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적이면서 민족혼이 담긴 새로운 도자기 계속 내놓겠다”
  • 경기 이천·김세원│편집위원 ()
  • 승인 2011.07.05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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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유학 중 북한 공작원 되었다가 귀순하는 등 파란만장 인생사 빚은 조상권 광주요 도자문화원장

 

▲ “북한에 있을 때 공작원 훈련을 받았어요. 김일성 주석도 여러 번 만났고요. 한국에 돌아와보니 선친께서 설립한 광주요를 막내가 잘 키워놓았더군요. 파리 국립미술학교 시절 동양 건축을 전공한 지도교수가 한국 건축은 뛰어난 독창적인 조형미를 갖고 있다고 극찬했어요. 자신감을 얻었죠.” ⓒ시사저널 박은숙

 

한·불 3인 작가전 ‘하모니’가 열리고 있는 서울 종로구 통의동 갤러리 팔레 드 서울. 둥글고 좌우가 대칭인 항아리나 사발, 술잔에 익숙한 눈에 2층 전시실을 채우고 있는 도자기들은 어딘가 낯설다. 고려청자의 비취색이나 소박한 조선백자의 백색이 아니라 빨강·파랑·쑥색·벽돌색이 어우러진 현란한 색상의 향연이 한창이다. 모가 난 술병과 술잔이며 가야 시대 마상배를 모티브로 한 막걸리주전자는 미니어처 탑처럼 보인다. 기암절벽 형상의 침향로에 불을 붙이면 연기가 안개처럼 아래로 번지며 그윽한 향이 실내에 감돈다. 용·호랑이·봉황 등을 그려 넣은 부조는 조소에 가깝다.

전통적인 도자기의 형태나 문양, 색채로부터 자유로운 이 독특한 도자기들은 광주요 도자문화원 조상권 원장(75)의 작품이다. 젊은 시절 건축을 전공했지만 오랜 세월 예술과 무관하게 살아오다가 13년 전, 환갑이 넘은 나이에 도예에 입문했다. 2009년 10월 서울아트센터 공평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을 때에도 대담한 색채와 건축적인 조형미,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화제가 되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뒤늦게 도자기에 예술혼과 열정을 불태우게 만들었을까?

지난 6월17일 전시회 개막식 뒤풀이에 참석했다가 분단의 비극이 고스란히 투영된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전해 듣고 궁금증이 풀렸다. ‘조원장은 고 조소수 광주요 초대 이사장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프랑스 국립미술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한 전도 유망한 건축학도였다. 하지만 1967년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에 휘말려 30년간 중남미와 북한을 떠돌다가 우여곡절 끝에 1997년 귀국했다.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두 자녀를 북에 두고 왔으며 그로 인해 사랑하는 아내를 앞세웠다는 회한과 자책 때문에 매일 밤 술 없이는 잠들지 못하고 새벽 두세 시면 깨어나 작업실로 가 흙을 치댄다.’

6월의 마지막 날 쏟아지는 비를 뚫고 조원장이 살고 있는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진가리 광주요 도자문화원을 찾았다. 소나무 장작 더미가 쌓여 있는 한편에 ‘광호요’라는 간판이 걸린 가마가 눈에 들어왔다. 광호는 1963년 광주요를 설립한 조원장 부친의 호이다. 천금 같은 자식들을 사지(死地)에 남겨놓고 수십 년간 생사도 모른 채 목숨을 이어온 한 남자가 통한의 눈물을 삼키며 예술혼을 불태우는 현장이라기에는 너무도 평화스럽다. 다듬어진 잔디밭 가운데 뛰노는 어린이들을 묘사한 야외 조각 작품이 있었다. 맞은 편 양옥에서 단아하면서도 온화한 인상의 노신사가 걸어나왔다. 은발을 단정하게 빗어 넘긴 이 노신사가 30년간 북한과 중남미를 넘나든 북한 공작원이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정말 공작원이었나요?

