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난 소송 끝 북에 가는 ‘남한 재산’
  • 이규대 기자 (bluesy@sisapress.com)
  • 승인 2011.08.09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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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자녀 4명, 월남한 선친의 유산 일부 받게 돼…미국 교포 선교사 도움으로 2년 걸려 ‘결실’

▲ 7월4일 평양 칠성문 식료품상점에서 주민들이 메주장을 구입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17부(부장 염원섭)는 지난 7월12일 남한의 아버지가 남긴 재산의 일부를 북한의 자녀들이 상속받도록 하는 내용의 조정이 성립되었다고 발표했다. 북한 주민이 남한 재산에 대한 상속권을 인정받은 첫 사례였기 때문에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아울러 향후 파장도 클 전망이다. 이번 조정에 합의한 당사자들은 남과 북에서 ‘두 가족’으로 살아오던 윤씨 일가이다. 윤씨 일가의 인생 역정에는 분단된 한반도의 과거와 현재의 아픔은 물론, 미래의 모습이 함께 녹아 있다.

사연은 광복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평안남도 순천에서 출생한 윤기정씨(가명·1987년 사망)는 1933년쯤 김혜옥씨(가명·여·사망)와 혼인해 2남 4녀를 두었다. 윤씨는 개인 의원을 경영하며 다복한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윤씨 가족의 운명을 바꾸어놓았다. 그는 1951년 1·4 후퇴 당시 아내와 자식 다섯 명을 북에 남겨 둔 채, 당시 15세였던 장녀 윤정임씨(가명·77)만 데리고 남하했다. 그는 잠시 피신하는 것일 뿐 곧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후 상황은 윤씨의 기대와는 딴판으로 흘러갔다.

1953년 휴전협정으로 인해 북한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윤기정씨는 우선 미군정법령 제179호에 따라 당시 남한의 거주지를 본적으로 하여 취적 신고를 했다. 당시의 법령을 준수한다면 북한 호적에 기재된 내용까지 빠짐없이 신고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북한의 가족들은 물론 남한에 함께 온 장녀를 누락시킨 채 혼자만 취적 신고를 했다. 당시만 해도 북으로의 귀환을 포기하지 않았던 윤씨였기에 남한의 취적 절차를 임시적인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는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북한의 가족을 데려오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보낸 사람이 북한 당국에 체포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 윤씨는 북한의 아내 김씨 및 함께 남하한 큰딸을 대상으로 우선 취적 허가를 받았다.

이후 휴전선이 고착되면서 북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사라졌다. 윤기정씨는 1959년 남한에서 권윤자씨(가명·78)를 새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이 과정에서 윤씨는 ‘본처 김씨가 지난 1952년 서울에서 사망했다’라며 허위 신고를 했다. 권씨와의 혼인 신고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윤씨는 권씨와의 사이에 2남2녀를 두고 서울에서 개인 의원을 경영하며 재산을 모았다.

평소 윤기정씨는 북한의 가족들이 반동으로 몰려 고초를 겪을 것이라며 자주 한탄했다고 한다. 가족들의 생사를 궁금해하면서, 만약 살아 있다면 이들에게 재산을 물려주고 싶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끝내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지난 1987년 눈을 감았다.

함께 월남한 큰딸, 부친 유지 받들어

이후 큰딸 윤정임씨는 북쪽의 가족을 찾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했다. 2000년경 남북 이산가족 찾기 운동이 일어났을 때 북한의 가족들을 찾기 위해 신청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아무런 확인도 받지 못했다. 2005년에는 일본에 거주하던 외삼촌을 통해 북한 가족의 생사를 수소문하기도 했다. 외삼촌은 백방으로 뛰어다닌 끝에 한 조총련계 지인으로부터 관련 정보를 접하게 되었다. 어머니 김씨와 큰 동생은 1990년대 말 이미 사망했고, 나머지 동생 네 명은 북한에 생존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금 거주하고 있는 곳의 주소까지 알아낼 수는 없었다.

