흥), 이종오 서울고법 부장판사(보성), 이진만 대구고법 부장판사(보성), 김용승 대전지검 부장검사(고흥), 송기석 광주지법 순천지원 부장판사(고흥), 송삼현 서울중앙지검 부장검사(고흥), 송혜영 광주지법 장흥지원장(고흥), 김동아 대전지법 부장판사(보성), 김용철 대전지법 서산지원장(보성), 박형관 의정부지검 부장검사(보성)가 있다.

관계에는 임종룡 기획재정부 제1차관, 심오택 국무총리실 정책분석평가실장, 조정찬 법제처 법령정보정책관, 한진현 지식경제부 무역정책관, 선원표 국토해양부 해사안전정책관, 김양택 법무부 교정정책관, 박종효 특허청 전기전자심사국장이 있다.

보성 출신 기업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은 이의순 세방그룹 회장이다. 일본 오사카 낭화상고와 오사카 외국어대를 졸업한 그는 주서독 대사관에 근무하다 한국해운과 세방기업을 창업한 후 세방전지, 세방석유, 세방해운, 오주해운, 세방하이테크를 차례로 세워 세방그룹으로 키웠다. 그는 2007년 사재 90억원을 출연해 사회복지법인 ‘가천재단’을 설립했다.

고흥 출신의 신선호 센트럴시티 회장은 한때 율산그룹 회장으로서 젊은 기업인의 선두에 섰던 인물로 갖은 풍파를 겪은 끝에 오늘날에 이르고 있으며, 신명호 전 아시아개발은행(ADB) 부총재가 친형이다.

고려대 미디어문예창작과 석좌교수인 문정희 시인과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러야 했던 송기원 소설가의 고향이 보성이다.

시원한 박치기 한 방으로 관중들의 가슴속을 후련하게 해주곤 했던 프로레슬링의 고 김일 선수, 화려하면서도 어딘가 우수가 깃든 작품이 그의 생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은 천경자 화가가 고흥에서 태어났다. 천경자 여사는 80세를 넘긴 노년에 미국 맨해튼의 한 곳에서 병마와 싸우며 힘든 날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걸죽한 목청으로 심청가와 춘향가, 수궁가를 불러 우리에게 친숙했던 판소리 명창 조상현 선생은 한국판소리보존연구회를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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