“북한에 있을 때 공작원 훈련을 받았어요. 김일성 주석도 여러 번 만났고요. 내 역할은 나 자신을 포함한 다른 북한 공작원의 신분을 세탁하는 것이었어요. 행정이 허술한 남미의 여러 나라를 돌며 다른 북한 공작원들의 시민권이나 여권을 만들어주었지요. 일본,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과테말라…. 그동안 소지했던 여권을 헤아릴 수도 없어요. 에콰도르는 여권이 아니라 영주권이었던가….”

오랫동안 해외에 머무르다가 막상 귀국한 후에는 해외에 나간 적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지만 원래 고향은 경남 남해에요. 57년간을 국외에서 떠돌았어요. 북한에서도 살았으니 해외가 아니라 국외가 맞지요. 아내가 고생이 많았죠. 파리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살았고 남미에서도 오래 살았죠. 일본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영어를 할 줄 압니다. 귀국하고 여권을 압수당해 해외여행을 할 수 없어요. 그런데 솔직히 별로 해외에 가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내 나라의 아름다운 산천 방방곡곡을 시간 날 때마다 둘러보는 일이 더 급해요. 초등학교 때부터 우리 문화유적 답사 다니는 것을 아주 좋아했는데 지금도 1년에 한 번씩은 부여나 경주에 다녀옵니다.”

도쿄에서 부유한 대사업가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해방이 되자 가족과 함께 귀국해 삼천포와 부산에 살았다. 하지만 6·25 전쟁이 발발하자 장남만큼은 살려야 한다는 아버지의 배려로 경남중학교 2학년 때인 1952년 친척과 함께 밀항선을 타고 다시 일본으로 갔다. “나는 일본을 정말 싫어했어요. 일본 사람들의 가식적인 행동, 틀에 박힌 삶이 나처럼 자유분방한 성격과는 도대체 맞지 않았어요. 체구가 작아 미국에 가면 무시당할 것 같았어요. 문학 작품의 영향이었는지 프랑스 파리가 그렇게 가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몹시 반대하셨어요.”

부친의 친구였던 허정씨(4·19 직후 임시정부 수반)가 부친을 설득한 덕분에 1959년 마침내 그토록 동경하던 파리 유학길에 올랐다. 명문 사립 건축대학에 입학했으나 처음 6개월은 20점 만점에 0점을 받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런데 가깝게 지내던 서울대 출신 친구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 파리 국립미술학교에 도전하겠다고 한 것이 경쟁심에 불을 질렀다. 죽기 살기로 공부한 끝에 그는 한국인 최초의 파리 국립미술학교 학생이 되었다. 그는 1961년 파리에서 만난 개성 거상의 딸과 결혼했다. 1년 연상이어서 양쪽 집안의 반대가 심했지만 두 사람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 경기 이천시 광주요 도자문화원 안뜰에 앉아 있는 조상권 원장. ⓒ시사저널 박은숙
“건축과에 입학한 뒤 치른 본과 진학 시험에서 1천2백명 가운데 1등을 하니 프랑스 정부가 장학금을 주고 한국 대사관에서는 조니워커 위스키 두 병을, 동베를린의 북한 대사관은 축전을 보내왔어요. 그 축전이 나와 우리 가족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 놓아버릴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뜻하지 않은 북한 대사관의 축전을 받고 하늘이라도 날 것 같았던 청년에게 좌익 천재 수학자가 동베를린 북한 대사관에 다녀오라고 권했다. 몇 번 거절했지만 끈질긴 권유에 호기심이 일었다. 아내의 만류를 뿌리치고 동베를린에 가니 공항에 영접을 나오고 여비까지 챙겨줄 정도로 환대가 극진했다.

“서너 차례 대사관에 다녀온 다음 1963년 금강산·백두산 구경을 시켜줄 테니 평양에 오라는 제의가 들어오더군요. 여행을 좋아하는 데다 모스크바에서 이르쿠츠크까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평양에 들어가는 코스라고 하니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었죠. 그때 결사반대하던 아내의 말만 들었어도….”

