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가지고 헐리는 광복군 유산
  • 모종혁│중국 충칭 통신원 ()
  • 승인 2011.08.16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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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내 유적들, 무관심 속에 방치되거나 흔적도 없이 사라져…옛 지휘소 건물은 퇴폐 업소로 전락

▲ 성매매까지 가능한 퇴폐 술집으로 바뀐 광복군 제3지대 지휘소. ⓒ모종혁 제공

지난 7월 중순 중국 안후이(安徽) 성 푸양(阜陽) 시 런민중루(人民中路)의 맨해튼 바. 밤 9시가 조금 넘어 찾은 술집에는 손님들이 하나 둘씩 들어서고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자 남자 종업원은 필자를 2층 룸으로 인도한 뒤 온갖 자랑을 늘어놓았다. “저희 집에는 수십 명의 미희들이 항상 대기하고 있습니다. 원하시면 ‘2차’도 가능합니다.” 나지막하게 아가씨를 데리고 나갈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1층 중앙 홀에서는 화려한 공연이 펼쳐지고 1~2층 룸에서는 매춘도 가능한 맨해튼 바. 이곳은 한때 우리 정부가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 광복군 제3지대 지휘소가 있던 곳이었다.

1942년 4월 중국 내륙 충칭(重慶)에 자리 잡은 임시정부는 김학규 장군과 대원 7명을 푸양에 파견했다. 당시 중국 연해 지방 대부분은 일본군이 점령했지만, 푸양은 국민당 정권의 통치 아래 있었다. 푸양에서 약 2백50㎞ 떨어져 있는 장쑤(江蘇) 성 쉬저우(徐州)에는 다수의 일본군 군대가 주둔했다. 김장군 일행은 쉬저우 일대에 배치된 조선인 학도병과 허난(河南)·산둥(山東) 등지에 거주하는 교민 자제들을 대상으로 모병 활동을 벌였다.

초기 초모 공작은 지지부진했지만 해가 지나면서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났다. 1944년과 1945년 쉬저우 일대를 탈출한 학도병은 100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그중에는 지금은 모두 작고했지만, <사상계>를 발간하고 박정희 정권에 저항했던 장준하, 고려대 총장을 지낸 김준엽, 광복회장을 역임한 윤경빈 등 쟁쟁한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좌) 재개발 계획에 따라 헐릴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광복군 총사령부 본부.(우) 광복군 본부로 쓰였던 건물은 전면부가 새로이 증축되고 지붕을 개·보수했을 뿐 옛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모종혁 제공
푸양 시에서 60㎞ 떨어진 린췐(臨泉) 현에는 초모 공작으로 모인 조선인 청년들을 위한 광복군 훈련반이 설치되었다. 훈련반은 일종의 신병훈련소로, 광복군 인력 수혈의 중추를 담당했다. 린췐에서 교육을 마친 1기 졸업생 전원은 3지대에 배속되어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가했고, 2~3기 졸업생도 신입 대원 훈련과 국내 진공 작전에 투입되었다. 하지만 지금 훈련반의 옛 흔적을 찾을 방법은 전혀 없다. 훈련반 숙소가 있던 자리가 린췐 제1중학교 운동장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2003년 6월 광복회와 장준하기념사업회에서 기념비를 세웠지만, 기념비는 학교에서 2㎞ 떨어진 린췐 현 상공회의소(招商局) 소속 공장 부지 안에 위치하고 있다. 도심인 제1중학교과 달리 시 외곽에 있어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필자도 현지에 사는 리훙(李洪) 씨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기념비의 소재를 알아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광복군 지킴이’ 리훙 씨의 숨은 노력

린췐 현 지방세무국에 근무하는 리훙 씨는 광복군 유적의 지킴이로 유명하다. 2002년 작고한 선친 리빙잉 씨가 국민당군 교관으로, 장준하·김준엽·윤경빈 등 수많은 애국지사를 직접 훈련시켰던 인연 때문이다. 리 씨는 “아버지는 국민당 장교였던 과거 경력 때문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후 8년간 감옥에 수감되었었고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온갖 고초를 당했다. 1993년 윤경빈 전 광복회장 등이 찾아오기 전까지 옛일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라고 회고했다.

그 뒤로 10여 년 동안 리 씨에게는 훈련반 기념비를 돌보고 가끔씩 찾아오는 한국인을 맞이하는 일이 중요 임무가 되었다. 그는 “2003년 훈련반 숙소가 있던 자리에 기념비를 세우려 했지만 학교측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돌아가신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기념비를 원래 자리로 옮기려 하는데, 혼자만의 힘으로는 쉽지 않다”라며 아쉬워했다.

▲ (좌) 중학교 운동장으로 변한 광복군 훈련반. 장준하·김준엽 등 쟁쟁한 애국지사가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다.(우) 광복군 유적을 지키는 중국인 리훙 씨. ⓒ모종혁 제공
우리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고 있는 중국 내륙의 항일 투쟁 유적지는 비단 푸양의 광복군 훈련반뿐만이 아니다. 충칭 시 곳곳에 분산된 임시정부와 광복군 관련 유적의 현실도 암담하기는 마찬가지다. 난안(南岸) 구 탄쯔스(彈子石)에 남아 있던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 본부 및 임정 요인 숙소 옛터는 2009년 완전히 철거되었다.

