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총리의 야망 장기 집권 길 뚫렸다
  • 조홍래│편집위원 ()
  • 승인 2011.06.28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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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드베데프, 내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 포기 시사 / 푸틴과의 불화설 일축하고 오히려 ‘푸틴 지지’ 입장 밝혀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은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와의 불화설을 일축하고 내년 3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그는 6월20일 발행된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회견에서 자신과 푸틴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다는 항간의 추측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불과 3일 전 선거운동으로 간주되는 연설에서 1인 통치는 러시아를 침체로 몰아갈 것이라고 말해 푸틴과의 대결을 암시했었다. 그러나 그의 입장은 푸틴 지지로 표변했다.

그와 푸틴의 권력 투쟁을 예상했던 많은 사람은 충격을 받았다. FT와의 회견으로 밝혀진 그의 발언으로 푸틴은 대통령 당선이 확실해졌고 그의 장기 집권도 사실상 기정사실화되었다. 메드베데프가 갑자기 태도를 바꾼 배경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는 심중의 일단을 우회적으로 드러냈다. “나와 푸틴은 다른 인간이고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에서 다른 이상을 가졌으나 우리 두 사람은 같은 편이다”라는 설명이다.  

그는 말투도 온순해졌다. 푸틴 내각을 신랄하게 비판하던 종전의 어조는 사라졌다. 러시아가 다양성을 필요로 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치적 변화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또, 현직 대통령이 재선 출마를 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의무이기도 하지만 출마를 결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말했다.

푸틴은 2008년 3선 연임을 금지한 헌법 규정에 따라 메드베데프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고 총리가 되었다. 이 당시 두 사람 사이에는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경합하지 않는다는 묵계가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 후 메드베데프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대통령 출마 의사를 드러내 두 사람의 약속이 파기되었다는 추측을 낳았다. 하지만 이 추측은 기우로 막을 내렸다. 그는 “나와 푸틴은 같은 정치 세력을 대표하는 정치인이며 따라서 우리 둘의 경쟁은 러시아를 위해 좋은 시나리오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메드베데프가 입장을 바꾼 것은 사실상 푸틴이 지배하는 러시아의 정치 현실을 수용했다는 얘기이다.

미국과의 관계 위해서 오바마의 재선도 기대 

▲ 지난 6월22일 러시아 모스크바의 알렉산더 가든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메드베데프 대통령(왼쪽)과 푸틴 총리. ⓒTAR-TASS

메드베데프는 이 회견에서 느닷없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재선을 바란다고 말해 묘한 여운을 풍겼다. 그는 매우 애매한 어조로 2012년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가 당선되면 러시아와 미국 관계가 긴장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자신의 정치적 거취를 밝히는 자리에서 왜 오바마를 거론했는가를 놓고 억측이 분분하다. 그는 오바마의 재선을 바라는 이유로 핵무기 감축 협상과 러시아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문제를 들었다. 공화당 후보가 선출되면 이런 문제들이 어려워진다는 논리이다.

오바마는 취임하면서 러시아와의 관계를 재설정(reset)하겠다고 다짐했으며, 그의 다짐대로 양국 관계는 냉전 시대의 긴장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많이 호전되었다. 말하자면 메드베데프와 오바마는 일맥상통한 셈이다. 그러나 푸틴이 대통령에 복귀하고 공화당의 보수적 성향의 인물이 미국 대통령이 될 경우 양국 관계가 긴장 국면으로 바뀔 것은 확실하다. 분석가들은 바로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메드베데프가 오바마 얘기를 꺼낸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최근 미국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오바마가 공화당 후보에게 밀리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메드베데프의 소망이 실현될 공산은 반반이다.

오바마의 재선 가능성에는 수많은 변수가 있으나 푸틴의 대통령 당선은 거의 확정적이다. 그래서인지 세계의 이목은 벌써부터 푸틴 시대에 맞춰지고 있다. 푸틴은 옛 소련 비밀경찰(KGB)에서 잔뼈가 굵은 정보 및 첩보 전문가이다. 그는 1999년 병마와 알코올 중독으로 중도에 사임한 보리스 옐친 대통령에 의해 총리에 임명된 후 2000년에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8년간의 대통령 재임 기간 중 모든 권력을 한손에 장악했다. 2008년 세 번째 연임을 금지한 헌법에 따라 대통령에서 물러나면서 메드베데프에게 대통령직을 넘겼으나 실질적으로는 대통령 권한을 행사했다는 것이 중평이다. 그는 총리직에 있으면서도 헌법을 고쳐 대통령 임기를 6년으로 연장했다.

