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에 평생 ‘2인자’팔자 끼어 있다더니…”
  • 감명국 (kham@sisapress.com)
  • 승인 2011.07.12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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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과 정치 역정으로 들여다본 ‘인간 홍준표’ / 육사 합격했으나 누명 쓴 아버지 생각해 검사로 ‘전향’

▲ 홍준표 대표가 서울 동대문 을 지역구 주민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홍준표 의원실 제공

“현대조선소에서 일당 8백원을 받던 경비원의 아들, 고리 사채로 머리채 잡혀 길거리로  끌려다니던 어머니의 아들이 집권 여당의 대표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국민에게 보여주었다.”

7월4일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에 당선된 홍준표 신임 대표의 첫 일성이다. 그는 “변방에서 중심으로 왔다. 그렇지만 변방의 치열한 정신을 잊지 않겠다”라고 했다. 흔히 홍대표를 말할 때 ‘모래시계 검사’ ‘독불장군’ ‘돈키호테’ ‘버럭 준표’라는 표현이 따라 다니지만, 그 자신은 ‘변방’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항상 비주류로서 주변을 맴돌았다는 것이다. 그는 지독히도 가난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자주 떠올리곤 한다.

홍준표 대표는 1954년생으로 경남 창녕이 고향이다. 대구에서 중·고등학교(영남중·고)를 나왔고, 서울 지역구(송파 갑→동대문 을)에 줄곧 출마한 탓에 그가 PK(부산·경남) 출신이라는 점은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원래 이름은 홍판표였다. 하지만 검사가 되고 나서 주변에서 “검사가 무슨 판사 ‘판(判)’ 자를 쓰느냐”라고 해서 ‘준표’로 바꾼 것으로 알려졌다. 어린 시절 그는 셋방살이를 전전하며 초등학교를 다섯 번이나 옮겨다닐 정도로 혹독한 가난에 시달렸다. 홍대표가 지난 2009년 직접 쓴 <변방>이라는 자서전에 이런 과정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가 당 대표에 선출된 직후 각 언론사에 소개된 과거의 추억과 여러 에피소드 역시 대부분 이 책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1974년 3월 초, (고려대에) 재입학했다. 그해 6월 중순경, 고향으로부터 다급한 연락을 받았다. 고향 집이 방화로 소실되었다는 것이다. 급히 내려가 보니 부모님과 여동생은 텃밭에 비닐 가건물을 짓고 그 장마 속에 비를 맞으며 살고 있었다. 가족회의를 한 결과 마지막으로 울산으로 이사를 가기로 결정했다. 어릴 적 고향을 떠나 대구, 창녕, 합천 등지를 떠돌다가 이제는 울산으로 흘러가기로 한 것이었다. 울산은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공업 도시로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살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낙동강 하천 부지 경작권과 가재도구를 모두 팔아보니 전 재산이 32만원밖에 되지 않았다. 그 돈으로 울산 복산동 산골짜기에 단칸 월세방을 얻어 마지막 종착역인 울산에서의 힘겨운 생활을 시작하였다. 아버지는 이모네 소개로 현대조선소에 임시직 야간 경비원으로 취직하였고, 여동생과 작은 누나도 공장에 직원으로 취직하였다. 그해 겨울 방학 때 울산에 들렀던 나는 영하 15도나 되는 전하동 백사장에서 모닥불을 피워놓은 채 밤새 쪼그리고 앉아 경비를 서는 늙으신 아버지를 먼발치에서 보고 피눈물을 흘렸다.’

학생 시절 홍대표가 검사가 아닌, 자칫 군인이나 평범한 회사원의 길을 갈 뻔한 일화도 소개되고 있다. 고3 때 아버지가 학비가 면제되는 육사에 가라고 권유했기 때문이다. 실제 그는 육사 특차시험에 합격했다. 그런데 인생의 전환점이 될 만한 사건이 발생했다. 농사를 짓던 아버지가 남이 훔친 비료를 매수했다고 장물 취득죄로 경찰서에 잡혀간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농협 조합장이 자신의 부정을 감추기 위해 아버지에게 누명을 씌운 것으로 드러났다. 억울함에 눈물 흘리는 아버지를 보며 홍대표는 ‘군인보다 검사를 해야겠다’라고 마음먹었다.

