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기업들 “다변화 전략만이 살길이다”
  • 이철현 기자 (lee@sisapress.com)
  • 승인 2011.08.23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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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산업 부문에서 세계 시장의 경쟁 환경 급변 선진 업체 ‘덩치 키우기’에 맞서 사업 다각화에 안간힘

▲ 앤디 루빈 구글 부사장이 지난해 6월8일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에서 열린 ‘갤럭시S’ 미디어데이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시사저널 박은숙

 한국의 기간 산업 부문에서 세계 시장에서의 경쟁 환경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 정보통신기술(ICT)·자동차·철강·조선·엔지니어링 분야의 외국 경쟁 기업 상당수가 인수·합병(M&A)이나 전략적 제휴로 덩치를 키우고 있다. 비용을 줄이거나 시장 지배력을 키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새 사업 모델을 만들거나 이종 결합으로 새 시장을 창출하고 있다. 삼성전자, 현대차, 포스코, 현대중공업 같은 국내 대기업은 익숙하지 않은 경쟁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다변화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한국 대기업 집단은 지금까지 ‘선택과 집중’과 ‘베끼기(리버스 엔지니어링)’라는 성장 전략을 채택해 제한된 자원을 소수 업종·제품·시장에 쏟아부으며 시장 선두 업체를 뒤쫓았다. 이 전략은 유효했다. 산업마다 시장 선두 업체를 위협하는 한국 기업들이 잇달아 나타났다. 메모리 반도체·액정표시장치(LCD)·휴대전화 단말기·TV·조선·화학 분야에서는 한국 대기업이 선두에 나섰다.

한국 기업이 시장을 이끄는 정보통신 분야는 ‘광속’으로 이루어지는 기술 변화에 걸맞게 경쟁 환경도 눈 깜짝할 사이에 바뀐다. 세계 정보통신기술 산업은 지금 상전벽해에 가까운 지각 변동을 하고 있다. 패러다임을 바꾸는 사건이 잇달아 일어나는가 하면 업체 간 합종연횡이 활발해지면서 경쟁 양상이 순식간에 바뀌고 있다.

예기치 못한 이벤트들이 예기치 못한 빠르기로 일어나서인지 국내 ICT 분야 종사자나 전문가 사이에서는 ‘인식의 오류’가 심각하다. ‘전세계 ICT 업체가 삼성전자를 견제하기 위해 합종연횡하고 있다’라는 분석이 그것이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튀어나온 못을 때리려는 것처럼 전세계 주요 업체들이 삼성을 견제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해 당사자이다 보니 자기중심적 오류를 이해할 만하나 산업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이들조차 ‘21세기 한국판 천동설’에 빠져 있다. 국내 대기업이 유효한 경쟁 전략을 마련하려면 자기가 처한 시장 지위와 경쟁 현실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삼성전자는 전세계 ICT 산업의 중심이 아니다. 구글이 조성한 안드로이드 생태계에 기생하는 단말기 제조업체에 불과하다. 애플이라는 시장 혁신 업체에게 부품이나 모듈을 공급하는 벤더일 뿐이다.

삼성전자, 플랫폼 다변화 나설 가능성 커져

‘전세계 ICT 업체들이 삼성전자를 견제한다’라는 분석에서 비롯된 경쟁 전략이 ‘바다 키우기’이다. 구글이 지난 8월15일 모토로라 모빌리티를 인수하자 구글이 앞으로 국내 휴대전화 제조업체에게 안드로이드 운영체제 사용을 제한할 수 있다는 분석이 쏟아져나왔다. 조성은 KB투자증권 연구원은 “(모토로라 인수는) 하드웨어 절대 강자인 애플이 되고 싶은 구글의 숨은 야욕이 드러났다”라고 분석했다. 구글이 모토로라 모빌리티가 보유한 1만7천개 통신 관련 특허를 활용해 국내 단말기 제조업체를 상대로 특허권 침해 소송을 잇달아 제기할 것이라는 우려까지 나왔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가 독자적 모바일 운영체제(OS)인 ‘바다’를 강화하는 ‘안드로이드 출구 전략’을 서둘러 실행해야 한다는 주장이 확산되고 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8월16일 ‘9~10월쯤 바다2.0을 탑재한 스마트폰 웨이브3을 국내외에 출시한다’라고 밝혔다. 삼성전자는 또, 세계 통신 사업자 통합 앱스토어(WAC)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안드로이드마켓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서다. 