평양에서 받은 국빈 수준의 환대가 공산주의라고는 관심도 없던 순진한 청년을 잇달아 금단의 선을 넘도록 부추겼다. 몇 차례 북한을 들락거리다 조선노동당 입당원서까지 쓰게 되었다. 1967년 7월 동백림 사건 직전 몸을 피하라는 연락을 받은 그는 북한을 피난처로 선택했다. 혐의자로 몰린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줄줄이 한국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고문을 받고 한국으로 강제 송환되던 시절이었다.

 “북한 대사관에서 자꾸 일주일만 피해 있다 돌아오라기에, 아내와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두 아이를 데리고…. 아내는 그때도 이제 가면 다시는 한국에 못 들어간다고 말렸지요. 6개월간 초대소에서 간첩 교육을 받고 평양의 아파트에서 살았습니다.”

1969년 북한 공작원이 된 조이사장 부부는 처음에는 일본인으로 위장한 가짜 여권을 들고 유럽 일대를 다녔다. 그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1971년부터는 남미에서 활동했다. 평양에 두고 온 아이들을 인질로 잡고 있어 북한 당국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파라과이에서는 대문을 조각으로 장식해주는 일을 해 모은 돈을 환투기해서 돈을 많이 벌기도 했지만, 그들 부부가 밖으로 떠돌수록 북한에 남겨놓은 자녀들의 삶은 궁핍해졌다.

그런데 왜 귀순을 결심하게 되었나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유럽 공산국가들이 줄줄이 붕괴되었어요. 북한도 머지않아 붕괴될 것으로 보고 남미에 눌러앉든지 한국에 귀순하기로 결심했죠. 현지에 파견된 안기부 직원에게 북에 남아 있는 자녀들의 안전만 보장된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했어요.”

부부는 1997년 귀순했다. 1년 반 동안 조사를 받은 뒤 열두 살 아래의 막내동생 조태권 광주요 이사장이 일궈놓은 이곳에 아내(2005년 사망)와 함께 정착했다.

그런데 왜 건축학도가 도예로 전공을 바꿨나요?

“한국에 돌아와보니 선친께서 설립한 광주요를 막내가 잘 키워놓았더군요. 동생에게 건축에서 못다 이룬 꿈을 도자기에 쏟아붓겠다고 하니 1만8천평 넓이의 이곳을 내주었어요. 파리 국립미술학교 시절 여름 방학 때 일시 귀국해 전국의 유적을 답사하며 사진을 찍었는데 동양 건축을 전공한 지도교수가 그것을 보고는 한국 건축은 뛰어난 독창적인 조형미를 갖고 있다고 극찬했어요. 자신감을 얻었죠. 창의적이면서도 민족혼이 담긴 새로운 도자기를 계속 만들어낼 것입니다.”

자녀들 소식은 들었나요?

“제가 북에 두고 온 아이들을 찾는다고 하니 그동안 많은 사람이 찾아왔어요. 돈도 많이 주었는데 소용이 없었어요. 최근에도 누군가가 아이들이 살아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하기에 어디 사느냐고 물어봤더니 평양이라더군요. 그래서 거짓말인 것을 알았죠. 제가 이런 이야기를 공개하는 것도 아이들을 찾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입니다.”

김책공대 기계과를 졸업한 아들(1962년생)은 어느 기계공장에서 일하고, 김일성종합대학 어문과를 졸업한 딸(1965년생)은 출판사에서 일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마지막이라고 했다. 평생을 국외에서 떠돌며 불가사의한 온갖 일을 겪었음에도, 북에 두고 온 아이들 이야기가 나오자 그의 목소리가 울먹였다. 눈자위가 불그스레해졌다. 그것을 지켜보는 필자의 두 눈도 눈물로 뿌옇게 흐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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