▲ 왼쪽 위는 고려대 졸업 사진, 왼쪽은 초임 검사 시절의 모습, 위는 한나라당 사랑의 집 짓기 행사에 참가하고 있는 홍준표 대표. ⓒ홍준표 의원실 제공

미국에서 만난 MB·손학규와의 관계

그런데 검사의 길도 순탄치 않았다. 고려대 법학과에 진학하자마자 사법고시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낙방했다. 한때 고시를 포기하고 연합철강에 취직하기도 했다가 1982년 마지막이라는 다짐을 하고 다시 한번 도전했다. 하지만 시험이 끝난 후 합격이 어려울 것 같은 예감에 한라자원이라는 회사에 지원해 파푸아뉴기니 현장에서 근무하겠다는 조건으로 합격을 했다. 첫 출근일이 9월3일이었는데, 고시 합격자 발표가 하루 전날이었다. ‘오늘 떨어지면 나는 한국을 떠나 파푸아뉴기니로 가겠다’라고 결심했다. 세상을 잊은 채 정글 생활을 하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다분히 돈키호테적인 발상과 행보도 눈에 띈다. 초임 검사 시절인 1987년 12월에 대선이 치러졌다. 이른바 ‘1노3김’으로 불리는 쟁쟁한 후보들이 각축을 벌이던 때였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이 선거에서 홍대표는 한 종교의 교주 출신인 군소 정당 후보에게 투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후보는 4만여 표로 0.2% 득표율이라는 보잘것없는 성적에 그쳤다. 왜 그랬을까. 그 에피소드가 재미있다. 영남 출신이었던 홍대표는 김영삼 후보 지지자였고, 전북 부안 출신인 아내는 김대중 후보 지지자였다. 부부끼리 대선 논쟁을 벌이다가 결국 부부 싸움으로 비화되어 이혼 얘기까지 나오게 되었다. 결국 선거 하루 전날 ‘그러면 YS도 DJ도 아닌 다른 사람을 찍자’라고 합의해서 그 군소 후보를 택했다는 것이다.

홍대표는 이번 전당대회를 앞두고 ‘만년 2인자’의 그늘을 떨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한 측근은 “주변에서는 ‘홍준표 대세론’을 말했지만, 상황은 좋지 않았다. 원희룡 후보가 친이계의 지원을 받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또 2위가 되는구나’ 하는 위기감이 감돌았다. 홍대표가 혼잣말로 ‘내 사주에 항상 2인자가 끼어 있다더니 또 그렇게 되나’ 하고 탄식하기도 했다”라고 전했다. 홍대표는 자서전에서도 ‘점이라는 것은 믿지도 않고 해보지도 않았지만 1977년 8월 어머니를 따라 마지못해 점을 본 적이 있다’라며 그 점쟁이의 예언이 결과적으로 거의 적중한 데 대해서 놀라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1999년 5월 홍대표는 선거법 위반으로 대법원 선고를 하루 남겨둔 시점에서 의원직을 사퇴하고 워싱턴으로 떠났다. 거기에는 때마침 같은 이유로 의원직을 사퇴한 이명박 대통령이 이미 와 있었다. 또 경기도지사 선거에서 낙선한 손학규 대표도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조지워싱턴 대학 객원교수로 있었다. 홍대표는 ‘하루는 이명박 선배와 하루는 손학규 선배와 만났다. 나는 그 선배들과 교분을 두텁게 가지면서 많은 것을 배워나갔다.

그러나 그때도 두 분은 이회창 이후 한나라당의 지도자라는 경쟁의식이 있었는지 3자가 같이 만나는 것을 서로 회피했다. 이명박 선배와는 시간이 나면 주로 골프를 하고, 골프를 못하는 손학규 선배와는 세상 이야기를 주로 하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실제 홍대표는 이 후일담으로 “내가 중간에서 두 선배를 같이 만나자고 하면, 이선배는 ‘경기(고) 뺀질이하고 너나 밥 먹어라’, 손선배는 ‘그냥 시골 고대생끼리 만나라’ 하며 서로 만남을 피했다”라고 전했다. 이대통령과 손대표의 감정의 골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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