하지만 ‘안드로이드 출구 전략’은 구글의 사업 모델과 모토로라 모빌리티가 보유한 특허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극약 처방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순학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구글은 운영체제와 사용자 환경 개발에 집중해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보다 나은 모바일 플랫폼을 상용화하는 데 주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세계 최대 인터넷 검색업체인 구글의 수입원은 광고이다. 구글이 지금까지 검색 엔진과 함께 지메일,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전자책(e-book), 위치 기반 서비스(LBS), 오피스웨어 같은 업체를 잇달아 인수하면서 갖가지 서비스를 제공한 것도 광고 수입을 늘리기 위해서였다. 구글은 2005년 안드로이드를 인수하고 나서도 철저하게 플랫폼 개방 정책을 유지하며 새 사업 기회를 만들기 위한 발판으로 삼았다. 래리 페이지 구글 최고경영자(CEO)는 ‘앞으로 안드로이드 개방(오픈) 정책은 유지될 것’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도 구글은 단말기 제조업으로 수익을 내기 어렵다. 모토로라 모빌리티는 미국과 캐나다를 제외하면 시장 점유율이 형편없다. 또 모토로라 모빌리티가 보유한 특허의 상당수가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 지적재산권 컨설팅업체인 엠닷캠의 데이비드 마틴 회장은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모토로라의 특허 상당수가 미국에서만 효력이 있다. 유럽에서는 일부 특허만 유효하다’라고 지적했다. 경쟁 업체들은 모토로라 모빌리티가 보유한 기술특허를 대체할 만한 기술특허를 갖고 있다.

‘안드로이드’ ‘윈도모바일’ ‘바다’ OS의 경쟁

▲ 삼성전자가 지난 2월15일 열린 ‘MWC(Mobile World Congress) 2011’에서 ‘바다 개발자 데이’를 성황리에 개최했다. ⓒ삼성전자 제공

구글이 모토로라 모빌리티를 인수하자 단말기 제조업체들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삼성전자, LG전자, HTC, 소니에릭슨, ZTE, 후웨이가 구글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마이크로소프트 윈도폰7이나 휴렛패커드 웹OS 같은 대안의 운영체제를 채택할지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플랫폼 다변화 전략을 채택할 것이라는 전망이 유력하다. 안드로이드 생태계에 맞는 스마트폰을 지속적으로 개발해 안드로이드 선두 주자라는 입지를 확고히 한다는 전략이다. 이와 함께 마이크로소프트 윈도모바일 OS를 탑재한 망고폰(WP7.5)을 올해 9~10월에 출시한다. 바다2.0을 탑재한 새 스마트폰 ‘웨이브3’은 9월 초 독일 가전전시회 IFA에서 선보인다.

여차하면 삼성전자는 자사가 보유한 현금 17조원을 동원해 매물로 나와 있는 통신업체를 인수·합병할 수 있다. ‘블랙베리’로 유명한 캐나다 스마트폰 업체 림(RIM)이나 ‘세계 1위 휴대전화 단말기 업체’ 노키아를 인수할 수 있다. 림은 최근 QNX라는 새 운영체제를 사들여 플레이북이라는 태블릿PC와 최신 휴대전화에 탑재했다. 삼성전자가 채택할 것이 유력한 플랫폼 다변화 전략은 노키아나 모토로라처럼 한 번에 ‘망조 드는’ 것을 방지하는 헤지 전략이라 보아야 한다. 

삼성전자는 소프트웨어 특허가 부족한 탓에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안드로이드 운영체제가 자사 기술특허를 침해했다는 법원 판결에 기초해 전세계 휴대전화 제조업체에게 팔린 스마트폰 한 대당 12.5달러씩 받을 뜻을 밝히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삼성전자에게는 스마트폰 한 대당 15달러를 물리겠다는 심산이다. 타이완의 스마트폰 제조업체 HTC는 지난해에 판매된 스마트폰 단말기당 소프트웨어 사용료로 5달러씩을 지급하는 특허 사용 계약을 체결했다. 삼성전자는 2015년에는 한 해 4억3천만대나 되는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을 팔 것으로 전망된다. 삼성전자는 최악의 경우 60억 달러가 넘는 특허료를 지불해야 하는 지경에 처할 수 있다. 더욱이 오라클까지 자사 기술특허를 침해했다고 소송을 제기할 뜻을 밝혔다.

