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금 빚’을 생각한다
  • 소종섭 편집장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11.06.15 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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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1986년부터 대학에 다녔습니다. 고등학교는 충청도의 한 시골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한 시간 걸려서 통학하던 길은 고교 2학년 때가 되어서야 포장이 되었습니다.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차창 밖이 깨끗하게 보이는데, 신기하더군요. 3학년 때 대학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 ‘도시’ 대전에 처음 가보았습니다. 단 하루였지만 눈이 휙휙 돌아가던 느낌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대학에 떨어져 재수를 하기 위해 1985년 처음 서울에 왔습니다. 저는 의도적으로 ‘도시’를 외면했습니다. 마음을 굳게 먹었습니다. 재수 1년간 제가 한 일이라고는 친척집과 학원을 오간 것이 전부였습니다. 친구를 만나지도, 시골 부모님을 찾지도 않았습니다. 공부하는 것이 하루 일과의 전부였습니다. ‘능력이 부족하니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라는 것이 당시 스스로에게 한 다짐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일단 당시 80만원 정도였던 입학금을 마련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은 가진 돈이 없었고 두 살, 네 살 위인 형들도 공부하거나 풀칠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결국 서울에 살던 친척이 나서서 고교 선배들 몇몇에게 호소해 간신히 입학금을 마련해 아슬아슬하게 입학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학교에 들어간 뒤에도 ‘돈’과의 전쟁은 계속되었습니다. 당시에도 정부로부터 학자금을 융자받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제가 기댈 수 있었던 유일한 버팀목이었습니다. 3학기 정도 융자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졸업 이후 갚아야 할 빚이고 마냥 융자를 받을 수도 없어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호텔 회갑연 등에서 서빙하기, 학교 주차 안내원, 과외, 아파트에 홍보 전단지 뿌리기, 건설 공사 현장에서 벽돌 나르기…. 아르바이트, 융자, 선배들의 도움으로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졸업 이후 남은 것은 빚이었습니다. 저는 부모님의 도움 없이 제 힘으로 결혼을 준비했고, 광부가 된 부모님은 몇 년간 등록금 빚을 제 대신 갚았습니다.

등록금 때문에 거리에 나선 대학생들을 보노라면 그 시절이 생각나 마음이 짠합니다. 그때는 집안 형편이 어려우니 이렇게라도 해서 학교를 다녀야지 하는 생각이었는데 요즘은 양극화가 심해져 상대적 박탈감이 훨씬 큰 것 같습니다. 게다가 취업도 그때만큼 안 되는 상황에서 등록금은 날로 오르니 분기가 탱천할 만도 합니다. 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등록금 때문에 자살하는 학생까지 생겼다는 것은 실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공부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공부를 하지 못한다면 그 사회가 제대로 된 사회는 아닙니다.

정치권에서 주장하는 ‘반값 등록금’은 레토릭은 좋으나 실현 가능한지는 의문입니다. 이목을 잡아끄는 효과는 있을지 모르지만  ‘반값 등록금’ 현실화에는 넘어야 할 고개가 한둘이 아닙니다. 괜히 기대감을 높여놓지 말고 ‘등록금 인하’라고 하는 것이 좀 더 현실적이고 정직한 것 같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장학금·기부금 등을 활성화해야 합니다. 대학들도 이제는 등록금만 바라보지 말고 좀 더 다양한 수익원을 창출하는 데 나서야 합니다. 무엇보다 ‘대학을 나와야 사람 취급을 받는’ 문화를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등록금은 좀 내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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