2008년 윤정임씨는 지인의 소개로 만난 미국 교포 선교사 서 아무개씨(78)를 만났다. 서씨의 도움을 받으면서 일이 풀리기 시작했다. 서씨는 한 NGO 단체 소속으로 미국과 북한을 지속적으로 오가며 봉사 활동을 해온 사람이었다. 종교적 색채를 배제한 순수 자선 활동이었기에 북한 당국은 이들 단체의 활동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무엇보다 서씨는 북한 국가보위부 관계자와 친분이 있었다. 평양에 있는 국가보위부 사람을 끌어들이면 지방에 있는 공무원과 접촉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살아 있다는 동생 네 명의 정확한 주소를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2008년 4월 평양에 도착한 서씨는 북한 지인의 도움으로 살아 있는 동생들 중 맏이인 윤정철씨(가명·70)를 만날 수 있었다. 당시 북한에 남은 가족들은 국가반역자라는 누명을 쓴 채 살고 있었다. 월남자의 가족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거의 모든 개인 행적이 주민대장에 기록될 정도로 지독한 감시에 시달렸다. 특히 아버지 윤기정씨가 보낸 사람이 북한 당국에 붙들린 후에는 반동분자로 몰려 더욱 혹독한 생활을 했다. 탄광 등지로 추방당해 막노동에 종사하며 극도로 궁핍한 삶을 살고 있었다.

윤정철씨는 전후 사정을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서씨는 남한에 있는 누나의 부탁으로 왔다는 것, 남한에서 아버지가 이미 사망했다는 것, 상속 및 소송과 관련된 문제 등을 차례로 이야기했다. 서씨의 입에서 누나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그는 눈물을 흘렸다. 남한 변호사에게 위임해 상속권 소송을 진행할 의사가 있는지 묻는 질문에는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라며 놀라는 기색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바로 그 자리에서 소송을 위임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서씨가 모든 동생을 직접 만나며 소송 위임 의사를 물을 수는 없었다. 이들을 한 명씩 찾아다니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국가보위부 관계자에게 부탁하는 대신, 서씨는 동생들이 자필로 소송 위임장을 써서 읽는 모습까지 모두 동영상으로 촬영해줄 것을 부탁했다. 며칠 후 서씨는 모든 동생이 소송 위임 의사를 밝혔다는 것을 전해 들었다. 동생들은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는 관심이 없었으며, 조금이라도 생계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소송을 결심했다고 한다.

2008년 7월, 서씨는 북한 가족의 소송 위임에 필요한 서류를 가지러 배금자 변호사의 사무실을 찾았다. 사안의 특성상 여러 가지 소송이 병행되어야 했다. 상속권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우선 아버지 윤기정씨와의 가족 관계를 법적으로 검증받는 절차가 선행되어야 했다. 이를 위한 철저한 사전 준비가 시작되었다.

서씨는 북한 국가보위부 관계자에게 관련 서류 및 증거 자료를 빠짐없이 채취할 것을 부탁했다. 우선 동생들에게서 자필 소송 위임장, 자필 진술서 등을 받았다. 또한 친생자 관계임을 입증하기 위해 동생들의 손톱과 머리카락을 채취했다. 그 효력이 인정되지 않을까 봐 서류 및 증거 자료가 마련되는 모든 과정을 동영상으로 촬영했다. 아버지 윤기정씨가 북한에서 형성한 가족 관계를 입증하는 자료도 수집했다. 허위 신고로 잘못 기록된 모친의 사망 일자 및 장소를 수정하기 위해 공식 확인서를 발급받았다. 친자 관계임을 입증하기 위한 자료도 필요했다. 북한 내 기밀 문서인 공민증 및 주민대장 등을 미리 준비한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했다. 서씨는 이 모든 것을 국가보위부 관계자로부터 건네받아 2008년 9월 말쯤 한국의 윤정임씨에게 전달했다. 이로써 소송을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다.

소송 대리인인 배금자 변호사는 먼저 서울남부지방법원에 북한 가족들의 남한 내 가족관계 등속 창설을 신청해 허가를 얻었다. 친생자 관계 판결에 소요되는 시간을 우려해, 아버지 윤기정씨와의 가족 관계를 제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좀 더 빠른 방법을 찾은 것이다. 이후 본격적으로 친자 관계임을 인정받기 위해 나섰다. 서울가정법원에서 ‘친생자 관계 존재 확인 청구의 소’ 및 ‘인지 청구의 소’(법률상 친자 관계로 등록되지 않은 자녀가 해당인의 자녀임을 인지하는 소)를 동시에 진행했다. 법원은 후자에 대해 혼외의 관계에서 태어난 자만이 제기할 수 있는 소송이라는 이유로 각하했으나, 전자에 대해서는 지난해 12월 친생자 관계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남은 과제는 상속 재산의 전달 방법 찾기

한편 큰딸 윤정임씨는 아버지와 계모 권씨의 혼인이 중혼(重婚)이므로 취소해달라는 소를 함께 제기했다. 하지만 법원은 첫 번째 결혼의 유효성과 함께 두 번째 결혼을 중혼으로 인정하면서도, 두 번째 결혼을 취소해달라는 윤씨의 청구는 각하했다.