따라서 그가 내년 선거에서 당선되면 대통령 8년, 총리 4년에 이어 다시 6년의 대통령 임기를 수행한다. 그가 다시 당선된다면 26년간 러시아를 통치하게 된다. 스탈린의 철권 통치를 연상시키는 푸틴의 장기 집권은 서방의 시각에서는 악몽과 같다. 고르바초프와 메드베데프를 거치면서 그나마 민주화의 길로 들어섰던 러시아가 옛 크렘린 시대로 회귀할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하다.

러시아 국민들, 푸틴 시대의 개막에 긍적적   

▲ 체첸 경찰이 지난 4월25일 수도 그로즈니에서 반군에 가담한 것으로 추정되는 남성을 체포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푸틴 시대의 개막에 대한 러시아 국민들의 반응은 의외로 긍정적이다. 우선 소련 해체 후 거의 무정부 상태에 빠진 러시아를 구출한 영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대통령 재임 기간 8년 동안 GDP는 72% 성장하고 빈곤은 50% 감소했다. 국민 1인당 평균 임금은 80달러에서 6백40달러로 늘어났다. 러시아 경제 회복은 유가 상승의 덕을 본 면도 있으나 푸틴의 강력한 리더십이 뒷받침된 거시 경제 정책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다. 러시아의 재등장을 가져온 이면에는 법치를 회복시켜 국가 기강을 세운 면을 부인할 수 없다.

푸틴의 야망은 옛 소련의 영광을 부활하는 것이다. 그런 그가 향후 6년 내지 12년을 더 집권할 수 있는 길이 열린 만큼 그가 건설할 러시아의 모습에 대한 국민의 기대는 높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그에 대한 지지율은 50%를 넘었다.

그의 치세에 비판이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두 차례의 체첸 전쟁을 통해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했고 수많은 인권 유린을 저질렀다. 2002년 체첸 분리주의자들이 모스크바 극장 관객을 인질로 잡고 정치범 석방을 요구했을 때는 1백30명의 인질을 희생시키면서 납치범들을 사살했다. 러시아 최대의 석유회사 유코스(YUKOS) 사장 미하일 호도로프스키에게 탈세 혐의를 물어 8년 징역을 선고하고 그의 재산을 몰수했다. 외면적으로는 비리 척결이지만 푸틴 반대 세력에게 자금을 댄 것이 진짜 이유였다. 이 사건은 푸틴의 야망과 잔혹성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국내 반체제 인사들과 서방 인권단체들이 푸틴의 반인권 행각을 아무리 규탄해도 푸틴은 흔들리지 않는다. 러시아를 겨냥한 미사일방어망(MD) 구축 계획을 추진하면서 러시아의 인권 개선을 촉구한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을 ‘나치’라고 매도할 정도로 강심장을 가졌다는 것이 서방 분석가들의 평이다.

메드베데프의 정치적 타협과 푸틴의 1인 지배의 서막을 놓고 서방, 특히 미국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그의 반미 성향이다. 푸틴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 아프가니스탄 전쟁, MD 구축 등 미국 행정부의 행동에 늘 딴지를 걸었다. 테러와의 전쟁에는 겉으로는 협력하는 척했으나 시늉에 불과했다.

최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리비아 공습에도 부정적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미국이 하는 모든 것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이런 푸틴 앞에 미국 공화당 출신의 보수 성향 대통령이 나타난다면 양국 관계가 긴장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메드베데프가 오바마의 재선을 희망한 것은 아마도 이런 시나리오를 막아보려는 충정의 일단을 피력한 것으로 보인다. 푸틴의 스탈린식 리더십에 비하면 오바마는 나약한 인상을 준다. 대화(engagement)를 강조하는 오바마식 접근으로는 푸틴의 철권 스타일에 적수가 되지 않는다는 우려가 많다. 이 때문에 내년 선거에서 미국의 공화당 후보가 반사 이익을 얻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것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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