당시 조선민족혁명당의 수장은 김규식이었고, 조선의용대는 김원봉이 이끌었다. 1942년 임시정부는 충칭에서 중도파와 사회주의 계열까지 아우르면서 명실공히 항일 투쟁을 대표하는 통합 정부로 발돋움했다. 오랜 세월 동안 쓰촨(四川) 성 물자관리국 창고가 있어 김구 주석의 모친 곽낙원 여사가 살던 집 등 일부는 원형을 유지했었다. 하지만 도시 재개발에 따라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지금은 그 자리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있다.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광복군 총사령부 본부의 앞날도 불투명하다. 1940년 8월 자링(嘉陵) 호텔에서 창설된 광복군은 위중 구 저우룽루(鄒容路) 37호를 본부 건물로 사용했다. 그 뒤 광복군 주력은 일본군과의 전투와 병력 초모 활동을 위해 샨시(陝西) 성 시안(西安)으로 이전했지만,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등 지휘부는 국민당 군사위원회와 협정 문제 등을 협의하기 위해 충칭에 계속 남았다.

광복 전까지 광복군 본부로 쓰였던 건물은 전면부를 새로이 증축하고 지붕을 개·보수한 것 외에는 옛 원형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 하지만 건물 일대가 충칭 최고의 번화가인 데다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되어 내년에는 헐릴 가능성이 크다. 자칭하이(賈慶海) 충칭 임시정부 청사 관장은 “충칭 시 정부는 한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건물을 보존할 방안을 연구했지만 지은 지 오래되어 붕괴 위험이 크고 주변은 재개발이 시급한 슬럼가라 철거 계획을 철회하기 힘들다”라고 밝혔다.

▲ 김구 주석이 하권을 저술한 임시정부 우스예샹 청사. ⓒ모종혁 제공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임정이 세 번째로 사용한 우스예샹(吳師爺巷) 청사의 보존을 위한 협정이 우리 정부와 충칭 시 사이에 맺어진 것이다. 우스예샹 청사는 임정이 마지막으로 자리 잡은 롄화츠(蓮花池) 청사와 더불어 원래 모습을 잘 간직한 곳이다. 임정은 1940년 충칭으로 이사한 뒤 청사를 네 차례 옮겼는데, 1~2차 청사는 일본군 공습으로 파괴되거나 도시 재개발로 사라졌다.

조선족 출신인 이선자 임정 청사 부관장은 “옛날에는 2층 목조가옥 구조에 규모가 70여 칸에 달할 정도로 컸다. 임정이 1945년 1월 롄화츠로 옮기기 전까지 많은 애국지사가 활동했고, 김구 주석이 <백범일지> 하권을 저술하기도 했다”라고 소개했다. 이부관장은 “한국 정부와 충칭 시 정부 간 기본적인 보존 협의는 이미 마쳤고 세부적인 방안의 논의만 남아 있다”라고 말했다.

중국 정부의 비협조·견제도 걸림돌

급속한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전 국토가 공사판이 되어가고 있는 중국의 현실에서 항일 투쟁 유적지를 보존·관리하기란 여간 쉽지 않다. 무엇보다 경제적인 논리에 따라 도시 재개발이 이루어지고 있어 외교적인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자칭하이 관장은 “광복군 본부 일대의 부동산 공시 지가만 5천만~6천만 위안(한화 약 84억~100억원)에 달하고 재개발로 얻을 수 있는 상업적인 이득은 1억~2억 위안(약 1백68억~3백36억원)을 넘는다. 충칭 시 입장에서는 한·중 관계도 중요하지만 경제적인 수익을 버릴 수도 없어 고민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에 중국 중앙 정부의 비협조와 견제도 걸림돌이다. 독립기념관의 한 관계자는 “중국 정부는 소수 민족의 정체성과 역할을 강조하는 작업에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중국 내 항일 유적지는 현지 조선족의 정체성 복원과 연관이 커서 유적 보존이나 자료 발굴에 견제가 심하다”라고 토로했다.

하지만 현실적인 제약 때문에 중국 내륙 곳곳에 숨 쉬는 우리 겨레의 역사 현장을 지금처럼 방치해서는 안 된다. 황유복 중앙민족대학 교수는 “동북항일연군이나 조선의용대 등 사회주의 계열 유적지는 중국 공산당이 직접 나서서 기념공원을 조성하거나 표지석을 세우고 있다. 만주의 조선혁명군이나 내륙의 임정과 광복군 유적은 국민당 정권과 관계가 깊은 역사적 배경을 고려해 지방 정부와 협상하는 것이 좋다”라고 조언했다.

일부 지방 정부도 한국 관광객 유치 차원에서 항일 유적지 기념 사업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지난 6월 초 푸양을 방문한 진기훈 상하이 총영사관 영사에게 량훙췬(梁紅群) 푸양 시 외사판공실 주임은 “한국 정부와 직접 교류하고 관계가 진전되면 표지석 등을 세우도록 하겠다”라고 밝혔다. 현재 푸양에는 한국인이나 조선족이 단 한 명도 살고 있지 않지만, 한국 상품 전문 상가가 성업 중이고 한국 식당도 두 곳이나 있다. 

전태동 시안 총영사관 총영사는 “광복군 제2지대가 주둔했던 시안 시 창안(長安) 구 두취(杜曲) 진 양곡창고에 기념비를 세우기 위해 현지 정부와 접촉하고 있다. 단지 담당 업무는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의 관할이라 외교 공관이 직접 나서는 것은 한계가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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