이상 모든 소송은 서울중앙지법에 제기한 상속권 회복 소송을 위한 전초 작업이었다. 지난 2009년 처음 소를 제기한 이래 상당 시간 동안 법정 싸움을 벌였다. 소송 위임장의 효력보다는 소송 위임 행위의 진실성 여부가 쟁점이 되었다. 즉, 북한 주민이 순수하게 아버지의 재산에 대한 상속권을 요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소송을 위임했는지의 여부가 핵심이었다. 수차례 조정이 결렬되고 선고가 유예된 끝에 지난 7월12일 서울중앙지법 재판부는 “북한 남매 4명이 부동산 일부와 현금을 받는 선에서 조정이 성립되었다”라고 밝혔다. 검사측의 항소로 인해 아직 ‘친생자 관계 존재 확인 청구’에 대한 항소심이 진행 중이기는 하나, 이로써 약 2년에 걸친 지난한 소송이 일단락되었다. 준비 기간까지 포함하면 약 3년이 걸린 북한 주민의 ‘권리 찾기’ 노력은 이렇게 대단원으로 진입했다.

향후 관심거리는 과연 상속 재산이 어떤 방식으로 북한 주민들에게 전달될까 하는 점이다. 동생들로부터 재산 관리를 위임받은 윤정임씨는 매달 소액을 북한으로 송금할 계획이다. 이에 대해 배금자 변호사는 “현재 북한에서는 각 가정마다 7백 달러까지는 소유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매달 송금하는 소액의 돈이 궁핍한 북한 가족의 생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한편 정부는 북한 주민의 상속권을 인정하면서도 상속 재산의 반출은 일정 부분 제한하는 특례법을 지난해 마련했으며, 현재 입법 추진중이다. 


 상속권부터 이혼 청구까지, 남북한 주민 소송 사례 어떤 것이 있었나

남한과 북한 사이에 법적 분쟁이 나타나게 된 것은 2000년대 이후의 일이다. 과거에 비해 양자 간 교류 및 협력이 활발해진 결과이다. 가족 관계,재산권, 상속권, 저작권 등 여러 분야에서 소송이 제기되었다.
지난 2001년, 북한 주민 세 명이 남한의 변호사에 위임해 신분상·재산상의 권리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북한 주민이 남한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첫 사례였다. 그런데 소송 진행 과정에서 상속세 미납에 따른 가산세 및 가산금이 계속 증가해 상속 재산이 소멸될 위기에 처했다.
결국 북한 가족들에게 재산을 일부 나눠주기로 합의한 후 소송이 취하되었다.
지적재산권 소송도 여러 번 제기되었다. 지난 2006년 벽초 홍명희의 손자인 홍석중씨가 낸 소송이 대표적이다. 그는 자신의 동의 없이 할아버지가 쓴 소설 <황진이>를 잡지에 게재해 저작권을 침해했다며 남한의한 출판사 대표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은 법원의 조정을 통해 출판사가 홍씨에게 1만 달러를 지급하는 대신 남한에서의 출판권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2008년에는 북한 주민이 남한의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청구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 납치된 한 북한 주민이 김포시에 있는 땅 4백50㎥를 돌려달라며 김포시와 경기도시공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남한에 사는 둘째딸이 법정대리인이 되어 소송을 진행한 끝에 원고 승소판결을 얻어냈다.
북한 이탈 주민이 북한의 배우자를 상대로 제기한 이혼 소송도 눈에 띈다. 지난 2004년 탈북 여성 오 아무개씨는 함께 탈북했다가 체포되어 북한으로 강제 송환된 남편에 대해 이혼 및 친권자 소송을 제기했다. 오씨는 승소했고, 이후 탈북자들의 유사 소송이 대폭 증가했다. 결국 지난 2007년 관련 특례 규정을 신설함으로써 북한 이탈 주민의 이혼 청구가 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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