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 가면 한국 현실이 겁나게 보인다
  • 라제기│한국일보 문화부 기자 ()
  • 승인 2011.06.28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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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성 드러내는 장르 영화에도 비판 의식 가득한 메시지 담겨…<화이트>에서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그늘이 더 공포

▲ ⓒNEW 제공

정치 영화가 없다. 사회 부조리를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영화도 없다. 그런데도 극장에 가면 한국의 어두운 현실이 보인다. 장르영화를 표방하며 상업성을 드러내지만 영화가 품은 메시지가 만만치 않다. 최근 극장가에 나온 한국 영화들에서 눈에 띄는 공통점이다.

<화이트: 저주의 멜로디>(이하 <화이트>)는 정통 공포영화임을 내세운다. 아이돌 그룹의 멤버가 의문의 사고를 연달아 당하는 과정을 묘사하며 스크린에 음산한 냉기를 전한다.

<화이트>는 희고 긴 머리를 가진 유령이 등장하고 음향 효과로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하는 전형적인 공포 기법 안에 사회 비판의 칼을 숨기고 있다. 아이돌 그룹 티아라의 멤버 함은정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영화는 아이돌을 통해 비뚤어진 아이돌 문화를 비판한다. 멤버들 사이의 치열한 경쟁 의식과 그들을 향한 팬들의 광적인 성원을 공포의 근원으로 설정하면서 스폰서의 지원과 성 상납이라는 엔터테인먼트 산업 내부의 음습한 메커니즘을 고발한다.

“가수 한 철 장사니까” “아이돌은 파업 못 해” “다 그런 거야.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라는 대사는 변하지 않은 연예계의 나쁜 관행에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공포영화의 전통적인 화법을 따르며 관객에게 서늘한 기운을 안기면서도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을 놓지 않고 있다. 이 영화의 후반부에 나오는 대사는 그 어떤 장면보다도 오래도록 머릿속을 맴돌며 섬뜩한 느낌을 준다. “모든 것이 반복되고 있어.” 영화 속 원혼이 죽은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은 부정한 사회 현실, 이보다 더 공포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모비딕>은 권력에 대해, <풍산개>는 남북 관계에 대해 비판

국내 영화로서는 드물게 음모 이론을 끌어안으며 서스펜스를 연출해내는 영화 <모비딕>도 2011년 한국 사회의 모습을 에둘러 비판한다. <모비딕>은 1990년대 중반을 배경으로 자신들의 영속적인 권력을 위해 정부를 조종하는 정체 불명의 조직과 그들의 행적을 파헤치는 열혈 기자의 대결을 그린다. 국내에서는 보기 드물게 독특한 소재로 전형적인 스릴러 형식의 이야기로 풀어간다.

1990년대 초반에 일어난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폭로 사건을 모티프로 삼았다지만 외피로만 보면 지금 이곳의 모습과는 동떨어진 영화이다. 하지만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이 영화 속 이너 서클의 행태는 절묘하게 최근의 우리 현실과 겹친다. 자기들의 영리를 위해 다리 폭파를 감행하고, 항공기 폭파까지 계획하는 이들의 모습은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나 저축은행 사태를 연상케 한다. 학맥과 인맥 등 갖은 ‘연’으로 얽히고설킨 사회 고위 인사가 법이 정한 절차를 무시하고 서로의 사익을 도모하는 모습은 영화 속 이너 서클의 행태와 다를 바 없다. 끝내 이너 서클의 정체를 밝히지 못하는 <모비딕>의 결말은 암시하는 바가 크다. 여전히 우리는 공식적인 정부가 아닌 어둠 속 비공식적 정부의 지배를 받는 사회에 살고 있다고.

김기덕 감독이 각본을 쓰고 제작한 <풍산개>는 출구를 찾지 못하는 남북 관계의 현실을 비판한다. 남북을 몰래 오가며 이산가족을 이어주는 정체불명의 사나이를 스크린 중심에 놓고 첨예한 대결 구도로만 일관하는 남북의 강경파를 조롱한다. 사나이가 장대를 이용해 철책을 넘나든다는 설정, 웃음기 가득한 대사 등이 상식에 반하면서도 기이한 울림을 준다. 코미디의 형식을 빌려 현실에 독설을 날리는 일종의 우화 같은 영화이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은 모두 사나이에게 남과 북 어느 편인지를 강압적으로 묻는다. 이념과 진영을 초월한 듯한 남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매번 의심을 받고 위기에 처한다. 감독은 폭력과 낡은 이데올로기에만 의지하는 등장인물을 밀폐된 공간에 가두어두고 전쟁의 참혹함을 간접적으로 체험케 한다. 갈수록 전운이 감도는 한반도의 불우한 현실에 대한 매서운 훈계라고 할까. 영화가 은유하는 것처럼 우리는 냉전 시대로 회귀한 사회에 살고 있을지 모른다.


다수의 욕망 앞에서 종종 개인의 의견은 무시된다. ‘대의(大義)’에 어긋나는 개인의 욕망은 악으로 규정되기도 한다. 불특정 다수의 ‘알 권리’를 위해 개인의 신상 정보가 아무렇지 않게 공개되거나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차별의 대상이 되는 일도 벌어진다. ‘인권’이 여전히 전 사회적·전 지구적 이슈인 것은 역설적으로 인권이 무시당하는 순간이 그만큼 자주 벌어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법률적으로 인권을 고려한 역사 또한 그리 길지 않다.

미국 역사에서 죄형법정주의와 함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개인의 권리에 대한 성찰을 낳은 것은 16대 대통령 링컨이 암살된 이후였다. 영화 <음모자>가 다루는 것은 바로 그 순간이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시작될 줄 알았던 순간, 한 발의 총성과 함께 링컨이 살해당한다. 일사불란한 범인 색출이 시작되고, 암살에 공모한 여덟 명이 체포된다. 그중 한 명은 두 자녀를 둔 평범한 어머니 메리 서랏(로빈 라이트)이다. 미국 최초의 여성 사형수가 될지도 모를 메리의 재판은 초미의 관심사가 되지만, 사실 정부가 원한 것은 사태의 빠른 마무리를 위한 ‘처벌’이었다. 유죄임이 상정된 군사 재판이 열리고, ‘전쟁 영웅’ 프레데릭 에이컨(제임스 맥어보이)이 메리의 변호사로 소환된다. 

영화는 프레데릭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북군의 전쟁 영웅은 메리의 유죄 여부를 의심하지 않는다. 영웅 링컨의 사망으로 혼란한 사회가 걱정될 뿐이다. 그러나 메리를 향해 쏟아지는 부당함을 목도하자 그는 울컥 분노한다. 설사 그녀가 유죄일지언정 이런 불합리는 용납될 수 있는가?

링컨 암살이라는 흥분으로 시작한 영화는 시종 차분하게 부당한 재판의 과정을 따라간다. 역사의 순간을 훑어내는 영화의 시선은 차분하고, 당대의 재판 기록부를 샅샅이 조사해 구현했다는 영화의 디테일은 꼼꼼하다. 좋은 배우들의 진지한 연기를 만난 드라마는 탄탄하고, 감독 로버트 레드포드의 연출은 늘 그렇듯이 점잖고 묵직하다. 감정을 절제하고 덤덤하게 사건을 따라가는 그의 방식은 꽤 긴 여운을 남긴다.

‘공모자’도 아니고 ‘음모 가담자’도 아니고 ‘음모자’가 되어야 했던 한글 제목의 어정쩡함이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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