특허가 유력한 경쟁 무기로 돌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특허는 회사가 가진 기술력을 입증하는 장치에 불과했다. 하지만 애플이나 마이크로소프트, 오라클처럼 소프트웨어 기술력을 갖춘 업체들이 자체 개발하거나 인수 업체가 보유한 특허를 앞세워 경쟁 업체를 상대로 특허권 침해 소송을 잇달아 제기하면서 특허는 유력한 경쟁 무기로 돌변했다. 삼성전자는 뒤늦게 소프트웨어 기술력을 강화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이건희 회장까지 나서 S(소프트웨어) 직군을 새로 만들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를 적극적으로 영입하라고 지시했다. 삼성전자에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가져온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앤디 루빈(현 구글 부사장)을 문전박대하고 구글로 쫓아보낸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삼성전자가 채택한 플랫폼 다변화 전략은 조선·자동차·엔지니어링·화학 업체의 경쟁 전략으로도 유효하다. 세계 1위 조선 업종은 사업 포트폴리오 다변화 전략을 채택했다.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은 조선에 치중한 사업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하고 있다. 해양 시추선(드릴쉽)이나 첨단 LNG선부터 해양 풍력발전소나 태양광 사업까지 펼치고 있다. 미국 시장에서 고속 질주하고 있는 현대차그룹은 시장 다변화 전략을 채택했다. 현대차그룹의 미국 시장 의존도는 16.5%에 불과하다. 중국과 인도 시장 판매 비중은 각각 18.6%와 9.6%로, 갈수록 커지고 있다. 그동안 대지진 탓에 조업에 차질을 빚던 일본 자동차 3사가 미국이나 유럽 시장에서 반격하더라도 현대차그룹이 입는 타격은 크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포스코는 인도와 인도네시아에 제철소를 짓고 있다. 글로벌 시장 공략에 앞서 생산 기반을 다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 마이크로소프트의 스카이프 인수 발표회장에서 MS의 스티브 발머 CEO(왼쪽)와 스카이프의 토니 베이츠 CEO가 악수를 하고 있다. ⓒAP연합

일본 기업들은 경쟁적으로 덩치를 키우고 있다. 세계 투자 금융 정보 제공 업체 딜로직에 따르면, 올해 들어 지금까지 일본 업체들은 4백66억 달러를 쏟아부어 3백61개 해외 업체를 인수했다. 지난해 8월까지 해외 투자액의 2배가 넘는다. 2009년 전체 투자액보다 70%나 많다. 일본 맥주업체 기린은 지난 8월2일 2천억 엔을 들여 브라질 2위 맥주업체 스킨칼리올의 지분 50.45%를 인수했다. 국내 업체 간 합병과 제휴도 활발히 추진되고 있다. 히타치제작소와 미쓰비스중공업은 2013년 4월까지 매출 12조 엔 규모의 초거대 회사를 출범시킨다는 목표로 합병 협상을 벌이고 있다. 히타치, 소니, 도시바는 휴대전화용 액정표시장치(LCD) 패널 사업을 통합했다. 미쓰비시는 닛산과 손잡고 전기차를 개발하는가 하면 후지필름과 함께 제약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스미토모금속산업은 니혼제철과 합병한다. 케빈 브라운 파이낸셜타임스 아시아 담당자는 ‘일본에게는 두 가지 선택밖에 없다. 엔화 강세에 힘입어 해외 사업을 확대하거나 인수·합병을 통해 비용은 줄이고 덩치는 키워 장기 수익 구조를 개선하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중국은 전세계 선진 업체들을 마구잡이로 사들이고 있다. 올해 상반기 중국 기업이 해외에서 인수한 업체는 1백7개나 된다.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14%나 늘었다. 중국 페트로차이나는 지난 2월 미국 옥시덴탈페트롤리움의 자회사를 24억5천만 달러에 인수했다. 중국 국영 화학업체 란싱은 지난 1월 20억 달러를 들여 노르웨이 태양광업체 엘켐을 사들였다. 중국 최대 가전업체 쑤닝은 6월 일본 가전업체 라옥스의 지분 51%를 1억 달러에 인수했다. 하이얼이 일본 산요전기를 사들이고 중국 자동차업체 경서중업은 미국 델파이의 자동차 부품 사업 부문을 인수했다. 

미국에서는 주로 정보통신 산업 영역에서 인수·합병이 활발하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지난 5월 인터넷전화업체 스카이프를 85억 달러에 인수했다. 애플은 지난 7월 캐나다 통신 장비 업체 노텔의 특허 부분을 45억 달러에 사들여 특허 부족을 만회하려 했다. 휴렛패커드(HP)는 지난 2009년 11월 네트워크 업체 3Com을 인수한 데 이어 지난 2010년 8월에는 스토리지 업체 3PAR를 사들였다.

일본, 미국, 중국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인수·합병에 국내 기업은 배제되었다. 인수·합병은 양날의 칼이다. 비용은 줄이고 시장 지배력은 키울 수 있으나 자칫 ‘승자의 저주’로 인해 기업 존망까지 위협하는 경우도 있다. 미국·일본·중국 업체가 주도하는 덩치 키우기가 경쟁 환경을 어떻게 바꿀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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